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샘의 교실이야기 21]또 비틀린 입시안...경쟁과 상대평가가 그렇게 두려운가
[유니샘의 교실이야기 21]또 비틀린 입시안...경쟁과 상대평가가 그렇게 두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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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 선발’과 ‘상대평가’는 외면
‘시민참여단’의 ‘공론화 위원회’가 내놓은 오리무중 결론
상대평가로 치열한 경쟁 속 페어플레이 배우는 것이 진짜 인성교육
오락가락 입시제도, 주인공은 사교육?
조윤희 부산 금성고 교사

대학 입시에 대한 뜨거운 논의가 오가더니 결국은 결론도 내지 못한 채 판단유예로 끝나고 말았다. 교육 전문가들도 아닌 시민평가단에 복잡한 선택지를 맡겨 놓더니 예정된 수순으로 가는 모양새다. 네 가지 안이나 만들어 다양한 선택권을 보장하는 듯한 레토릭을 펼치더니 결국은 ‘아몰랑’ 하며 뻗어 버린 것이다. 속내를 모르지 않는다. ‘답정너’겠지!

‘답은 정했으니 너는 대답만 하라’는 것일테다. 그럴 바에 국민들의 눈과 귀는 무엇하러 모았는지 모르겠다. 언론 마다 나오는 입시제도 이야기들을 거듭 읽어봐도 시민들이 모였다는 ‘참여단’의 중지는 ‘정시’와 ‘상대평가’로 모이는 것 같다. 물론 똑 부러지는 선택지를 만들지 않았으니 답이 모호하고 애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결국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회의 까지 가봐도 어떤 안으로 수렴될지 단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 ‘인성교육’을 빙자하는 ‘절대평가’몰이

절대평가 VS 상대평가. 그 중 어떤 것이 더 교육적 효과가 있느냐 하는 것은 해묵은 논쟁이다. 그 중 어느 하나가 답일 수 없고, 모집단의 크기나 목표에 따라 달리 해야 하는 것이지 ‘인성’교육을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이나 조장하는 상대평가를 버리고 절대평가로 돌아서야 한다는 따위의 교묘한 말장난이나 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그림 =  상대평가의 단점만 부각시킨
교과목별 학생평가 연수과정 중 일부 내용

그러나 이번 입시안을 결정하는데도 평가방법을 ‘절대평가 VS 상대평가’의 대결구도로 몰고 가면서 상대평가의 단점만을 부각 시키고 있다. 지나친 경쟁을 조장하는 상대평가가 아이들의 인성을 황폐화시키므로 상대평가보다는 절대평가가 교육적으로 득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속내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수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상대평가는 서열 비교로 과도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며, 배타적 경쟁으로 협동학습을 저해한단다. 절대평가의 단점은 적혀있지 않다.

하지만 절대적 기준이 교사의 주관에 의해서 좌우될 우려도 있고, 다른 집단의 성적과 비교가 어려워 자신의 실력과 위치를 가늠할 수 없으며, 변별력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각종 국가자격증 시험, 운전면허 시험 등 자격 수준 미달 여부를 가려내는 시험에서는 절대평가가 가능하지만 서열을 통해 질적 수준을 가늠해야 하는 관문에서는 상대평가를 이용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치열한 경쟁은 필수이며, 경쟁을 통해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야 말로 선발의 목적인 것이다. 입시 또한 학생을 선발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상대평가 폐지론자들은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는 말만 나오면 인성이 파괴된다고 말한다. 소위 ‘과도한’ 경쟁이 협력을 말살하고 인간성을 황폐화시킨다는 것이다.

대체 인성교육이 무엇인가. 실체조차 모호한 인성교육이야기만 나오면 경쟁이 인성파괴의 주범이라 한다. 인성의 개념은 포괄적이고 추상적일 뿐만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 의미도 변하며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인성교육은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덕적 품성, 인간적 자질, 시민적 자질을 가르치고 연습시키는 것’이라고도 하고(문용린 외, 1995), 혹은 ‘도덕성, 사회성, 정서를 포함한 바람직한 인간으로서 성품을 기르는 교육(교육부, 1996)’이라고도 한다.

그림 창의인성교육을 위해
경쟁중심 교육을 협력 중심교육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연수내용

혹자의 주장대로 상대평가로 치열한 경쟁이 인성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왜들 스포츠 대회에서 승부를 내기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며, 오디션 프로그램마다 등위를 매기는 일 따위를 하는지 모르겠다. 스포츠 경쟁마당에선 앞 다투어 인성을 파괴시키려고 작정을 하고 있다는 것인가. 교육과학기술부(2009)가 주창하는 인성교육은 21세기 글로벌 인재양성에 필요한 창의성과 인성을 유기적으로 연결 또는 통합시키기 위해, 주로 인간관계와 덕목과 도덕적 판단에 필요한 능력을 교육해야 한다고 말한다. 평가방법이 이러한 인성교육과 무슨 직접적 연관이 있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치열한 경쟁마당에서 공정한 룰을 배우고 그 안에서 협력과 갈등 조정 등, 다양한 인간으로서의 덕목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거늘 절대평가로 일정 수준만 넘으면 ‘패스’로 인정받는 방식이어야만 인성이 제대로 길러진다는 것은 대체 무슨 엉터리 같은 논리 인지 알 수 없다. 자연스레 도태되는 사람도 불가피 하겠지만 그러나 치열한 ‘경쟁’의 과정 속에서 각자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문제해결능력, 진화와 발전, 공정함 등을 배울 수 있을 텐데 그러한 능력이 절대평가에서만 길러진다는 주장을 거듭하고 있고 입시제도에서 조차 그것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 ‘사교육’ 잡자는 입시, 대학에 넘기자

한동안 수학능력 시험이 대학 입시의 주류였던 시기가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수능에 의존하여 정시로 대학을 갔고 수시로 진학하는 비율은 극히 미미했다. 그러자 수능으로 대학을 ‘잘 가는’ 원인이 부모 잘 만나 사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경우에 한정된다는 분석들이 쏟아졌고, 수능만으로 대학을 ‘잘 가는’ 것에 분노가 집중되기 시작했다. 강남에 ‘족집게 과외’가 주목을 받았고, 그 사교육을 때려잡기 위해 공교육의 정상화 방안을 고민한 끝에 수시, 입학사정관제도가 탄생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성장 잠재력과 가능성에 무게를 두겠다는 입학사정관제도의 평가 기준에 대한 공정성과 정성평가에 대한 의문제기가 부담스러워진 대학들은 결국 잠재력도 정량으로 평가하기 시작했고, 암암리에 출신 고교를 등급으로 분류한다는 말까지 돌았다. 사교육을 부추긴다는 정시의 문제점으로 등장한 수시 역시 집안 형편이 좋은 아이들이 사교육의 힘을 빌어 수시 스펙을 만들고, 학생부 종합전형으로 좋은 대학을 간다는 이야기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이래저래 불만의 초점은 사교육이었고 늘 교육당국은 사교육 잡기위해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부유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지금 도마에 오른 수시는 2008년경부터 확대 시행된 입학사정관제도를 필두로 점차 강화되었다. 금번 입시정책의 ‘정시 VS 수시’의 구도는 학생부 종합전형(수시)에 대한 공정성, 학생부에 대한 대학 측의 신뢰 여부, 수시 대비를 위한 사교육의 영향력 증대 등에 대해 터진 불만을 진화해 보고자 던진 카드인 셈이다. 그러니 사교육을 잡자고 키운 ‘수시’였는데, 지금 또 다시 그 사교육을 잡자고 ‘정시’를 확대하자는 셈이다. ‘진짜 교육’을 위한 교육제도가 아닌 그때그때 불이나 끄자는 ‘단약방’으로 일관한 교육 제도가 지금 또 한 번 전복을 목전에 두고 있다. 백년지대계가 아닌 사교육의 꼬리만 따라다니는 입시제도 탓에 입시당사자인 학생과 학부모는 물론 일선학교 교사들도 피로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떤 해에는 고교 1,2,3학년이 전부 다른 교육과정의 적용을 받고, 전 학년이 다 다른 입시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입시제도의 현실이건만 그런 제도 마련을 전문가도 아닌 시민참여단에 맡기기까지 하다니! 이제 입시제도는 다시 한바탕 곤혹을 치룰 예정인 듯하다.

그렇다면 왜 입시가 부유할까. 사교육은 ‘대체제’가 아니건만 사교육이 주도권을 쥐는 모양새가 불편한 교육당국은 늘 사교육을 잡아야 공교육이 살아난다는 강박 탓 때문인 것 같다. 교육당국이 그리고 공교육이 입시의 전말을 모두 주도해야 한다는 강박이 이런 우스꽝스런 결과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학생, 학부모가 학교를 선택할 수 있다면, 대학이 학생을 선발할 수 있는 권한과 자율적인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면 사교육은 충분히 ‘보완재’로 작동할 수 있고, 입시는 훨씬 유연하게 모두를 편하게 할 수 있을 텐데 경직된 교육관과 국가 주도의 공교육 역할에 대한 집착이 늘 일관성 없는 입시정책을 쏟아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싶다.

핀란드 교육을 배우자고 한동안 떠들썩하더니 요즘은 잠잠하다. 평등한 교육이고 공짜 교육이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신천지를 안겨줄 교육제도로 비쳤던 핀란드 교육. 그러나 핀란드의 교육도 고등학교부터는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고, 대학은 더욱 그러하다는 진실을 보고 있는지 의문이다. 덧붙여 또 강조할 것은 우리의 교육당국이 그렇게나 배우고 싶어 하는 핀란드교육이 일관된 교육정책을 시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교육청의 사무총장이었던 에르끼 아호(Erkki Aho)는 1972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20년간 교육개혁의 책임을 지고 오늘의 핀란드 교육 토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비전문가인 시민의 손에 맡겨 1년이 멀다하고 바꿔 제치는 우리의 교육정책이 정작 배울 것은 자율적 경쟁과 아울러 안정감 있게 오늘날의 핀란드교육을 가져온 일관된 교육정책이 아닐까 싶다.

조윤희(부산 금성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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