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24回. “붉은 鬪士냐, 專門家냐?”

 

1. 붉은 투사의 무능

 

유가경전 <<상서尙書>>에는 상고시대 성왕(聖王)들의 권력승계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다. 문명(文明)을 개창한 요(堯)는 퇴위를 앞두고 덕망이 높아 널리 존경 받는 순(舜)을 후계자로 선택한다. 50년 포용의 덕치(德治)를 실현한 순은 수리(水利) 사업의 영웅 우(禹)에게 후계자로 왕좌를 물려준다. 훗날 덕성이 남달랐던 순은 도덕군주의 심벌이 되었고, 기술관료 출신 우는 전문적인 국가경영의 아이콘이 되었다.

 

모름지기 한 국가의 지도자라면 순의 덕성과 우의 능력을 두루 갖춰야만 마땅하겠지만, 현실에서 그런 지도자를 만나기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확률이다. 만약 두 사람 중 한 명을 국가의 지도자로 추대한다면, 당신은 과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공직자의 청렴성과 사명감이 없으면 정부는 불신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전문성을 결여한 권력자는 행정착오와 정책실패를 초래하고 만다.

 

정치에서 도덕성과 전문성은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다. 고위관료의 임명에서 도덕성과 전문성이 선택기준이 된다면 행복한 고민일 수도 있다. 만약 도덕성과 전문성이 아니라 이념과 전문성의 양자택일이라면 어떨까? 이념의 색깔을 기준으로 공직자를 임명한다면? 그리하여 전문성은 전혀 없는 정치꾼(politico)들이 정부의 요직을 죄다 점령한다면? 정부라는 범선은 작은 풍랑에도 표류를 거듭하다 난파할 수밖에 없으리라.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1958-1962)을 전후해 중국정부의 각 조직에는 전문가들이 퇴출당한 빈 자리를 "붉은 투사들"이 모두 채웠다. 전문지식을 동원해 정부시책의 현실적 한계와 잠재적 위험성을 경고하는 전문가집단이 반혁명세력으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비판적 지식분자들의 입에는 재갈이 물렸다. 최대 4천 5백 만의 인명을 앗아간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바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인사 실패에서 비롯되었다. 과학기술의 전문성 대신 이념의 선명성을 선택했던 한 붉디 붉은 혁명가(革命家)의 치명적 오류였다. 1950년대 후반 중공정부는 왜 그런 자기파괴적 오류에 빠져야만 했을까?  


 

 

대약진운동 선전 포스터https://chineseposters.net/themes/great-leap-forward.php
대약진운동 당시 중공정부의 선전 포스터: "인민공사는 거대한 용과 같고, 생산은 위풍을 드러낸다."  
생산주체로서의 근로대중이 거대한 경제적 풍요를 불러온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https://chineseposters.net/themes/great-leap-forward.php

 

 

2. 공산주의적 인간론

 

마르크시즘에 따르면, 구조적 착취가 철폐된 사회주의 체제에서 노동자와 농민은 더욱 자발적으로 일을 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자기소외적(self-alienating)일 수밖에 없지만, 사회주의 체제 하의 노동은 자아실현적(self-fulfilling)이라는 논리이다. 1950년대 중국에서 합작사(合作社)의 일원으로 집단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중국의 농민들에게 그러한 공산당의 선전이 과연 먹힐 수 있었을까? 농민들의 태업이 일상화되면서 농업부문의 생산성은 격감할 뿐이었다. 사적소유도, 이윤동기도 없는 사회에서 공공선을 위해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인간이 과연 몇 프로나 될 수 있을까? 

 

모택동 역시도 인간의 "선한 본성"을 신뢰하지는 않았다. 1940년대 연안시절부터 정풍(整風)운동을 통해 그는 "인간개조"를 실험해왔다. 1949년 이후에도 중국 전역에선 대규모 정치운동이 끊일 새가 없었다. 지주를 숙청하는 토지개혁운동, “反탐오(貪汚), 反낭비, 反관료주의”의 이른바 삼반운동(三反운동), 외국인의 강제추방으로 이어진 반제(反帝)운동, 자본가를 겨냥한 반자본주의 운동, 인텔리들을 숙청하는 反우파운동, 참새 및 해충을 박멸하는 제사해(除四害)운동 등등. 표면상 적인(敵人) 혹은 반혁명세력의 제거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인민전체에 대한 전체주의적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1847년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프랑스 아나키스트 푸르동(Proudhon, 1809-1865)을 비판하면서 "모든 역사는 인간본성을 변화시키는 지속적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각 시대에 상응하는 인간의 본성이 있다는 사고이다. 그런 관점에서 탐욕, 이기심, 시기심 등 인간의 “어두운” 본성은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정신적 병리현상일 뿐이었다. 사적소유와 구조적 착취가 인정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인간은 탐욕적이고 이기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지만,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사람들은 이타적이고 공동체적인 인간으로 개조될 수 있다는 발상이다. 마르크스 인간론에서 개인의 고유성은 부정된다. 개개인의 성격 차이도 환경요인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인간에게 소유욕과 이윤동기는 너무나 강렬한 생존의 기본욕구이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도 인간의 이기심과 소유욕은 쉽게 소멸될 수 없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모택동은 모든 인간이 “붉은 투사”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 정권 아래선 소유욕, 이윤동기 등 인간의 이기심은 죄악시된다. 이기심을 부정한 이상, 인위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이타심을 주입해야만 한다. 인간을 이타적인 선한 존재로 개조하지 않으면 공산주의는 실현될 수 없다. 모택동은 모든 인민에게 “비판과 자아비판”이 요구했다. 비판이란 남의 허물을 질타하는 것이고, 자아비판이란 공개적인 고해성사를 말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불굴의 혁명정신과 인류애를 가진 공동체의 일원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마르크스는 사회체제의 변혁은 인간본성의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교시를 따라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폴 포트 등 20세기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모두 인간의 악한 본성을 교정(矯正)하려 했다. 그런 인간개조의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이 최악의 디스토피아로 귀결됐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3. “붉고도 전문적인” (又紅又專)

 

1953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인민회의를 소집해 전격적으로 제1차 5년 계획(1953-1957)을 수립했다. 근대산업시설의 국유화, 농업부문의 대규모 집산화 및 중앙집권적 경제계획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경제 개발정책이었다. 중공정부는 694개의 산업화 프로젝트를 수행했는데, 그 중 156개 프로젝트는 소련의 원조를 받았다. 소비에트식의 발전 전략에 따라 산업화의 기초를 닦는 과정이었다. 중국은 소련의 지원과 자문을 통해 산업화를 추진했지만, 1956년 이후 흐루쇼프(1894-1971) 총리가 탈-스탈린(de-Stalinization)을 선언하면서 중소이념갈등이 심화됐다. 

 

소비에트 수정주의의 위험성을 감지한 모택동은 중국 특색의 발전노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중국 특색의 발전전략은 결국 정치운동과 대중노선 밖에는 없었다. 근로대중이 주체가 되어 단기간에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한다는 발상이었다. 195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모택동은 대중동원의 정치운동을 전개한다. 그 밑바탕엔 과학기술의 근대화를 이끌던 전문가집단에 경계심이 깔려 있었다.

 

1950년대 말 소련사회는 기술관료집단(technocrats)이 지배하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마르크시즘은 노동자와 농민,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차별을 철폐하는 혁명이념이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 정부는 바로 직업적, 지역적, 직종상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극단적인 평등주의 정책을 실행했으나······.  스탈린 시대 산업화 과정에서 전문가집단은 새로운 권력층으로 등장했다. 중국 역시 소련의 전철을 밟고 있었다. 산업, 농업, 과학기술, 국방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선 치밀한 계획 수립과 효율적 정책 실행이 요구되었다. 그 결과 중국 역시 주요공직은 전문가집단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들은 전문지식을 동원해 과학기술 분야의 주요정책을 결정했고, 급기야 권력층으로 부상했다. 학력의 차이가 사회계급적 차이를 낳는 "봉건적 유습"이 되살아난 셈이었다. 모택동은 사회주의 이념이 투철하지 못한 “백색 전문가”들을 경계했다. 그는 “백색 전문가”들을 몰아내기 위해선 붉고도 전문적인, “우홍우전”(又紅又專)의 인재들을 배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약진 운동이 추진되던 1958년 1월 31일 모택동은 “깡통 정치꾼들을 배격해고, 실용주의자들을 물리쳐야 한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실용주의자들이란, 단기적인 성과를 위해 사회주의 이념을 대수롭지 않게 포기하는 소비에트의 수정주의자를 의미했다. 깡통 정치꾼이란, 전문지식은 전혀 없이 앵무새처럼 혁명이론만 읊조리는 교조주의자들이다. 양자의 오류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모택동은 “정치와 기술,” 혁명가와 전문가의 결합을 강조한다. 

 

과연 어떻게 노동자, 농민 등 생산현장의 일꾼들이 전문기술과 고급지식을 습득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모택동의 해결책은 순수하리만큼 단순했다. 바로 근로대중과 전문가집단이 직접 만나면 된다. 노동자와 농민은 정기적으로 연구소의 실험에 직접 참여하고, 과학자 및 기술자는 현장에서 노동을 체험하는 방법이었다. 근로대중은 현장의 체험을 전문가에게 전하고, 전문가는 근로현장의 경험을 통해 혁명정신을 벼리는 이른바 "변증법적 상호침투"의 과정이었다. 모택동은 바로 그 과정을 통해서만 붉고도 전문적인, 우홍우전(又紅又專)의 “홍색 전문가”들이 탄생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1950년대 우파분자들을 농동교양형에 처하고, 문혁시기에 홍위병들을 농촌에 하방시킨 것 역시 지식인들을 이념적으로 붉게 만드는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의 결과였다. 

 

전문지식의 학습을 위해 대학에 가는 이른바 공농병 대학생들http://www.szhgh.com/Article/wsds/history/2017-06-29/141208.html
전문지식의 학습을 위해 대학에 가는 이른바 공농병(工農兵) 대학생들
http://www.szhgh.com/Article/wsds/history/2017-06-29/141208.html

 

 

4. “모택동의 주체사상: 어떻게 할 것인가?”

 

북한의 김씨왕조는 늘 김일성이 마르크스-레닌이즘을 창의적으로 발전시킨 “주체사상”의 창시자라 선전하지만, 실제로 “주체사상”은 이미 1930년대부터 모택동이 제창한 “주관능동성”의 철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듯하다. 다만 현대중국어에선 “주체사상”이란 용어대신 “자력갱생사상”이라는 용어를 더 흔히 사용한다.

 

모택동은 인간이 자발적이고도 창의적인 노력을 통해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조건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역사의 법칙성을 자각한 근로대중의 자발적 실천이 바로 농촌인구가 90프로에 달하는 러시아와 중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먼저 일어날 수 있었던 근본동력이라 생각했다. 그런 혁명의 경험에서 그는 대중적 역량을 결집하면 비약적인 역사발전이 가능하다는 무한긍정의 교리(敎理)를 도출했다. 모택동이 제창한 "주관능동성의 철학"은 물적 토대를 강조하는 정통 유물론(唯物論)이라기 보단 정신의 잠재력을 강조하는 유심론(唯心論)에 가깝다.

 

모택동은 근로대중의 능동성을 강조하기 위해 줄곧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를 즐겨 인용했다. 모택동은 맨손으로 돌을 하나씩 옮겨 결국 산을 옮기는 우직함이야말로 혁명적 근로대중의 독립적, 자주적, 주체적 역량이라 확신했다. 1950-60년대 중국에선 우공이산의 고사를 연상시키는“위대한 중국인민”의 영웅적 성취의 스토리들이 매스컴을 타고 전 인민의 뇌리를 파고 들었다. 대표적인 세 가지 성공사례만 살펴보자.

 

사례#1: 흑룡강 대경(大慶, 따칭) 유전(油田)의 발견

 

모택동의 주체사상 밑바탕엔 반서구, 반외세, 자문화중심주의 및 고립주의의 아집과 폐쇄성이 깔려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19세기 중엽 아편전쟁 이래 중국인들은 줄곧 외국기술 및 외국자본에 대한 불신을 품고 있었다. 중국인들에게 소련을 포함한 외국의 전문가는 모두 양귀자(洋鬼子), 즉 서양귀신일 뿐이었다.

 

중소 이념분쟁이 격화되던 1960년 흐루쇼프는 1만 명의 중국주재 소련 과학자 및 기술자들 모두 본국으로 소환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공지도부는 더더욱 자주노선을 강조하게 된다. 모택동은 외세의존성 발전전략을 폐기하고 빛나는 혁명정신과 애국심으로 중무장한 중국의 “붉은 전문가”들이 자주적으로 중국특색의 새로운 발전모델을 찾아야만 한다고 부르짖었다.

1959년 흑룡강 대경 유전의 발견은 모든 중국인에게 자주노선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특별한 계기가 되었다. 1950년대까지 서구의 지질학자들은 중국에는 대규모 유전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 외국전문가들의 회의론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지질학자들과 굴착노동자들은 우공이산의 정신으로 유전을 찾고 또 찾았다.

 

대경에서의 굴착은 1958년 시작되었다. 감숙성의 유전 발굴대와 인민해방군의 요원들에게 그 험한 임무가 맡겨졌다. 특히 감숙과 사천 지대에서 유전 개발을 담당했던 “철인정신”의 굴착노동자 왕진희(王進喜, 1923-1970)의 맹활약이 두드러졌다. 중소분쟁 이후 중국은 에너지 부족난을 겪고 있던 상황이었다. 1년에 걸친 혼신어린 굴착 작업의 결과 불굴의 노동자들은 드디어 소비에트의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순수한 중국만의 기술력으로 대규모의 유전을 발견하게 되었다. 1961년 최초로 60만 톤의 원유를 생산했고, 그 이듬해부턴 백만 톤을 넘는 원유를 생산할 수 있었다. 원유 수입국이던 중국이 자체적 기술력으로 산유국의 꿈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대경의 노동자들은 대경에 자족자급의 인민공사를 건설하고 공동의 생활을 시작했다. 1960년대 중국 전역이 대약진운동의 실패에서 재건에 몰두할 때에도 대경의 채굴노동자들은 모택동의 지시에 따른 사회주의의 건설을 지속했다. 때문에 대경의 인민공사는 1970년대 초까지도 아름다운 성공사례로 널리 칭송되었다. 대경 유전의 채굴노동자들은 모택동이 칭송해 마지않는 ‘붉고도 전문적인,“ 외국의 기술에 의존하지 않는, 오로직 중국만의 "홍색 전문가"들이었다.

 

혹한에 맞서는 흑룡강 대경의 굴착노동자들 (1971)http://www.sacu.org/pic32.html
혹한에 맞서는 흑룡강 대경의 굴착노동자들 (1971)http://www.sacu.org/pic32.html

 

사례 #2: 산비탈 대수로의 개발

 

홍기거(紅旗渠, Hongqiqu)는 하남성 북쪽 끝 안양시에서 북서쪽 80킬로 지점에 위치한 관개(灌漑) 수로 혹은 운하이다. 하남과 산서의 경계에서 시작된 이 수로는 42개의 터널을 지나 태항산맥을 에둘러 산비탈을 끼고 71킬로나 이어진다. 홍기거는 대약진운동 당시 공사가 시작되어 1965년에야 준공되었다. 최초로 홍기거의 건설 기획은 낸 주체는 농촌 청년들이었다. 이 청년들 중에선 단 한 명만이 약간의 공학 교육을 이수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청년들은 자발적으로 수개월 간 산간벽지를 두루 답사하면서 수로 건설의 가능성을 거듭 확인했다. 

 

청년들은 치밀하게 운하건설 계획서를 작성해 지방정부에 제출했다. 지방정부는 전문가들에 의뢰하여 청년들의 계획을 검토케 했는데······. 전문가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전문가들은 청년들의 계획안이 실현가능성이 희박할 뿐더러, 공사를 한다고 해도 큰 경제성도 없는데도 관리도 위험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전문가의 반대에 직면한청년들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문가의 의견에 굴복하긴커녕 오히려 더욱 진취적 기상을 발휘해 수로개발을 추진했다. 결국 청년들의 기백에 질린 지방정부의 관료들은 공사지원을 결정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중국의 경제가 침체기로 접어들었다. 모택동은 고난을 극복하는 영웅적인 인민의 주체적 역량의 발휘를 강조했지만, 국가주석 유소기(劉少奇, 1898-1969)는 부분적 이윤동기의 인정과 전문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수정주의적 개발전략을 제시했다. 유소기 정부는 전문성을 결여한 농촌청년들의 혁명의지를 신뢰하지 않았다. 모택동의 자력갱생철학으로 무장한 청년들은 그럼에도 불굴의 의지로써 개발계획을 밀고 나갔다.  


4년에 걸쳐 71킬로의 물길를 완성하는 동안 지방정부는 네 차례나 공사 중지 명령을 내렸다. 원자재의 공급이 중단되고 사찰단의 감시가 이어졌다. 농촌 청년들은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사찰단의 감시를 피해가며 공사를 지속했으며, 급기야 보란 듯이 홍기구를 완성했다. 홍기구란 붉은 깃발의 물길이란 의미이다. 홍기구는 곧바로 대성공의 사례로 칭송되기 시작했다. 청년들의 지도 아래 수백 명의 근로대중이 맨손으로 해머를 들고 절벽을 타고 오르며, 손망치와 정으로 바위를 깨며, 밧줄에 묶은 바위로 축대를 쌓으며, 목숨을 걸고 이룩해낸 자력갱생의 상징물이었다. 무엇보다 농촌의 청년들이 백색 전문가들을 물리치고 “홍색 전문가”로 거듭 태어난 모범 사례가 되었다. 1970년 중국 정부는 홍기구의 기적을 칭송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해 전국에 배포했다. 정부의 선전에 의해 홍기구는 전문가의 지식보다 인민의 의지가 훨씬 더 위대하다는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로 활용되었다. 

 

홍기구의 모습http://big5.xinhuanet.com/gate/big5/www.ha.xinhuanet.com/travelnews/20160616/3210288_c.html
홍기구의 위용
http://big5.xinhuanet.com/gate/big5/www.ha.xinhuanet.com/travelnews/20160616/3210288_c.html

 

 

사례 #3: 산서성 대채(大寨, Dazhai)의 자력갱생

 

1950-60년대 중국에는 모택동 자력갱생의 정신을 체현한 또 한 집단의 농민들이 있었다. 산서성 북부 석양현(昔陽縣)의 후미진 마을 대채의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마을지도자 진영귀(1915-1986)의 지도 아래 놀라운 희생정신과 불굴의 혁명의식을 발휘해 산간벽지의 가난한 농촌 마을을 곡물이 넘쳐나는 자력갱생의 낙원으로 변화시켰다. 산을 깎아 개간한 전답은 촌민들에게 경제를 풍요와 여유를 안겼지만,  대채의 농민들은 작은 성취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과 공학이론을 적용해 산간에 저수지를 건설했다. 또 효율적 관개(灌漑)를 위해 계곡을 가로지르는 대규모의 송수로까지 직접 구축했다.

 

대약진운동이 처참한 실패로 막을 내린 1963년, 모택동은 다시금 열을 올려 “농업은 대채를 배우라!”(農業學大寨)를 부르짖었다. 날마다 신문, 방송 및 거리의 확성기에선 대채의 성공사례를 칭송하는 정부의 선전이 끊이질 않았다. 중국 전역의 농민들은 대채 농민의 혁명정신과 창의성을 학습하기 위해 완행열차의 바닥에 앉아 멀고 먼 산서성까지 몰려들었다. 대채 마을은 문화혁명이 한창일 때 농촌의 사회주의화를 예시하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극구 칭송되었다. 무엇보다 대체는 농민들 스스로 사회주의 혁명이념을 현실에서 구현한 자력갱생의 유토피아로 널리 알려졌다. 

 

산서성 대채의 풍경도
산서성 대채의 풍경도 (출처미상)

 

5. 판교(板橋, Banqiao)댐과 석만탄(石漫灘, Shimantan)댐의 붕괴

 

모택동의 “자력갱생철학”은 그러나 장쾌한 성공의 드라마로 귀결되진 않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끊임없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정부시책의 현실적 한계를 지적하는 전문가들은 정부의 탄압과 인민재판 앞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인민의 의지와 근로대중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전국적 대중동원은 전문가의 설자리를 빼앗았다. 그 결과 인류사에서 기록될 대규모 참사가 일어났다.

 

1975년 8월 태풍 니나가 한랭전선과 충돌하면서 하남성 일대엔 단 하루 만에 연간 강우량을 웃도는 폭우가 쏟아졌다. 안절부절 위험수위만 재고 있던 관리본부에서 가까스로 수문을 열고 대규모의 방류가 시작했지만, 곧이어 댐은 와르르 붕괴하면서 7개현이 침수되고 말았다. 수십 만 평의 농지와 마을이 동시에 물에 잠겼다. 30년이 지난 2005년에야 기밀 해제된 하남성 정부의 공식보고에 따르면 2만6천명이 침수로 목숨을 잃었고, 14만 5천 명이 전염병과 기근으로 사망했다. 거의 6백 만 채의 건물들이 무너졌으며, 피해인구는 1천1백만 명에 달했다. 비공식 통계로는 23만 명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과연 판교댐과 석만탄댐의 붕괴는 천재였을까? 아니면 인재였을까? (계속)

 

무너진 판교댐의 모습 (1975)http://www.feedintro.com/horrible-floods-world-history/
무너진 판교댐의 모습 (1975)
http://www.feedintro.com/horrible-floods-world-history/

 

송재윤(펜앤 객원칼럼니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Leslie W. Chan, The Taching Oilfield: A Maoist Model for Economic Development (The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Press, 1974). 

Yi Si, "The World's Most Catastrophic Dam Failures: The Ausut 1975 Collapse of the Banqiao and Shimantan Dams," in Dai Qing, ed., The River Dragon Has Come! The Three Gorges Dam and the Fate of China’s Yangtze River and Its People (Routledge, 1998). 

Joel Andreas, Rise of the Red Engineers: The Cultural Revolution and the Origins of China's New Class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9)

David Wade Chambers, et al., Red and Expert: A Case Study of Chinese Science in the Cultural Revolution (Deakin University, 1984)

Karl Marx, The Poverty of Philosophy: the Answer to the Philosophy of Poverty by M. Proudhon,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7/poverty-philosophy/

Mao Tze-tung, "Red and Expert"(Jan. 31, 1958), Selected Works of Mao Tze-tung,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mao/selected-works/volume-8/mswv8_04.htm

潘鈜,  "毛泽东论科学技术与技术革命," 中共中央文献研究室,中国中共文献研究会,毛泽东思想生平研究分会编 《毛泽东与中华民族伟大复兴:纪念
毛泽东同志诞辰120周年学术研讨会论文集(上)》,中央文献出版社, 2014。

1970년 중국정부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홍기거>>, https://www.youtube.com/watch?v=wtkiJk9nG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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