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에서 가장 문제적 인물은 내게 좌옹(佐翁) 윤치호다. 친일파의 대부란 헛소리이며, 민족주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멋쟁이가 그다. 그리고 한국 보수주의 철학의 원류(源流)다. 지금 살아온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할까? 광복절을 앞두고 가상대화를 해봤다. 그의 성찰이 지금 우리의 걸로 받아들여지길 기대하며 근현대사와 요즘 쟁점을 점검해봤다.
 

조우석 객원칼럼니스트(KBS 이사)
조우석 객원칼럼니스트(KBS 이사)

 근현대사 100년에 등장한 인물 중 가장 매력적인 한 명은 내겐 단연 좌옹(佐翁) 윤치호(1865~1945)다. 유감스럽게도 대중에게 외면당하거나 오해받아온 인물인데, 그래저래 ‘문제적 인물’이다. 정치인 윤보선의 5촌 당숙이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정신세계를 가졌고 독립신문 발행인이자, 만민공동회를 이끈 지도자의 한 분이다. 애국가의 작사자로 추정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조선조 말에서 일제까지 60년을 담은 영어 일기가 단연 일급 사료(史料)인데, 예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우리말로 번역했다. 그런 그를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규정한 사학자 임한용에 나는 격하게 동의한다. 그럼에도 윤치호를 ‘친일파의 대부’라며 욕하는 이가 수두룩하다.

이런 편차가 무얼 말해줄까? 결국 우리가 문제다. 한국인 대부분은 ‘민족주의 집단사고’에 꽁꽁 묶여있는데, 윤치호는 거기에서 완전 자유로웠다. 좌파야말로 민족주의에 결정적으로 오염됐지만, 한국인 대부분이 그 지경이니 윤치호의 정신세계를 만나기 힘든 것이다. “조선인은 10% 이성과 90%의 감성으로 산다”고 그는 일갈했는데, 요즘 그 말이 더 절절하게 들린다.

못난 조선인이 바른 소리 못하는 언론-지식인 때문에 다시 망가지고 폭민(暴民)으로 변질돼 급기야 나라의 문을 닫을 최대의 위기가 바로 지금이 아니던가? 윤치호는 이런 말도 했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 일제를 향해 징징댄다고 독립되는 게 아니니 국가경영을 위한 실력 양성부터 하란 충고였다.

그가 살아 돌아온다면 무슨 말을 할까? 8.15광복절과 건국 70년을 맞아 ‘윤치호와의 가상 대화’를 나눴다. 참고로 윤치호는 공산주의를 혐오했다. 때문에 한국보수주의 사상의 아버지이며, 한국의 에드먼드 버크다.
 

윤치호와 윤치호 친필 추정 애국가 (연합뉴스 자료사진)

-좌옹, 뵙게 돼 영광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당신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한국인은 언제까지나 역사의 퇴행을 반복할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창조적 지성도 결코 등장치 않을 것이란 말도 해왔습니다.

“나는 이승만 박사보다 10년, 김구보다는 11살 위입니다. 외교를 통한 독립이나 폭력을 통한 독립에 모두 비판적이었는데, 그건 이유가 있습니다. 대중의 사회적-지적 역량 성숙 없이 내가 꿈꿔온 공화주의는 이룩되지 않는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국가경영의 핵심은 공동체 이익을 앞세우는 퍼블릭 마인드(公德性) 아닙니까? 아시아 역사에선 유독 그게 발전 못했어요. 공자가 인간윤리를 집안 울타리에 가두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고 나는 봅니다.”

-역시 좌옹다운 말씀입니다. 며칠 뒤 광복절인데, 대한민국 건국은 나 몰라라 한 채 내년 상해임정 100주년을 기린다고 문재인 정부가 난리입니다.

“기억하시오? 상해임정의 단합을 위해 도와달라는 요청을 나는 살아생전에 자주 받았으나 그때마다 거절했습니다. 독립운동을 신성시하고, 신화로 떠받드는 대한민국 풍토에서는 일제시대 나의 그런 언행이 어찌 들릴지 모르겠군요. 일기에 나는 이른바 독립운동가들을 가리켜 ‘허세와 자만에 찬 자칭 애국지사’라고 비판했고, 임정을 ‘통치할 것 없는 정부의 쇼’라고 냉소했는데, 그 이유를 유념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런 나를 민족감정을 앞세워 비판하긴 쉽겠지요. 단 뭘 알고 한 단계 넘어서야하지 않겠어요?”

-과도한 민족주의 정서에 붙들린 우리에게 약이 되려는 소리가 아닐까요? 단 신생 독립국에서 독립운동 강조하는 건 일단 자연스러운 거죠.

“시민교육을 위해 강조하는 것과, 대놓고 역사 왜곡하는 건 다른 문제요. 유감이지만 대한민국은 무장투쟁해 독립된 나라가 아닌데, 그게 크게 부끄러운 일도 아닙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한 나라는 2차 대전 이후 단 하나도 없지 않던가요? 제국이란 자체 모순으로 무너지는 법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독립 이후’요. 문제는 왜 대한민국의 비겁한 지식인들은 역사의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겁니까? 그러니까 대중이 개돼지가 되고, 폭민(暴民)으로 막 가는 겁니다. 내 말을 다시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선인은 10% 이성과 90%의 감성으로 살지요.”

-대중은 당신의 말을 이해 못할 겁니다. 부르르 떨 듯도 합니다.

“압니다. 유감스럽게도 그게 대한민국의 현주소입니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한 건 <윤치호의 협력일기>(2010년 이숲 펴냄)를 쓴 서울대 박지향 교수입니다. 민족주의에 함몰된 역사학자들은 개인이 민족에 함몰되는 걸 당연시하겠지만, 난 반대올시다. 포악한 정부라도 동족의 정부면 좋다? 그거 잘못입니다. 고종의 실패한 정치보다는 영국의 지배가 외려 조선 인민에게 낫다고 나는 보았던 겁니다. 이해하시겠소?”

-민족의 명분으로 개인 희생을 강요하는 건 역사 폭력이란 뜻입니까? 역시 좌옹다운 말씀인데, 역시 선생은 여전히 문제적 인물이 맞습니다.

“내 말은 쉬운 얘기입니다. 한일합방 10여년 뒤 쯤인가 내 일기에 그렇게 썼더랬죠. 만일 조선왕조가 멸망하지 않고 지금껏 지속됐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궁궐엔 나쁜 놈들로 여전히 득시글거렸을 겁니다. 관리는 백성을 착취하는 와중에 주변 열강은 조선을 뜯어먹는 걸 멈추지 않고 있었을 것도 자명합니다. 초가집, 더러운 시궁창, 무지함, 가난과 허약함이 조선 민중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구요. 아시겠어요?”

-따끔한 지적입니다. 실은 춘원 이광수도 그랬습니다. “나도 조선왕조가 하도 지긋지긋해서 반국가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고….

“맞아요. 그걸 민족주의 잣대로 보지 말고 냉정하게 봐야 합니다. 당시 우월한 문명을 가졌던 일본을 절대적 악당으로 보고, 우리 조선은 한없이 선량한 희생자라는 고정관념은 민족주의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후손이나 갖는 모자란 생각이요. 그거야말로 비역사적이고, 우물 안 개구리 시선입니다.”

-그래서 일제시대 당신은 우리가 따라야 할 교사는 일본이라고 말하셨던 겁니까?

“그 발언이 뭐 어때서? 근대 전후 추락했던 조선인의 기상을 회복시켜준 건 기독교였고, 실패한 우리역사의 빈틈을 파고든 건 일본이었습니다. 옛날 얘기가 그렇고, 지금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새나라 만들기에 성공해 과거사에서 정말 자유로워졌어요. 안타까운 건 왜 이런 대한민국에 졸렬한 친일 시비가 끊이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나는 해방되던 해 말에 죽었기 때문에 당시 분위기를 좀 압니다. 그래도 친일문제에 관용적이었던 게 당시였어요. 1990년대 이후 친일은 최악의 욕설이자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로 둔갑해왔습니다. 그건 망조든 사회의 증거입니다. 이런 내 얘기가 불편합니까?”

-적지 않은 이들이 모욕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역시 윤치호는 친일파라고 흥분하는 이도 있을 거구요.

“영원히 덧나는 상처인 친일파 시비로 재미 보려는 그룹이 역사 이래로 남로당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를 포함해 누구인지 헤아려보시길 바랍니다. 나는 살아생전 잉글랜드가 아일랜드를 영국화하지 못했듯이 일본의 획일화 정책, 동화정책에 거부감을 느꼈고, 가능하지도 않다고 봤습니다. 실제로 이른바 친일파 그룹과는 거리를 두는 처신을 했다는 걸 아는 이는 압니다. 요즘 좌옹 자신이 친일파의 대부로 치부되는 걸 안다면, 무덤에서도 놀랄 것이라고 누군가 어떤 연구서에서 지적을 했었는데 그게 맞는 말이지요. 기회나면 그 얘길 나와 더 나눕시다.”

-좌옹, 저는 오래 전부터 당신을 옹호하는 글을 자주 써왔습니다. 핵심은 좌옹의 번민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성숙한 사회 시민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오늘을 어떻게 보십니까?

“내 눈엔 극히 경이롭소이다. 진정 예전의 못난 나라 조선이 맞는가 눈을 부비고 다시 봅니다. 나는 1990년 말의 일기에서 100년 뒤 조선의 모습을 상상해봤는데, 철도와 증기선과 우편시설과 전보가 들어선 혁명적 변화를 떠올려 봤습니다. 그런데 그걸 몇 곱절이나 뛰어넘는 천지개벽의 현장이 지금입니다. 위대한 역사의 변화 앞에 나, 좌옹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의 실패로 드러난 북한에 비해 대한민국은 가히 원더랜드입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걸 긍정하신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조선인의 국가운용 능력에 여전히 부정적입니다. 본래 나는 조선의 독립이란 6세 어린이가 비행기를 몰겠다는 꼴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런 생각이요. 역시 시민의 덕목, 즉 공민을 가르치는 교육의 부재가 문제 아닐까요? 그걸 하지 않으니 요금 세상이 정상이 아니죠. 광우병 촛불, 대통령 탄핵 촛불…. 그런 것에 기대고 아부해온 정치인과 지식인 모두 각성하세요. 한마디 더 합시다. 조선인의 그런 나쁜 풍토와 성정 속에 피어난 악의 꽃이 이른바 좌익-좌파이고, 엉터리 민족주의자들이요. 그래서 저들이 유독 교조적이고 퇴행적입니다.”

-좌옹, 당신은 조선왕조를 비판하면서 특히 과도한 평화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했던 사람입니다.

“맞아요. 조선시대 그놈의 문치(文治) 때문입니다. 과도한 평화주의는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호전적 정신, 실용적 마인드를 뿌리째 뽑아냈습니다. 그게 영웅적 기질을 실종시켰다고 생전의 나는 지적했더랬습니다. 전쟁터에서 칼을 쓰는 대신 내부 총질하는 붓과 혓바닥의 음모를 키워온 겁니다. 정말 몹쓸 병입니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는 것 그런 뜻입니까?

“그렇죠. 힘과 투쟁이 우주의 원리라고 나는 봤습니다. 특히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사이엔 힘이 정의입니다. 징징대는 울음소리로 이 세상의 고통이 제거될까요? 실로 어리석다는 걸 나는 반복해서 지적했습니다.”

-그럼 문재인 정부의 평화 타령도 당신의 눈엔 정상으로 안 보입니까?

“그걸 내게 물어보는 건 오버입니다. 그에 대한 해석은 당신들의 몫이고, 다만 평화주의에 비판적인 내 입장을 토대로 유추하시길 바랍니다. ”

-저는 전부터 ‘공산주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덮치고 있다는 경고를 반복해서 전해왔는데, 그에 대한 견해도 듣고 싶습니다.

“좋아요. 그건 내가 자신있게 할 수 있는 발언이요. 나는 소비에트체제가 들어서는 걸 유심히 살펴봤고, 그것의 실패할 것이라고 예견했던 사람 아닙니까? 근데 조선은 옛적부터 공산주의를 해왔죠. 근대적 개인으로 홀로 서기를 하지 않고, 먹고 살만한 친인척에게 얹혀 살아왔던 고약한 전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볼셰비키는 그걸 노동자 농민 등 무산자의 영광이자 당연한 권리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그것 역시 망조든 사회의 징후 아닙니까?”

-그럼 지금 대한민국이 다시 조선왕조로 돌아가고 있다는 뜻입니까?

“그걸 굳이 말해야 아시겠소? 사농공상, 관존민비로 상징되는 게 대한민국의 ‘오래된 미래’ 조선인데, 그걸로 컴백하고 있다고 나는 봐요. 일본의 현대 정치학자 다나카 메이가 ‘박정희 정부 18년, 전두환-노태우 12년의 총합이 30년인데, 이 30년은 한국사의 진행과정에서 극히 예외적 시기였다’고 말했다죠? 그가 잘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근대사의 ‘문제적 인물’ 좌옹과의 가상 대화는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다. 가상의 대화이지만 임의로 지어낸 얘기는 없다. 그의 일기나 연구서 등에 나와 있는, 출전(出典)이 분명한 것 위주로 재구성했다. 무엇보다 탈 민족주의자 윤치호 사상의 핵심을 위주로 하고 그에 비춰 우리 시대 쟁점을 짚어봤다. 반복하지만 그의 번민을 우리 것으로 다가올 때 한국사회가 한 단계 성숙할 수 있다. 국가해체의 위기 국면에서 그를 생각해보는 건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다.

조우석 객원 칼럼니스트(KBS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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