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 정책의 비일관성: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오작동하는 경우 [유태선]
미국 정부 정책의 비일관성: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오작동하는 경우 [유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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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08.27 09:42:42
  • 최종수정 2018.08.30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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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헌법상 견제와 균형의 원리 (the principle of checks and balances)는 국가권력을 각각 독립된 조직에 분산시키고 국가기관 상호간의 견제와 권력 균형을 통하여 미국인들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 법이어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미국 헌법상 권력 분립 (separation of powers)의 원칙 하에서 개별 정부기관들이 각자 법 집행의 구체적 타당성을 추구하면서 일관성이 결여된 정책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 결과 미국 정부 정책이 특정인에게 예상하지 못 했던 불이익을 주기도 하고 나아가 정부를 신뢰하여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던 민간인들이 형사처벌을 받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러한 정부 정책의 비일관성에 따른 각종 부작용들은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작은 정부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지지하도록 하는 강력한 논거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중앙정부 우위의 행정국가 체제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쉽게 이해하기 힘든 미국적인 현상이다.

아래에서 미국 헌법상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한 결과 미국 정부 정책이 민간인들에게 의도하지 않은 피해를 가져오게 되었던 대표적인 사례들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1. 입법부와 행정부 간의 견해 차이: 국제연맹 (The League of Nations) 가입 문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 평화회의 (Paris Peace Conference)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은 세계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국제기구를 제안하였다. 그 결과 1919년 6월 28일 조인된 베르사유 강화조약 (The Treaty of Versailles)에 근거하여 1920년 1월 10일에 국제연맹이 설립되었다.

그런데 국제연맹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설립을 주도하였던 미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하지 못 했다는 점이다. 결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네 나라가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으로서 세계평화 유지의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이들의 국력으로는 독일, 소련 등을 물리력으로 제압하기 쉽지 않았다.

당시 미국이 국제연맹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근거조항이 포함되어 있는 베르사유 강화조약에 대하여 미국 상원의 승인을 받아야 했는데 - 미국의 대외 조약 비준을 위하여 상원의원 총수의 2/3가 찬성하여야 했다. - 1919년 현재 미국 상원의원들은 다음의 세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첫번째 그룹은 미국 상원의 다수당인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들로 그 지도자인 헨리 캐보트 로지 (Henry Cabot Lodge)는 베르사유 조약 제10조의 규정에 따라 국제연맹이 주도하는 전쟁에 미국 의회의 승인 없이 미군이 자동적으로 참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두번째 그룹은 윌슨 대통령이 소속된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들로 기본적으로 백악관과 견해를 같이 하지만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들의 견해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윌슨과 로지의 회담을 통한 타협안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번째 그룹은 베르사유 조약 승인 결사 반대파 (The Irreconcilables)로 주로 독일계 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중서부를 대표하는 상원의원들이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1916년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하던 윌슨 대통령에게 투표했었다. 당시 미국 내 독일계 주민들은 미국과 독일의 적대적 관계를 문서로 공식화하게 될 베르사유 조약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영국에 대한 반감이 강한 아일랜드계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의 상원의원들도 일부 가담하였다.

윌슨 대통령은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들의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전국 순회 연설을 통하여 국내 여론을 바꾸어 보려고 하였으나 1919년 9월 25일 콜로라도주 푸에블로에서 뇌졸증으로 쓰러진다.

미국 상원의 첫번째 그룹과 두번째 그룹은 베르사유 조약 제10조를 제외하거나 단서 조항을 추가한 후에 베르사유 조약 비준안을 통과시키는 방안에 원칙적으로 합의하였으나 투병 중이던 윌슨 대통령이 민주당 상원의원들의 행태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면서 원안 그대로 표결에 붙인 결과 같은 해 11월 19일 상원에서 찬성 39, 반대 55로 부결되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1919년 미국 상원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비준하였다면 히틀러의 독일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연맹을 두려워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못 했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미국이 국제연맹 회원국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유럽에서 독일군과 싸우다가 전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2.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견해 차이: 공민법 (The Civil Rights Act)에 대한 남부의 저항

1948년 미국의 해리 트루만 대통령은 군대 내의 인종격리를 금지하는 행정명령 9981호를 발표하였고 1957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다른 사람의 투표 행위를 방해하는 자를 연방검사들이 직접 기소하여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공민법안 (The Civil Rights Act of 1957)에 서명하였으며 1964년 린든 존슨 대통령은 인종, 성별, 종교, 출신국가에 따른 고용상의 차별을 금지하는 공민법안 (The Civil Rights Act of 1964)에 서명하였다.

대다수 미국인들이 위 법안들의 취지에 공감하였으나 조지아, 알라바마, 미시시피, 아칸소, 루이지애나 등 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상당수의 백인들은 공민법은 연방 차원이 아니라 주 단위에서 자율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저항하였다. 이들은 인종차별금지를 내용으로 하는 각종 정책들이 다른 주에서 먼저 시행되어 그에 따른 사회적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비로소 자신들이 거주하는 주에 적용되기를 원하였고 그 결과 남부 지역에서 공민법에 대한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남부에 거주하던 백인들의 기억 속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들 - 남북전쟁 (The Civil War) 이후 남부의 재건시기 (The Reconstruction Era: 1863년 ~ 1877년)에 북부 출신의 사기꾼들 (The Carpetbaggers)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흑인들을 이용하여 전쟁에서 패배한 남부의 재산을 강탈했던 각종 사례들 - 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남부의 주지사들은 지역 주민들의 정서에 편승하기 위하여 헌법상 보장된 주정부의 권한을 최대한 행사하면서 의도적으로 연방정부와 대립하는 모습을 연출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면 1963년 6월 알라바마 주지사 조지 왈라스 (George Wallace)는 두 명의 흑인 학생들이 알라바마 대학에 등록하지 못 하도록 대학교 정문을 막고 서 있었다. 결국 흑인 학생들은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파견한 주방위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알라바마 대학에 등록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은 왈라스는 1968년 대통령 선거에 미국독립당 (The American Independent Party) 후보로 출마하여 남부의 5개 주에서 승리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연방정부와 주정부 사이의 인종차별 철폐 정책에 대한 견해 대립은 케네디 대통령 암살,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암살, 베트남전 반대 운동 등과 맞물려 1968년 전후로 미국 사회에 큰 혼란을 가지고 왔다.

3. 행정부 각 부처 간의 우선순위 차이

(1) 석유가격 안정화 vs. 반독점 규제

대공황 (The Great Depression)이 한창이던 1930년 텍사스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자 미국 내 석유가격이 배럴당 1달러에서 15센트, 6센트, 2센트로 하락하면서 수많은 석유생산업자들이 도산의 위험에 처했다. 임시방편으로 텍사스 철도위원회 (Texas Railroad Commission)가 생산량 할당을 통하여 가격의 폭락을 막으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미국 내 석유산업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연방정부가 개입해야 했다.

1932년 해외 중유에 대하여 배럴당 21센트, 해외 휘발유에 대하여 배럴당 15센트의 관세가 부과되고 1933년 내무장관 해롤드 익스 (Harold L. Ickes)가 국가산업부흥법 (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에 따라 제정된 석유법에 근거하여 각 주의 월별 생산량을 결정하고 무허가 석유생산업자들을 처벌하기 시작하자 1934년부터 석유가격은 배럴당 1.18달러 수준에서 안정되었다. 익스는 할당량 이상으로 생산된 휘발유는 주요 석유회사들이 매입하여 공동기금의 형식으로 운용하도록 지시하였다.

1935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 (The U.S. Supreme Court)이 국가산업부흥법은 위헌이라고 선언하자 1936년 미국 법무부는 잉여 휘발유를 매입하여 기금의 형식으로 운영하는 것을 국내 석유가격 조작을 위한 석유회사들의 담합 행위로 보아 반독점법 (Sherman Anti-Trust Act) 위반 혐의로 관련 기업들을 기소하였다.

익스는 자신이 잉여 휘발유 처리에 대한 지시를 내렸던 사실에 대하여 철저히 함구하였으며 재판정에 참고인으로 출석하지도 않았다. 일반 대중들에게 "정직한" 해롤드 익스 ("Honest" Harold Ickes)로 알려졌던 개혁운동가 출신의 익스 내무장관도 사법처리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는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결국 공동기금의 운용과 관련하여 기소되었던 석유회사들은 연방정부에 협조했던 것이 원인이 되어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2) 국가 안보 vs. 반독점 규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해롤드 익스 내무장관은 석유관리국 (Petroleum Administration Agency)의 책임자로서 국내 석유생산량을 증가시키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석유회사 직원들을 석유관리국의 간부로 영입하고 석유생산량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유전 탐사비용을 세액공제 항목에 포함시켰다. 나아가 석유 공시가격을 배럴당 1.44달러까지 인상시키려 하였으나 물가관리국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 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법무부 장관에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 내 석유회사들을 반독점법 위반 여부 조사대상에서 제외하도록 지시하여 이들이 공동으로 석유 재고를 관리하고 영국 등 연합국에 자유롭게 원유를 공급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영국과 프랑스의 주요 석유회사들도 이에 참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미국이 가담한 연합국의 승리로 종결된 후 연방통상위원회 (The Federal Trade Commission)는 전세계 주요 석유회사들이 담합하여 국제유가를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하고 있다는 내용의 국제석유카르텔 (International Petroleum Cartel)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법무부는 그 내용에 기반하여 현실유보음모 (As-Is Conspiracy)라는 죄목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의 주요 석유회사들이 원유의 공동생산 및 판매를 통하여 반독점법을 위반했는지 여부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였다.

미국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부 (CIA) 등이 전쟁 수행에 협조하는 과정에서 시작된 기업들 간의 공조체제를 반독점법 위반으로 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법무부의 결정에 반발하였다. 영국, 프랑스 정부도 자국 내 기업들 - 앵글로 이란, 로얄 더치 쉘, 프랑스 석유 (CFP) - 에 미국 법무부의 조사에 협조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해리 트루만 대통령은 석유회사 경영자들의 윤리의식에 대하여 회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주요 석유회사들의 협력 없이 이란 등 중동 산유국들에 대한 소련의 침략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53년 1월 12일 법무부에 관련 사건에 대한 수사 중단과 불기소 처분을 지시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미국 헌법상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민간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국가권력으로부터 보호하는 순기능이 있는 반면 민간인들이 미국 정부와 협력하여 일하는 경우에도 관계 행정청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도록 하는 역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자유를 헌법상 최고의 가치로 두고 있는 이상 (미국 본토가 적국에게 공격받는 등의 중대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일관성 있는 정부 정책의 필요에 의하여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약화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나아가 위 사례들은 미국 달러화가 지배하는 세계시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기업들도 이러한 미국 정부 정책의 비일관성에 따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예컨대 대한민국 외무부가 미국 국무부와의 대화를 통하여 유엔의 대북 제재 결의안을 위반한 북한 석탄의 국내 밀반입 관련 기업들에 대한 국제연합 또는 미국 정부로부터의 제재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 법무부에서 해당 거래와 관련된 개별 인물들에 대하여 당사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사법적 조치를 할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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