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미국의 대학생들은 4년간 대학을 다니고 나면 골수 리버럴(liberal)이 되어 사회로 나온다. 이때 리버럴은 버크에서 출발하여 하이에크에 이르는 보수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완전히 사회주의의 다른 이름이고, 우리 식으로 말하면 좌파다. 그들은 민주당 노선을 앵무새처럼 따라 말하고, 마르크시즘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며, 미국을 인종차별주의 나라 혹은 전쟁광의 나라로 증오한다. 환경 문제, 섹스 문제,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아랍-이스라엘 분쟁에 이르기까지, 대학들은 끊임없이 극렬한 반미주의 리버럴 예비군을 양산해 내고 있다. 젊은 보수 벤 샤피로(Ben Shapiro, 1984년 생)의 책 『세뇌』(Brain Washed)는 그런 점에서 매우 충격적이다. “대학들은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어떤 사상을 주입하고 있는가”(How Universities Indoctrinate America's Youth)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직접 겪은 생생한 대학 현장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교수들의 민주당 사랑

미국 대학의 민주당 지지 교수의 비율은 쿠바 정부의 공산주의자 비율과 비슷하다는 농담이 있다. 미국 대학교수들의 정치성향 분석 자료에 의하면, 200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아이비리그 인문-자연대 교수의 84%가 민주당의 앨 고어에 투표했다. 공화당의 조지 W. 부시에 투표한 사람은 9%뿐이었다. 스탠포드대에서는 역사학과 교수 24명 중 22명이 민주당을 지지했고, 단 2명만이 공화당을 지지했다. 코넬대, 다트머스대도 비슷했다. 콜로라도대에서는 인문 사회과학 교수 190명 중 184명이 민주당을 지지했다. UCLA에서는 영문과 교수 31명 중 29명, 역사학과 교수 56명 중 53명, 여성학과 교수 33명 중 31명이 민주당 등 좌파 정당을 지지했다.

부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교수들은 즉각 그를 바보 같고 무식하다고 조롱하며, 그의 대통령 당선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부시 자신만이 아니라 부시를 찍은 보수 유권자들에게까지 ‘윤리가 없고, 정신적으로 추악한 사람들’이라는 악담을 퍼부었다. 이런 교수들로부터 교육 받은 학생들이 어떤 정치성향을 띨 것인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다.

2000년 대선 때 엘 고어는 UCLA 학생들로부터 71%의 지지를 받았고, 부시는 겨우 20%를 받았다. 그런데 다음 해인 2001년 가을, 4년제 대학 신입생의 정치 성향을 조사했더니, 좌파 지지가 29.9%, 우파 지지는 20.7%였다. 입학할 때 신입생의 좌 우파 비율의 차이는 10% 정도인데, 대학에 진입하고 나면 그 비율의 차이가 50%로 치솟는다는 것을 역으로 보여주는 숫자다.

버클리대의 한 연구 논문은 보수란 “불평등을 지지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완고한 도그마티즘”이라고 정의했다. 보수주의자들의 심리는 늘 불확실성을 참지 못하고 불안에 떨며, 그 공포감 때문에 공격성을 보인다고도 했다. 한 마디로 보수는 우둔하며, 정신적 장애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레이건을 히틀러, 무솔리니와 한데 묶고, 스탈린, 후루시초프, 카스트로를 ‘보수’의 카테고리 속에 넣었다. 결국 공화당은 극우이고, 민주당은 다양하며 관대하다는 것이다. “공화당은 역사적으로 인권 정당인 적이 없었다”고 까지 말한다. 그렇다면 링컨과 노예 해방은 모두 페이크 뉴스인가, 라고 젊은 우파 벤 샤피로는 반문한다.

대공황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정치학 교과서는 “1929년부터 1933년까지 공화당 집권 기간 동안 미국이 역사상 최악의 불황을 겪었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실제로 대공황은 그 후 8년간 루즈벨트 대통령이 집권한 민주당 두 임기 동안 더 지속되고 악화되었다는 것이 최근 역사학계의 새로운 쟁점이다. 역사학자 짐 파월은 루스벨트의 경제 정책이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켜 불황을 더 깊고 더 길게 연장시켰다고 했다. (FDR's Folly, 2003)

보수는 동성애 커밍아웃보다 훨씬 더 위험

미국대학에서 자신을 보수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커밍아웃의 수준이다. 보수성향의 교수들은 동료들로부터, 또는 대학 경영진으로부터 공격 받을까봐 자신이 보수라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 오늘날 동성애는 떳떳한 지위를 획득했는데, 희한하게도 보수 성향은 애써 감춰야 하는 치욕스러운 성향이 되었다. 공개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했던 한 사회학과 교수는 학과 동료들로부터 “마치 어린이 성추행범이라도 된 듯한” 따가운 시선을 받아, 더 이상 학교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빌라노바 대학의 로버트 마란토 교수는 “대학교수들이 다양성(diversity)을 그토록 소리 높여 외치지만 정작 이데올로기 다양성에 대해서는 완강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대학 사회에서 찬양되는 다양성은 오로지 피부 색깔과 출신국에만 한정되어 있다. 교수들은 인종과 민족의 다양성(ethnic diversity)은 열렬하게 옹호하지만, 사상 문제에 이르면 오로지 좌파 사상만을 지지한다. 그들에게 사상의 다양성이란 거의 형용모순의 수준이다.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옳고 그름의 문제는 개인적 가치와 문화적 다양성의 문제다”라고 즐겨 말한다. “중립적, 객관적 진리란 없으며, 따라서 선이나 악도 없다”라는 것이다. 스텐포드대 인구생물학과 폴 에얼리히 교수는 2차 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한 것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뉴욕의 한 대학에서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는 학생이 10%~20%나 되었다.

흔히 포스트모던 철학의 도덕 상대주의가 좌파 사상의 원흉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마르크시즘, 민주당, 무슬림, 가난한 사람들을 절대 선으로 상정하고, 정치적 보수와 대기업을 절대 악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생각하고, 모든 것을 비판해야 한다면 마르크시즘과 민주당, 무슬림... 등등도 비판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교수들은 마르크시즘을 극찬하고, 자본주의를 공격하며, 테러리즘을 정당화한다. 이것은 더 이상 철학적 상대주의라고 할 수도 없다.

부자는 악, 가난한 사람은 선

보수를 공격하는 교수들의 핵심 단어는 ‘부자 감세’다. 물론 감세는 부자에게 돈을 더 많이 돌려준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부자가 대부분의 세금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돈을 돌려받은 상류층은 그 돈을 매트리스 밑에 넣어 깔고 드러눕는 게 아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거나, 주식에 투자하여, 일자리를 만들고, 하층민의 수입을 만들어낸다. 레이건 대통령이 감세 정책을 쓴 1982년부터 1989년까지 실업 비율은 4.3%로 떨어졌고, 중간 계층의 수입과 평균 가계의 수입은 확연하게 올랐다. 감세가 부자들만을 위한 나쁜 정책이라는 주장은 거짓임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샤피로의 말마따나, 좌파가 언제 진실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는가?

교수들은 감세가 오로지 부자들에게만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부자들은 돈을 가질 자격이 없고, 가난한 사람만이 돈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정부는 세금을 통해 부자로부터 돈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만약 정부가 부자로부터 충분한 돈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못할 경우, 그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냉혹하고 사악한 정부가 된다.

UC 산타 크루즈의 데이비스 카운 교수는 부시의 감세 정책이 “현재 미국에 만연된 불공정을 더 심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공정’을 말하자면, 일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조세 구조부터가 벌써 불공정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정상에 오른 사람들에 대한 징벌적 구조가 아닌가?라고 젊은 샤피로는 묻는다. 더군다나, 만약 인구 중 가장 부유한 계층에게 돈이 하나도 없다면 누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줄 것인가? 좌파 교수들은 그것을 정부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논의는 공산주의로 이어진다.

시장경제에 대한 저항

교수들은 시장에 대해서도 매우 적대적이다. 시장은 약자를 무시하고, 대기업의 이해에만 봉사하며, 서민들을 착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가 개입하여 사회적 정책을 펴야 한다고 믿는다. “시장에 민감하다는 것만으로 사회 정의가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칼 스테이트의 스콧 바우만 교수는 말했다.

2001년 겨울 학기 UCLA 지리학 강의 자료에는 “시장이 주도하는 생산과 분배 시스템은 사람들을 충분히 먹여 살리지 못했고,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기아로 몰고 가는 가난을 해결하지 못했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시장이 주도하지 않았던 경제체제 즉 소련과 중국에서 각기 2천만 명과 3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것을 이 자료는 외면하고 있다. 그리고 시장이 주도하는 미국에서 아사자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도 외면하고 있다.

이런 교수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는 법은 최저임금법이다. 극빈층을 짓밟지 않고, 그들에게 생계 임금을 보장해 주기 위해 최저임금법이 필요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보스턴 대학의 케빈 랭 교수는 최저 임금이 오르더라도 ‘거의 또는 전혀’ 일자리 감소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최저 임금법을 시행하면 기업들이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고용을 줄이고, 그 결과 실업이 유발되어 실제로는 극빈층이 가장 손해를 많이 보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지금 우리 한국인들이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암허스트 소재 매서추세츠 대학의 로버트 폴린 교수는 정부나 기업에 대한 최저임금의 영향은 매우 사소하다면서, “만일 그 반대의 현상이 있었다면 왜 생계 임금 운동이 그렇게 꾸준히 이어져 오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생계 임금 운동이 끈질기게 존속하는 것은 그것의 장점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는 포퓰리즘 정책의 매력 때문이라는 것을 역시 우리 한국인들은 지금 여기 현실 속에서 체험하고 있다.

자본주의 증오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벤 샤피로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벤 샤피로

좌파 교수들은 자본주의를 격렬하게 증오한다. 사회주의 극작가인 토니 쿠슈너는 코넬대 교지에 “우리 모두 알다시피 자본주의는 썩어 빠졌다”라고 썼다.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의 악을 논하면서 그는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제시했다. 사회주의는 경쟁 대신 서로 돕는 협력의 이념이라는 것이다. UCLA 리처드 스클라 교수는 사회주의를 ‘위대한 사상’으로, 마오쩌퉁을 ‘위대한 지도자’로 묘사했다. UCLA 지리학 교수 조슈아 멀다빈은 자본주의가 불평등과 가난의 원인이라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면서 서구 국가들이 지구 인민들과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고 했다. 어느 학생이 “교수님은 공산주의자이신가요?”라고 묻자 그는 “만일 공산주의자라는 게 모든 인민을 걱정하고 마음 써주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불평등을 줄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틀림없이 공산주의자일세”라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강의실 전체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대학교수들의 자본주의 증오는 거의 복수심을 연상시킨다. 텍사스 대학 종신 교수인 데이빗 스미스는 자본주의를 “착취, 억압, 지배, 인종차별주의, 전쟁에 기반을 둔 체제”라고 잘라 말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MIT의 로버트 솔로우 교수는 “자본주의는 광대한 소득 불평등과 좀 더 광대한 부의 불평등을 발생시킨다”고 말했다. 역시 노벨상 수상자인 같은 대학 케네스 애로우 교수도 이에 동조하면서, “자본주의는 인위적으로 규제하거나 균형을 잡아주지 않으면 잘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들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아무것도 한 게 없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격차만 벌려 놓았으며, 돈을 위해 인간을 착취하는 제도라는 것이다.

펜실베니아 대학의 토마스 슈그루 교수는 자본주의가 특히 흑인의 저개발과 불평등의 원인이라고 했다. 자본주의는 일반적으로 불평등을 일으키지만, 그 불평등한 소득 속에서도 “미국의 흑인들에게는 더 불평등하게 분배”된다고 했다. 그러나 인디펜던트 인스티튜트의 로버트 힉스와 반더빌트 대학의 로버트 마고는 “20세기 흑인의 평균 수입이 백인의 평균 수입보다 훨씬 가파르게 상승했다”는 통계치를 논문에서 제시하고 있다.

20세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이 지구상에서 사회주의 실험이 언제 어디서고 실패했다는 것이다. 소련에서, 중국에서, 탄자니아에서, 북한에서, 쿠바에서 사회주의는 다 실패했다. 20세기에 사회주의 체제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는 같은 기간 모든 국제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숫자를 합친 것 보다 많다. 마오의 대약진 기간 동안에만 중국 국민 수 백 만 명이 죽었다. 그런데도 교수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윤은 더러운 단어다

교수들에게 ‘이윤’은 저주 받은 단어다. 순전히 이윤을 위해 뭔가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이타적인 동기에서 했을 때만 가치가 있다고 한다. 인간이란 보상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며, 이윤이야말로 힘든 노동에 대한 가장 확실한 인센티브인데, 교수들은 이런 인간의 본질을 아예 모르는 듯하다.

그들은 당연히 부자를 증오한다. 부자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재물을 훔친 사람이고, 인종차별주의자이며, 법을 마음대로 바꾸거나, 농부들을 죽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스탠포드대 폴 에얼리히 교수는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평등 추구의 힘을 빼앗았다. 평등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그들을 몽둥이로 때려야만 한다”고 말했다.

부자가 자본주의의 상징이라면 기업은 그 수 천 배의 상징이다. 그래서 교수들은 기업을 거의 악마처럼 생각한다. 기업은 악 중의 악인 이윤을 위해 도덕의 한계를 넘어서 환경을 ‘강간’하고, 가난한 노동자들을 착취하며, 전제적이고, 제3세계를 착취한다는 것이다.

UCLA 지리학 강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컴퓨터 그래픽에는 살찐 고양이가 지구 꼭대기에서 아래로 오줌을 누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경제의 낙수 효과를 풍자하는 만화다.

더 이상의 재산권은 없다! (No More Property Rights!)

교수들은 “고소득층 특히 연봉 10만 불 이상의 사람들에게 세금을 높임으로써, 또는 법인세를 높임으로써 대량으로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아예 “더 이상의 재산권은 없다!”고 선언한다. 모든 사람들이 좀 더 평등한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재산권이 철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UCLA 지리학 교재에는 “배고픔과 싸워가며 일하다보면 소유권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는 구절이 있다. “사람이 배고픈데, 젠장, 소유권이 무슨 소용이람?”이라는 막말의 지성적 버전이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교수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공산주의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공산주의란 사유재산의 철폐, 그 한 마디에 요약되어 있는”것이기 때문이다(마르크스-엥겔스, 『공산당 선언』).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에서 되살아나는 마르크시즘

교수들은 부자를 가난한 노동 계층의 피를 빠는 거머리로, 대기업은 환경과 제3세계에 대한 성폭행범으로 묘사한다. 거대 노조운동을 지지하고, 중국이나 쿠바 같은 공산주의 독재국가를 미화하며, 사유재산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림으로써 ‘이윤’을 더러운 단어(dirty word)로 만든다. 결국 그들은 자본주의의 가치를 최대한 깎아내리는 것이 지식인의 도덕적인 임무라는 허위의식에 젖어 있다. 전 지구적으로 마르크시즘은 죽어가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의 대학들에서는 공산주의가 되살아나고 있다. 그리고 그 첨병이 바로 교수들이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열린 마음의 비판적인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대학에 가는데, 4년 후면 오직 일방적 스토리만 주입 받고 사회로 나온다.

활발한 보수 운동으로 미국 젊은이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벤 샤피로의 문제의식은 우리 사회에도 마치 퍼즐 조각처럼 정확하게 들어맞으며, 뭔가를 시사하고 있지 않은가.

박정자 객원 칼럼니스트(상명대 명예교수)

※ 현재 34세의 벤 샤피로는 17세에 글을 쓰기 시작하여 최연소 전국 동시 게재 칼럼니스트가 되었다. Daily Wire 지를 창간하여 편집장으로 있으며, 미디어 감시 그룹 TruthRevolt를 공동 창간했고, 팟 캐스트 Ben Shapiro Show를 운영하고 있다. 2004년 UCLA 정치학과를 수석 졸업했고, 2007년 하바드 로스쿨을 수석 졸업한 후 변호사를 개업하기도 했다. 20세 때인 2004년에 첫 저서 『세뇌: 대학들은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어떤 사상을 주입하고 있는가』를 집필하여, 미국 대학 교수들의 좌경화 현상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이후 4권의 책을 더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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