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타계한 이대용 장군을 아십니까
-6.25 때 나라를 지켰고 월남 패망 때 혼자 남아 교민 대피시킨 공사
-공산주의자들의 학대와 고문 속에도 지조 지켜
-"나를 강제로 북한에 이송하면 이 자리에서 죽겠다"
-스스로 얻은 영예, 진정한 영웅은 외롭지 않다

복거일 소설가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작년 11월 14일 이대용(李大鎔) 장군이 타계했다. 1925년에 태어났으니, 향년 92세였다. 유난히 어려운 시절을 산 동시대 한국인들 가운데서도 (내 선친은 1923년생이고 내 빙부는 1924년생이다), 그는 특히 힘들고 위험한 삶을 살았다. 치열한 6.25전쟁을 보병 중대장으로 맞아 늘 전선에서 싸웠고 월남 멸망 과정에서 주월대사관 공사로 현지에 스스로 남아서 교민들을 돌보다가 월맹의 수용소에 수감되어 다섯 해를 보냈다. 그런 위험과 고통을 생각하면, 그는 놀랍게도 오래 그리고 건강하게 살았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군은 병력과 장비에서 한국군을 압도했다. 북한군의 결정적 우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러시아군 최신형 전차를 갖춘 전차부대였다. 대전차무기를 전혀 갖추지 못한 한국군은 전차부대를 이용해서 전격작전을 펴는 북한군을 막아낼 전술적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북한군이 기습한 지 3일에 한국군은 조직적 전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한국군은 분전해서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는 데 성공했고, 덕분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연합군이 구원하러 올 시간을 벌었다. 그렇게 잘 싸운 한국군 부대들 가운데 으뜸은 춘천을 중심으로 한 중동부 전선을 맡은 6사단이었다.

6월 24일 다른 부대들은 장병들의 외출과 외박을 허가했지만,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해서 외출과 외박을 금지했다. 덕분에 6사단은 북한군이 기습했을 때, 온전한 전력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지역으로 남하한 북한군 2군단은 3일 동안 6사단의 저지선을 뚫지 못했다. 서부 전선이 완전히 무너진 뒤에야, 6사단은 적군에 손실을 강요하면서 질서있게 홍천으로 철수했다.

6사단이 3일 동안 중동부 전선을 잘 지키자, 북한군의 작전 계획은 크게 틀어졌다. 원래 북한군은 한국군 주력을 한강 북쪽에서 포위해서 섬멸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중동부 전선을 공격한 2군단이 예정된 시간에 서울 동남쪽 저지 진지에 닿지 못해서, 그런 계획은 실패했다. 덕분에 한국군은 패퇴한 부대들을 추슬러서 한강선 방어작전을 수행하면서, 국제연합군의 구원을 기다릴 수 있었다. 이처럼 중대한 실패의 책임을 물어, 북한군 지도부는 김일성 수상의 심복 김광협 소장을 2군단장에서 참모장으로 강등시키고, 김일성의 정적인 김무정 소장을 대신 2군단장에 임명했다.

북한군이 침공했을 때, 6사단은 7연대를 왼쪽에 배치해서 춘천 지역을 지키고 2연대를 오른쪽에 배치해서 인제와 홍천 사이의 도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춘천 싸움에서 승리한 7연대의 선임중대장이 바로 이대용 대위였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7기생으로 1948년에 임관했다. 그리고 첫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별다른 손실을 입지 않고 전투에서 이긴 뒤 온전한 부대로 물러난 덕분에, 6사단은 전력이 강했다. 그래서 아군이 북한군을 물리치고 북진했을 때 앞장을 섰다. 1950년 10월 26일 이대용 대위가 이끈 7연대 1중대는 평안북도 초산의 압록강에 이르렀다. 압록강에 맨 먼저 닿은 국군 부대의 병사가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쳤다는 일화의 주인공이 바로 이대용 대위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중공군이 청천강 이북 산줄기에 매복한 터였다. 중공군이 대규모 포위 작전에 나서자, 산골짜기를 따라 뿔뿔이 진격한 아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부대들이 서로 고립되었다. 그렇게 해서 아군의 ‘청천강 참패’가 시작되었다. 강력한 미군도 고립된 부대를 포기하는 상황이 나왔다.

가장 깊숙이 진격한 7연대는 당연히 사정이 가장 어려웠다. 지원군은 말할 것도 없고 보급이 끊겼다. 결국 10월 29일 밤 7연대는 조직적 철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각개 분산’을 결정했다. 이미 후방 깊숙이 침투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는 일은 지난해서, 7연대는 거의 다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대용 대위는 적잖은 부하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휴전 뒤 국군이 축소되면서, 고급 장교들 사이의 진급 경쟁은 점점 치열해졌다. 진급 경쟁에 이기는 자질은 전쟁에서 적군과 싸워 이기는 자질과는 상당히 다르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대용은 진급 경쟁에선 뛰어나지 못했다. 요행히, 그의 자질과 공적을 잘 아는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장군이 되었지만, 그는 끝내 사단을 지휘하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군복을 벗은 뒤, 그는 주월 대사관에서 공사를 지냈다. 1975년 4월 월남이 패망하던 시기에 그는 교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이공에 남았다. 미국 대사관을 떠나는 마지막 헬리콥터에 오르라는 미군 외교관의 제의를 마다하고, 그는 스스로 사이공에 남아서 교민들을 외국 공관에 피난시켰다. 공포가 뒤덮고 살육이 자행되는 상황에서, 적국 국민들인 우리 교포들을 대변한 외교관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요소였다.

그러나 월남을 정복한 월맹 정부에 이대용은 적국 외교관이었다. 그는 포로 수용소에 갇혔고, 외교관의 지위를 인정해달라는 그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생존이 어려울 만큼 혹독한 환경에서 날마다 고문을 당했다. 고문의 목적은 그를 북한으로 이송하려는 것이었다. 월남대사관의 부책임자였고 6.25전쟁의 영웅인 그는 북한으로선 선전 가치가 큰 인물이었다.

자신을 선전 도구로 이용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계략을 잘 아는 터라, 그는 북한으로의 이송을 끝내 거부했다. ‘만일 나를 강제로 북한으로 이송하면, 나는 차라리 죽겠다’는 그의 선언을 공산주의자들도 가벼이 여기지 못했다.

본국과의 연락이 끊기고 구출의 희망이 사라진 상황에서 도덕도 국제법도 지키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의 학대와 고문을 받으며, 그는 다섯 해를 견뎠다. 생전에 뵐 때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감탄하곤 했다, ‘이렇게 온화하고 자상하신 분이 그 지옥을 견디어냈다니!’

고국에 돌아온 뒤, 이대용 장군은 월남이 패망한 역사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힘을 쏟았다. 공산주의 월남에 패망한 자유월남의 역사는 늘 북한의 위협을 받는 대한민국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고 그는 역설했다.

이대용 장군은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영웅이다. 대한민국 국민에겐 특히 그러하다. 그래서 그의 장례는 국민적 영웅을 기리는 자리이어야 한다. 정상적인 나라들은 그렇게 한다. 나라를 위해 싸운 군인들을 기리는 전통이 특히 강한 영국, 미국, 호주와 같은 나라들에선, 그런 영웅이 죽으면, 온 나라의 깃발들이 반기로 걸려 영웅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공적을 기린다.

그러나 이대용 장군이 운명했을 때, 우리 사회는 잠잠했다. 부고를 제대로 실은 신문조차 드물었다. 국군장이 사리에 맞고 적어도 육군장으로 치렀어야 할 그의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이런 모습은 우리 사회가 깊이 병들었음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2006년에 첫 탈북 국군포로인 조창호 중위가 서거했을 때는 재향군인회장으로 치렀다. 그때 뜻있는 이들이 영웅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다고 분개했었다. 이번에는 사리에 더욱 어긋나는 장례였는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11년 동안 우리 사회는 더욱 병들고 더욱 타락했다는 얘기다.

부끄럽고 부끄럽다. 우리는 영웅을 지닐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정작 이대용 장군은 괘념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영웅은 외롭지 않다. 그에겐 스스로 얻은 영예가 있다. 그것은 누구도 빼앗지 못하고 세월도 훼손하지 못한다.

가축들은 죽고,

친척들은 죽고,

자신도 또한 죽어야 한다;

그러나 영예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을 얻을 수 있었던 사람에겐.

천년 전 서양 중세의 시인이 그리도 유창하게 지적한 것처럼, 뛰어난 사람의 행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춥고 을씨년스럽다. 그러나 자신의 영예를 덮고 누운 이대용 장군은 따스할 것이다.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작가·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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