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권리, 갑을에 관계없이 법 앞에 평등히 보호 받아야
'궁중족발 망치사건' 살인미수 혐의 무죄...건물주가 가해자였으면?

황성욱 객원 칼럼니스트
황성욱 객원 칼럼니스트

한국사회의 중병 중의 하나가 갑과 을이란 프레임이다. 갑은 강자고 을은 약자니까 을에게는 혜택을 주어야한다는 인식을 말한다. 심지어 이런 마인드는 법조인들에게조차 퍼져있다. 필자는 어떤 세미나에서 비슷한 또래의 법률가가 ‘억강부약(抑强扶弱)’이란 용어를 써가며 법의 취지를 해석하자는 말을 했을 때 아연실색을 했다. 다행히도(?) 나이 지긋한 선배 법조인이 그것은 권리의무를 분별하는 법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라 비판했다. 개인에게 권리가 있으면 보장하는 것이 법이지 그가 무슨 이유로 갑이 되는 순간 부당하게 그것도 법적으로 차별받아야하냐는 비판에 모두들 수긍했다. 법 앞에 평등이란 말을 각자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을 하든, 적어도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 판례 속에 갑을관계에 따라 판단하라는 말은 없다.

최근에 회자되는 사건 중에 궁중족발 사건이란 것이 있다. 새로 건물주가 된 소유자가 계약기간이 만료된 임차인과 임대차 계약관계를 끝내려는 과정에서 임차인이 임대인의 머리를 망치로 가격하고 휘두른 사건이다. 이를 다룬 형사재판은 유죄를 인정했으나 살인미수의 점은 국민참여 배심원단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무죄가 선고되어 사실상 감형이 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일부 법조인들은 그간의 판례에 비추어 살인의 고의를 매우 좁게 인정했다고 평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건을 두고 일의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한 네티즌이 “망치든 사람이 임대인이었으면 과연 저렇게 판결이 선고됐을까?”라고 던진 의문은 현 법정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비슷한 사건이 2015년 인천에도 있었는데, 이때는 살인미수의 고의를 법원에서 인정한 바 있다. 필자는 ‘이 사건도 여론재판이 되고 언론의 관심을 받았으면 과연 살인미수의 고의가 인정되었을까?’라는 의문을 추가로 던져본다. 

갑을관계의 어원은 계약서에서 나왔다. 보통 채권자는 갑, 채무자는 을로서 계약서에 표기된다. 아니면 갑이 주로 서비스를 요구하고 대금을 지급하는 쪽이고 을이 용역을 수행하는 입장이다. 그와 같은 관계기 때문에 거래관계상 갑의 요구를 을이 들어주는 입장이어서 이를 갑을 관계라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갑이 강자고 을은 약자라는 좌익 신분적 사고를 결합시킨 것이 세간에서 통용되는 갑을관계 개념이다.

갑을관계라는 개념은 사실 대단히 비법치주의적인 사고방식이다. 계약은 그것이 신분제나 국가가 강요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닌 한 양당사자가 각자가 바라는 대가를 교환함으로써 모두가 만족하는 것이 본질이다. 불평등한 갑을관계가 싫다면 갑을관계에 애당초 들어가지 않으면 된다. 물론 자유시장경제가 발달하지 않거나 자유민주주의사회가 아닌 경우에는 불합리한 역사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조선시대에 양반과 상민의 계약이 과연 지금과 같은 계약이겠는가.

조선시대 같은 전근대국가와 20세기 사회주의 노예체제에서 ‘을’들을 해방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 국민들이 지난 대선에서 그토록 적대감을 표출했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였다. 특혜나 법적인 신분보장이 없는 자유시장 속의 갑은 갑들 간의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유능한 을과 계약을 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최선의 이익을 얻어야하는 모순에 시달린다. 을은 경쟁자인 을보다 자신의 능력을 올려야 하는 압박을 받지만, 자신의 몸값을 더 쳐줄 요량이 있는 갑들이 시장에 존재함으로 인해 대가를 받게 된다. 

법치주의는 이러한 갑을관계를 더 평등하게 한다. 갑을 간의 계약서에 없는 사항은 각자의 위험영역 속에서 각자 책임으로 서로 이익을 추구하되, 최소한 이것만큼은 서로 간에 지킬 것을 법으로 확정짓게 함으로써 예측가능성과 손해의 한계를 미리 예상할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은 본질을 도외시한 채, 강자와 약자라는 허구적 갑을관계 개념을 적용시켜버리면 또 다른 갑을관계가 발생하는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당초 당사자들이 자신의 책임 영역 하에 두기로 약속했던 부분을 갑자기 다른 잣대로 변경을 가하고 그에 의해 결론이 난다면 결국 당초 갑을이 뒤바뀌는 현상이 발생한다.

즉 어떤 사람이 돈을 빌려주었는데, 돈 빌린 사람이 약자, 을이라는 이유로 돈을 안 갚고, 갑이 단지 을보다 경제적으로 조금 낫다는 이유로 그의 권리를 무시한다면, 결국 을이 갑이 되어 애초 갑의 돈을 착취한 것이 된다. 새로운 갑을관계의 창설이다. 이러한 모순은 갑을관계라는 개념을 적용하면 적용할수록 또 다른 갑을관계가 무한 반복되는 모순으로 이어진다. 

최근 대한민국 사회에서 도는 말 중의 하나가 ‘을질’이라는 용어다. 을이 갑보다 더하다는 말이다. 갑을관계라는 잣대로 사안을 해결하면 뒤집어진 갑을관계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면을 보여주는 말이다.

사회정치적으로 이 개념을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여론의 환기를 통해 보다 개인의 권리와 계약의 합리성을 더 고양할 수도 있고 간혹 사회적 모순을 인식으로 개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의 영역에서는 다르다. 그것이 법의 잣대로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불평등을 초래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한다.

갑을 관계라는 개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는 상대적이다. 어떤 곳에서 을인 사람이 다른 곳에서는 절대적인 갑이라는 현상을 우리는 수도 없이 목격한다. 
그래서 갑을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황성욱 객원 칼럼니스트(변호사)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