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 칼럼] 나는 구역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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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01.10 21:23:32
  • 최종수정 2018.02.27 10:05
  • 댓글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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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진보 명명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
-우파 좌파는 역사성 있지만 저들은 좌파도 못 된다
-'보수'는 때려치고 '우파'는 삼가자
-우리 자신을 '자유공화 시민'이라 부르자
박성현(펜앤 칼럼니스트)
박성현 객원 칼럼니스트

1.

'보수 vs 진보' 구분틀은 개족보다. 보수의 반대말은 리버럴이며 진보의 반대말은 반동이다. 유럽과 북미에선 '보수 vs 리버럴'이라 부른다. 그러니 원산지의 기준에서 보면 '보수 vs. 진보'는 개족보다. 상대가 스스로를 ‘진보’라 부르려면 우리를 ‘반동’이라 불러야 한다. 상대가 우리를 ‘보수’라 부르려면 스스로를 ‘리버럴’이라 불러야 한다.

그런데 원산지 유럽•미국의 '보수vs 리버럴' 구분 자체도 개족보다. 왜?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아버지 에드먼드 버크는 당대의 리버럴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공화당의 뿌리는 미국 자유당(휘그, 리버럴)이며, 공화당이 배출한 첫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원래 골수 휘그(리버럴)이다. 예를 들어 링컨이 평생 탐독했던 책이 넷인데 이중 최소한 하나는 전형적인 리버럴 취향이다. 링컨은 성경, 셰익스피어, 유클리드(그리스 수학자), 애드가 앨런 포우를 탐독했다. 포우는 19세기 데까당 문학(허무주의 문학)의 비조다. 예를 들어 ‘악의 꽃’을 써서 유명해진 보들레르는 사상적으로는 포우의 손자 쯤 된다.

유럽•미국의 정치 흐름은 ‘보수 vs. 리버럴’로는 해독할 수 없다. 오직 [지속과 변화의 균형점을 모색하고 실현하기 위해 필사적 노력을 하는가?]를 기준으로 살필 때에만 그 미묘한 흐름이 해석된다. ‘변화와 지속 사이의 균형과 조화’---이게 흔히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사표로 꼽히는 에드먼드 버크와 아브라함 링컨의 정신이다.

좀 더 살펴 보자.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결사적으로 반대했지만, 왕실재정과 국가재정을 분리시켰고, 인도지배를 혁신하기 위해 (당대의 범털들을 적으로 삼아) 고군분투했고, (반역자란 소리를 들어가며, 미국 독립전쟁 전에) 북미에서의 획기적 자치를 주장했으며, (배신자로 몰려 테러 위협을 당하면서도) 카톨릭 교도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한 열혈 리버럴이었다.

링컨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애초 노예해방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서부 개척주들에 한해서만 '노예 없는 자유의 땅'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북전쟁 끝나고 나서야 미국 전역에 걸쳐 노예해방 헌법 수정이 있었다. (남북전쟁 끝나고도, 헌법 수정 전까지는, 델라웨어 등, 북군 편을 든 노예주에서는 노예제도가 지속됐다) 그러나 일단 노예해방 헌법수정이 일어나자, 링컨은 [흑인 남성에게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는 파격적인 리버럴 주장을 한다. 이 주장 때문에 암살됐다. 링컨 암살 후 몇 년 지나 흑인 남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다. 백인 여성에 비해 약 반 세기 먼저 흑인 남성이 투표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원산지 유럽•미국을 둘러 봐도, 이른바 '보수주의의 태두'들의 행적에는 우리가 아는 '보수'의 얼굴과, '리버럴'의 얼굴이 엮여 있다. 지속이 필요할 때엔 '보수'의 얼굴이며 혁신을 감행할 때엔 '리버럴'의 얼굴이다.

야비한 조선 땅의 천박한 정치꾼들은 툭하면 '따듯한 보수'를 찾는데, 이는 따듯한 게 아니라 얼어 죽기 십상인 개소리다. 따듯은 무슨 따듯? 정치에 대해선 따듯하냐 차냐를 따져선 안 된다. 현실일 뿐이다. ‘따듯한 보수’가 아니라 ‘변화와 지속의 조화•균형’을 찾아야 한다.

우남 이승만이 '보수'인가? 땡전 한 푼 보상하지 않고 왕실 재산을 몰수하고 왕실을 없앴고, 휴지가 된 토지공채를 주고 농지개혁을 했으며, 교육을 진흥시켰고, 온갖 제도를 만들었고,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왜색 대처승들을 전국 모든 절에서 내쫓아낸 장본인이다. 어마무시한 리버럴 개혁가다. 그가 만든 정당의 이름 자체가 '리버럴 당'(자유당)이다. 물론 이때의 리버럴은 우드로 윌슨을 끝으로 삼은, 고전적 리버럴이다. 요즘의 야리꾸리한 PC(정치도덕 완장질) 리버럴과는 사뭇 다르다. 오바마, 힐러리 류와는 완전히 다르다...

박정희가 '보수'인가? 천지사방에 도로를 뚫고 항구를 만들고 전기를 공급하고 공업화를 이루어내고 핵가족화를 가속시킨 사람이 '보수'인가? 아니다. 획기적인 산재보험, 의료보험을 도입한 사람이 '보수'인가? 아니다... 그는 '군복 출신의 리버럴'이다.

우남 이승만과 박정희는 당대엔 보수가 아니라 혁신가였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대한민국과 경제성장--이 소중히 지켜야 할 자산이 됐기에 이제 와서 '보수'라 부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겼을 뿐이다.

이렇듯 변화와 지속은 서로 엮여 있다. 이 엮임이 한 인물 안에 실현되면 위대한 정치인이다. 이 엮임이 한 정당 안에 깃들면 위대한 정당이다. 원산지 유럽•북미에서도 이같은 심오한 이치에 대해선 깜깜 무지이다. 그래서 그들은 '보수 vs. 리버럴'이라는 개족보 구분틀을 사용하곤 한다.

야비한 조선 땅에선 이 개족보를 수입해서 '보수 vs 진보'라고 변형시켰다. 말하자면 개족보를 더 지독한 개족보로 ‘진화’시킨 셈이다. 무식하면 사악하지 말든지, 사악하면 무식하지 말든지, 둘 중 하나는 돼야 하는데, ‘보수 vs 진보’ 구분틀은 무식하면서 동시에 사악하다.

'보수 vs. 진보' 구분틀을 사용하는 순간, '보수'는 기득권의 수호가 되며, '진보'는 붉으레한 가족해체•사회해체•국가해체가 된다. 시민으로 하여금, 보수를 택할 수도, 진보를 택할 수도 없도록, 꼼지락 달싹 못 하는 무기력 상태로 몰아넣는 마법 주문이 바로 '보수 vs. 진보' 구분틀이다. 이 구분틀은 세상을, 제도권 금수저와 운동권 붉은 수저가 적당히 타협하며 갉아먹는 먹잇감으로 타락시킨다. 그래서 '보수 vs. 진보' 개족보 구분틀은 사악하다.

그러니 "나, 보수여~~보수~~ 정통 보수여~~"라고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한 술 더 떠서 '따듯한 보수' 찾는 사람은 차라리 '따듯한 궁둥이'를 탐하는 부비부비 행각을 처벌이시든지!

 

2.

'우파 vs. 좌파'는 그나마 낫다. 역사성이 있다. 우파는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 내지 '과격파에 반대하는 세력'이란 뜻이다. 프랑스 혁명 때 과격학살 집단인 자코뱅이 의사당 왼쪽에 몰려가서 자리 잡자, 이에 따라가지 않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의사당 오른쪽에 앉게 됐다. 그래서 좌, 우가 생겨났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를 '우파'라 부르면 상대를 '좌파'라 인정해 주는 꼴이 되고 만다는 문제가 있다. 아니, 김일성 사교 전체주의 집단이 무슨 좌파씩이나 된다는 말인가? 그들에 의해 조종받는 종북이 무슨 좌파? 그냥 악질 부역집단일 뿐이다. 종북에 의해 추임새 받는 친북이 무슨 좌파? 그냥 기회주의 부역세력일 뿐이다. 친북에 의해 부추김당하고 있는 햇볕 동조가 무슨 좌파? 그냥 스톡홀름 신드롬(인질로 사로잡힌 사람이 인질범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되는 심리) 환자일 뿐이다. "북한도 사람이 사는 곳이며, 합리적 판단을 할 줄 아는 우리민족"이라고 믿고 햇볕에 무릎 꿇으면 내 인생이 편해지고 안전해진 것 같은 착각을 가질 수 있다. 이게 바로 야비한 조선땅의 수 천 만 명을 사로잡고 있는 햇볕 미신이다. 핵 인질범에게 호감을 느끼는 인질 심리...

마음 같아선 나 스스로를 '우파'라 부르고 싶지만, 상대가 '좌파'씩이나 될 깜냥이 아니기에, 우파란 용어를 삼가게 된다.

그렇다면 상대는 무엇인가? 꿀꿀이죽 개밥통이다. 누덕누덕 알록달록 기운 넝마일 뿐이다. 왜? 상대의 핵심 전략은 가족해체, 사회해체, 국가해체다. 해체(deconstruction)자체가 그들의 속내다. 해체해서 뜯어먹는 것.... 창조할 줄 모르는 것..이게 상대의 본질이다.

해체는 원래 1970년대 말에 생명이 다한 프랑스 좌파 포스트모더니즘의 교리였다. 그들은 이렇게 가르친다.

"진실은 상관 없어! 있다 해도 알길 없거든! 떼를 이루어 시스템을 흔들고 빠개고 불태워! 그게 인생의 의미야!"

한마디로 '해체'를 위한 연합전선, 이게 상대의 '철학'이다. 이 연합전선을 그들은 '땅속줄기(rhizome)'라 부른다. 연합인지 아닌지 조차 헷갈리는 연합전선... 그래서 '땅속'이다.

이 연합전선에 의해 만들어진 촛불 떼군중을 상대는 '멀티튜드'(multitude, 민중 혹은 다중)라 부른다. 한마다로, 요상한 말로 잔뜩 분칠해 놓은 마법 주문이 바로 '해체'라 불리는 교리다.

이 종교에선 진실이 상관없기 때문에, 무슨 이념이든 오케이다. "동성 커플을 민법상 부부로 인정해라"라는 동성결혼•법제화 운동부터, 김일성 주체사상, 마르크스-레닌주의까지 모두 한 통속으로 돌아간다. 꿀꿀이죽 개밥통이요, 누덕누덕 알록달록 넝마뭉치이다.

문제는 이 꿀꿀이죽 개밥통이 으슥한 홍대 뒷골목에서 굴러다니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사상, 문화, 교육, 정치권력을 지배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한국인은 꿀꿀이죽 개밥통을 섬기고 사는 존재다. 다른 말로 '개돼지'라 부른다.

 

3.

이러니 좀 생각있는 사람은 구역질을 심하게 일으킬 수 밖에 없다. 구역질이 바로 우리의 징표다. 우리는 구역질에서 출발한다.

진실이 경멸당하는 세태에 대한 구역질.... 가진 자들이 조금 더 가지려고 각박 야멸차게 인색 꼴값 떠는 것에 대한 구역질.... 조직노동자가 귀족화되어 스스로를 '착취당하는 민중'이라 코스프레하는 것에 대한 구역질...72년전에 망한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세뇌해서 정치자산으로 삼으려는 친일파 드립에 대한 구역질....죄 없는 여성대통령에게 ‘최태민 악령에 홀린 아바타’라는 무당•관심법에 따른 죄목을 뒤집어 씌워 탄핵하고 감옥에 처넣은 것에 대한 구역질…. 무엇보다도, 인류 최악 최후의 전체주의 대량학살 체제를 '우리민족'이라 감싸고 도는 행태에 대한 구역질....

우에에엑~~~

그러나 구역질은 그 자체로서 목표가 되지 못 한다. 이는 증상일 뿐이요 출발점일 뿐이다. 어디로? '보헤어(Woher)'--이게 정의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토사물 속에 파묻힌 채 세상을 저주하는 존재로 주저앉을 뿐이다.

구역질한다고? 그래서 구역질하지 않는 자들보다, 햇볕에 취한 자들보다, 친북보다, 종북보다, 간첩보다 '나은 존재'라고? 천만에! '나은 존재가 될 수있는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그런 존재가 되려면 [오롯이 우리 자신의 것인, 가치와 원칙]을 창조해야 한다. 이를 섬겨서 지켜내야 한다. 이 가치와 원칙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창조자가 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꿀꿀이죽 개밥통을 걷어찰 수 있게 된다. 그때 우리는 자유로워 진다.

우리 구역질 환자들은, '진실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염원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 각자가 '깊은 영혼의 우물을 가진 존엄한 개인'이라는 믿음을 간직해야 한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제도를 원칙으로 삼은 ‘공화국’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비전을 바라봐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꿀꿀이죽 개밥통을 넘어설 수 있다.

이같은 진실존중을 향한 염원, 개인 존엄성에 관한 믿음, 자유민주 공화국에 대한 비전을 가진 우리를 무엇이라 이름하면 좋을까? 답은 우남 이승만과 박정희에 있다. 우남의 '자유'와 박정희의 '공화'를 따와서 '자유공화'(liberal republicanism)라 부를 수 있다. 이때 자유는 ‘존엄한 개인’을 가리킨다. ‘공화’는 사회•국가 공동체를 가리킨다.

일찌기 고(故)박세일 교수가 이 비슷한 시도를 하다가 삼천포로 빠졌다. 그는 "자유로운 개인이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라는 뜻을 암시하는 ‘공동체-자유주의’라는 화두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그의 책을 곰곰이 읽어보면, 공동체-자유주의의 마지막 근거가 불경이다. 세상에! 정치사상의 뿌리가 종교인 것은 좋은데, 이 궁극의 뿌리는 감춰져 있어야 하는 법 아닌가! 정치사상은, 역사와 철학에 의해 근거가 제시돼야 하는 것 아닌가! 공동체-자유주의라는 섹시한 화두를 기껏 만들어 놓고 그 궁극의 근거를 불경에서 인용한다는 것은, 삼천포로 빠졌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경은 절의 스님이 이야기해야지, 스스로를 정치사상가라 칭할 사람이 들이대서는 안 된다.

박 교수의 실패를 거울 삼아 다시 짚어 보자.

첫째, 영혼을 인정하는 ‘개인주의 인간관’이다. 우리 각자는 사회적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깊은 영혼의 우물을 가진, 초사회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자유로운 독립적 개인'이다.

둘째, ‘진실존중’의 지평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주의 공화국’이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들이 공동체를 꾸려낼 수 있을까? '나'들을 잔뜩 모아놓는다고 저절로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들이 진실을 존중할 때에만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아니면 아예, 전통 사회처럼 '나다움'(개체성, individuality)을 억압하든지! 혹은 전체주의 사회처럼 '나다움'을 박멸하든지!

다시 말한다. '나'들의 집합이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나'들이 '진실존중'을 공통된 원칙으로 삼는 것뿐이다. 이게 니체(Nietzsche) 철학의 핵심 메시지다. 나의 진실과 너의 진실, 나의 관점과 너의 관점이 충돌할 때, 이를 묶어줄 유일한 통로는 '진실 모색'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진실존중을 다른 말로 '머리의 정직성'(intellectual integrity)이라 부른다. 양심에 털이 났는지, 심장이 거무죽죽한지, 양심을 까보고 심장을 갈라보기 전에는 알 길 없다. 그러나 머리가 정직한지 아닌지는 언행으로 판단할 수 있다. '머리의 정직성'은 20세기에 들어서야 널리 쓰이게 된 용어다. 인류가 발견한 최신 도덕률이 바로 '머리의 정직성'이다. 진실존중이다.

거짓의 힘에 밀려, 박근혜대통령을 감방에 들어앉은 제물로 바쳤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 정도 화끈한 도덕에 대한 깨우침은 이뤄 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제 우리 구역질 환자들이 자유공화 시민체(citizenry)로 거듭나야 한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꿀꿀이죽 개밥통을 홍대 뒤편 으슥한 골목에 처박을 때가 됐다. 가족해체•사회해체•국가해체를 겨냥한 갖가지 풍조를 긁어 모은 누덕누덕 알록달록 넝마를 불태워버려야 할 때가 왔다.

이미, 진실존중의 지평에서 자유공화 시민체(citizenry)가 탄생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태극기를 폼으로 흔들었던 게 아니다. 그 열정, 구역질, 분노가 자유공화 시민 정신으로 발효되어 가는 향긋한 냄새가 풍겨나지 않는가!

박성현 객원 칼럼니스트(전 뉴데일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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