'압도적 적'과 마주한 엄혹한 상황에서[이동기]
'압도적 적'과 마주한 엄혹한 상황에서[이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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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시비를 피하려 해도 적과 대면하는 경우가 생긴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마찬가지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능한 선택은 도망가거나 싸우는 것뿐이다. 도망간다면 무조건 적의 승리 즉 패배이며 싸우더라도 진다면 역시 패배다. 패배했다면 무대에서 퇴장해야 한다. 때로 남김없이 파괴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경우도 생긴다. 이것은 모든 싸움의 룰이다.

싸움의 상대가 모두 적(敵)은 아니다. 아무리 나를 미워하더라도 나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면 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를 해치려는 의사와 더불어 상대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어야 비로소 적이 된다. 나를 해칠 능력은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약점을 파고드는 능력이다. 건드려서 꺼꾸러트릴 수 있다면 강하다는 표현 자체와 위배되므로 나를 파괴하려는 적은 결코 나의 강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다. 내가 내심 걱정하는, 혹은 별 것 아니라고 간과하거나 미처 인지하지 못한 나의 약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그러므로 싸움은 언제나 나의 약점에서 비롯된다. 나의 약점은 적의 강점이다. 동시에 적의 강점은 나의 약점이다. 둘은 동의어다. 한편 서로의 약점과 강점이 얽힌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는 유일한 방법 역시 나의 강점으로 적의 약점을 상대하는 것뿐이다. 적의 약점이 나의 강점이기 때문이다. 또 나의 강점이 적의 약점이기 때문이다. 둘 역시 동의어다. 이기려면 나의 약점을 최소화하고 나의 강점을 키워야 한다. 이는 적의 약점을 파고들고 적의 강점을 무력화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철저한 이념무장과 상황논리 개발, 감성적 선(善) 혹은 정치적 올바름 선점, 저희끼리의 단결, 선전선동과 완성도 높은 쇼의 연출, 사회 주요 기저에 구축해 놓은 견고한 진지들. 이 모두는 저들의 강점이다. 반면 웰빙에 취해버린 이념의 공백, 어이없는 분열, 대중의 감성에 호소하기는커녕 불필요한 오해만 사는 사회적 둔감과 부주의, 인물을 키우지 못하는 편협함 등은 우리의 약점이다. 적들의 강점은 너무나 강고하고 그만큼 우리의 약점은 치명적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상황은 분명 절망적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근거는 더욱 치명적인 저들의 약점이다. 한마디로 거짓과 무능이다. 거짓과 무능은 애초 저들이 적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저들은 천국을 약속하며 공동체의 미래를 파괴하는 무능 때문에 경계의 대상이 되었고 거짓으로 세를 불렸기 때문에 마침내 적이 되었다. 거짓과 무능이 아니었다면 저들이 적이 될 이유조차 없었다. 분명 저들도 자신의 약점에 대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이다.

세상물정 모르고 거짓말을 일삼는 직업혁명가들이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용한다거나 사회를 번영으로 이끈다는 건 논리상의 모순이다. 제아무리 충심으로 조언한들 결코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저들은 몰락하게 되어 있다. 몰락은 필연이다. 문제는 시기다. 너무 늦은 승리는 누구의 승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싸움이지만 우리의 전략은 자명하다. 승리의 시기를 앞당기려면 저들의 약점을 파고들어야 한다. ‘지속적인 번영을 가져다 주는 유일한 수단은 시장뿐’이라는 이념적 진실과 ‘자신을 지키려 노력한 국가만 살아남았다’는 역사적 교훈을 무기로 저들의 거짓과 무능에 맞서야 한다. 동시에 이미 노출된 약점들을 수선해 적이 넘볼 수 없는 강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앞으로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보다 강해지고 비로소 완성되리라는 점이다. 약점을 줄이고 강점을 키운 우리는 그리하여 마침내 승리를 움켜 쥔 우리는 결코 예전 모습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정확히 싸움의 치열함만큼, 흘린 피와 눈물만큼 진화할 것이다. 적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적의 존재가 고마운 역설이 여기에서 나온다. 이 싸움의 존재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동기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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