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과 ‘자발성’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

사치의 정치학

장밋빛 대리석 계단, 분수, 잔디, 기하학적으로 전지(剪枝)된 나무들, 그리고 온통 금과 수정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궁전에서 수 천 명의 기지와 매력이 넘치는 남녀가 매일 밤, 잔치를 벌이며 호화스러운 궁정생활을 즐기고 있다. 보석으로 수놓은 의상, 관복, 시종들의 제복, 샹들리에, 마차, 녹색과 홍색의 벨벳 커튼, 비단 꽃무늬 의자, 이 모든 것들이 시시각각 찬란한 오색 빛을 발하며 환상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귀족들은 저녁 6시가 되면 모두 포장을 걷어 올린 마차를 타고 나가 음악을 들으며 운하에서 곤돌라를 타고 뱃놀이를 했고, 10시가 되면 궁정에서 희극을 관람했으며, 밤 12시에 종이 울리면 야식을 먹었다.
 

베르사유 궁(피에르 파텔(Pierre Patel) 작, 1668년경). 구글 이미지.
베르사유 궁(피에르 파텔(Pierre Patel) 작, 1668년경). 구글 이미지.

절대왕정이 수립되면서 프랑스가 가장 부강하게 된 17세기, 태양왕이라 일컬어지는 루이 14세 때 베르사유궁의 모습이다. 파리 남서쪽 20km에 위치한 베르사유궁은 원래 왕이 사냥할 때 머무는 여름 별장이었으나 1682년 루이 14세가 궁정을 파리로부터 베르사유로 이전한 이후부터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5천명의 권세 있는 귀족이 궁정에 거주했고 기타 5천 명은 그 근방에서 살았다.

“유럽은 사교생활의 예절과 정신을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배웠다”고 볼테르가 말했듯이, 베르사유의 일상생활은 유럽 모든 왕과 귀족의 사교생활의 전범이었다. 유럽인들의 의식 속에서 프랑스는 곧 유럽을 의미했고, 프랑스식 생활 방식은 상류사회의 예의범절과 호사스러운 생활의 모델이었다. 러시아의 왕실에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했다든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외교문서는 반드시 프랑스어로 작성되고, 외교관들은 반드시 프랑스어를 구사해야 한다든가 하는 관례가 바로 루이 14세 시대에 그 기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치는 단순히 왕의 호사 취미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귀족의 세력을 약화사키기 위한 왕권의 냉혹한 정책 수단이었다. 프랑스 왕정은 중세 이래 대혁명 때까지 지속적으로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썼는데, 전국의 귀족들을 베르사유 궁으로 불러 모아 함께 기거했던 것도 그 정책 중의 하나였다. “짐이 본 일이 없는 자”라는 국왕의 말은 항변할 수 없는 유죄 선고였고, 궁정에 거주하지 않으면 특혜, 관직, 연금, 이권과의 인연도 끊어졌다. 당연히 대귀족들은 베르사유에 와서 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영지를 떠난 귀족들은 당연히 지방에서의 세력을 상실했다.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를 아랫사람에게 맡겨두고 지주 행세만 했다. 매년 영지로부터 막대한 수입이 꼬박꼬박 들어오므로, 몇 년이 지나도 직접 가 볼 필요가 없었다. 영지의 주민들이 중간관리자에게 얼마나 착취당하고 피폐해지는지, 그리하여 소출이 얼마나 줄어드는지는 알지도 못하고 흥미도 없었다. 재산은 서서히 줄어드는데, 베르사유에서의 사치스러운 생활 또한 심각하게 재산을 감소시켰다. 궁정의 사교생활은 파산할 정도로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국왕의 은밀한 의도였다. 정책적으로 모든 귀족들에게 호사를 강요하고, 사치를 명예로 알게 함으로써 재력을 소모시키는 것이다. 가난하게 된 귀족들은 점점 더 왕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귀족의 화려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왕의 호의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부상

궁정이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이전하면서 궁정과 도시가 분리 되었다. 귀족이 자취를 감춘 파리의 사교계는 관리, 의사, 문인 그리고 상인들로 채워졌다. 이들이 바로 당시에는 제3신분으로 불렸고,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는 ‘시민계급’으로 번역되는 부르주아들이었다. 도시는 원래 부르주아의 것이었다. 부르주아(bourgeois)라는 말의 어원은 중세의 소도시(bourg)에 거주하는 상인계급이라는 뜻이다. 부르(bourg)의 영어 번역이 market town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부르주아계급의 기원이 상업에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궁정이 떠난 파리에서 부르주아들은 기를 쓰고 궁정생활을 모방하였다. 희극작가 몰리에르는 환자가 못 알아듣는 라틴어를 잘난 척 하고 말하는 현학적 의사라든가, 무식하면서도 겉으로 세련된 체하며 학식을 내세우는 살롱의 여자들(les précieuses), 또는 독실한 신자인 체하는 위선자들, 여하튼 탐욕스럽고 교양 없는 시민계급을 즐겨 희극의 소재로 삼았는데, 이것이 바로 당시 파리에 살고 있던 부르주아들의 모습이었다.

“세련된 예절이 구멍가게 안방까지 침투했다”고 볼테르가 말했듯이, 고상한 생활양식이 보편화되어 17세기의 도시주민은 보다 적은 돈으로 앙리 4세 시대의 대영주 같은 안락을 즐기고 있었다. 귀족화된 부르주아인 것이다. 파리 시민들은 이제 말이나 노새를 버리고 대소의 차는 있었으나 모두 마차를 타고 다녔다. 가제트 드 올랑드(Gazette de Hollande)나 메르퀴르 갈랑(Mercure Gallant) 같은 신문을 하나쯤 구독했고, 가극의 하나쯤은 대사를 훤하게 외우며, 귀부인들의 규방에서 은밀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한 마디로 그들의 생활은 귀족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다만 대화의 내용이 주로 상품의 시세나 이율, 또는 소송절차나 소송비용에 관한 것이었다는 사실만이 귀족과 다른 그들의 계급을 말해 주었다.

상업으로 부(富)를 많이 축적하게 된 부르주아 계급은 자연스럽게 교양과 여가도 갖게 되어,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문학과 학문, 사상을 장악하였다.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 루소, 몽테스큐, 디드로 등이 모두 부르주아 계급이다. 당시 모든 나라의 지배계급이 이들의 책을 애독하였다. 볼테르는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의 초빙을 받아 장기 체류를 했고, 디드로는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여제(女帝)와 서신 교환을 했다.

부르주아 계급이 역사의 주인공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므로, 그들의 사상이 반(反)역사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모든 인간이 평등한 원시사회를 한없이 찬양했는데, 그것은 바로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그 계급 고유의 정치적 투쟁 방식이었다.

그들의 이념적 무기는 자연권 사상이었다. 인간은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감히 문제 삼을 수 없는 절대적 권리 즉 생존권과 행복 추구권을 갖고 있으며, 자연은 이 세상 누구 하나도 빠짐없이 만인에게 똑같이 이 권리를 나누어 주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이 자연권 사상이야말로 절대 왕정의 특권이나 귀족의 기득권에 대한 무서운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상승 부르주아 계급은 이 자연권 사상을 무기 삼아 자신들의 재산권은 전혀 다침이 없이 지배계급의 지배권만을 문제 삼는데 성공했다. 혁명이 일어났을 때, 자코뱅 당원들의 손에는 한 결 같이 장-자크 루소의 작품이 들려 있었다.

 

왕과 하층민의 결탁

역사적으로 유럽은 도시와 농촌의 대결이라는 긴장 관계 속에서 발전하였는데, 결국 도시가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도시가 가진 부(富)와 행정 능력, 도덕성, 특정의 삶의 방식, 혁신적 사고와 행동 때문이었다. 결국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기능들이 도시의 손에서 생겨나고 도시의 손을 거쳐 갔다. 자연스럽게 도시의 주민인 부르주아가 상승계급이 되었다. 도시가 승리했다는 것은 결국 귀족에 대해 부르주아가 승리했다는 의미이다.

역설적으로 이 계급의 승승장구를 도운 것은 왕이었다. 귀족으로부터 경제적, 정치적 특권을 박탈하기 위해 왕은 이 새로운 계급의 생생한 활력과 저항을 이용했다. 중세 역사 속에서 무수하게 일어난 민란이나 반란의 비밀이 그것이다. 물론 일차적으로 모든 민란은 하층 계급의 불만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제나 왕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 왕은 이 모든 저항들을 지원함으로써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켰다. 그러니까 프랑스의 역사를 통틀어 왕정의 강화와 민중봉기 사이에는 본질적인 상관관계가 있었다. 마침내 귀족의 모든 정치권력이 왕에게 이전되었다. 귀족을 완전히 무력화시킨 왕은 이제 절대 권력이 되었다.

그러나 왕은 새로 떠오르는 제3계급에 기대지 않고는 이 권력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왕정은 자신의 사법부와 행정부를 이 새로운 계급에게 맡겼다. 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왕실 행정부와 사법부의 90%가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이미 부와 교양을 획득한 제3신분은 권리의 평등과 재능에 의한 공직 등용을 요구했고, 중세기적인 경제제도를 자본주의적 자유제도로 대체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장벽의 제거를 요망하고 있었다. 시민 계급은 이제 향락과 취미에 몰두한 나머지 자신을 방어할 기력마저 상실하게 된 귀족계급을 교체하여 자신들이 새롭게 지배계급으로 올라서려 하고 있었다.

이미 국가를 다 떠맡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적대 세력, 즉 형식적인 수장(首長)인 왕을 제거하는 일은 지푸라기 허수아비 인형의 목을 베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루이 16세가 무능해서였다느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치를 해서라느니 하는 해석들은 한갓 부질없는 역사적 변명일 뿐이다. 이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진실이다.
 

마리 앙투아네드와 두 자녀. 구글 이미지.
마리 앙투아네드와 두 자녀. 구글 이미지.

 

민중의 자발성이라는 거짓말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혁명가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은 ‘민중의 자발성’이다. 모든 집회와 시위가 순수한 자발적 시민들에 의해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거기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기획자의 손이 있다. ‘민중의 자발성’이라는 이름은 숨어 있는 기획자의 모습을 가리기 위한 교묘한 알리바이일 뿐이다. 프랑스 혁명도 큰 틀에서는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했고, 왕위를 노린 일부 왕족과, 자기 계급을 죽이는 일인지도 모르고 진보 사상에 도취해 있던 일부 귀족들의 합작품이었다. 귀족과 중간계급에게 수탈당하는 농민과 도시 빈민이 있었지만, 이들은 유복한 부르주아 혁명가들에게 이용당했을 뿐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여자들의 베르사유 행진’과 ‘9월 학살’이야말로 민중의 자발성이라는 허위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여자들의 베르사유 행진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된 지 3개월 뒤인 1789년 10월 5일, 파리의 빈민 여성들이 베르사유까지 행진하여 궁에 난입한 후 왕을 강제로 파리까지 이송했다. 흔히 바스티유 함락 이후 왕정이 곧 붕괴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 사건 이후에도 3개월 동안 프랑스의 일상생활은 평온하게 유지되었다. 그 평온함에 조바심을 느낀 혁명 세력이 기획한 것이 ‘여자들의 베르사유 행진’(Women's March on Versailles)이다.
 

장 피에르 우엘, 〈바스티유의 습격〉, 1789년.
장 피에르 우엘, 〈바스티유의 습격〉, 1789년. 구글 이미지.

한 여자(손에 값비싼 반지를 끼고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가 10월의 어느 날 아침, 파리의 어느 거리 경비 초소를 부수며 난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빵을 달라고 외치는 수많은 여자들이 곧장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누구의 책략에 의해서인지 모르지만 그 이틀 전부터 파리에는 빵 공급이 중단되어 있었다. 굶주림은 당연히 민중의 분노에 불을 댕겼다. 그 때 한 무리의 여자(여자로 변장한 남자들이었다는 설이 있다)가 나타나 시청 쪽을 가리켰다. 여자들은 시청으로 가 피스톨과 창 그리고 두 대의 대포까지 약탈했다. 그 때 갑자기 마야르라는 지도자가 나타나 무질서한 대중을 군대처럼 정비하더니 빵을 달라고 외치면서 베르사유로 진군해 가기 시작했다. 국민군 사령관 라파예트가 백마를 타고 달려왔지만 별로 할 일이 없어서 여자들의 행렬을 묵묵히 뒤쫓아 가기만 했다. (라파예트도 혁명세력에 가담한 귀족임이 나중에 밝혀졌다).

쏟아지는 비를 피하느라 머리 위에 블라우스를 뒤집어 쓴 수천의 무리가 여섯 시간의 행군 끝에 낮이 짧아 이미 어두워진 10월 초 밤의 어둠 속에서 베르사유로 몰려들었다. 신발에 온통 거리의 진흙을 묻힌 여자들은 뼛속까지 비에 젖어 춥고 굶주린 무리들이었다. 이들이 국민의회로 들어가 빵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자, 결국 의장은 여자들의 대표를 성으로 들여보내는 데 동의했다. 장신구 제조 여공과 생선 장수와 거리의 창녀들로 구성된 여섯 명의 여자 대표들이 시종들의 안내를 받으며 성으로 들어갔다. 귀족 중에서도 명문 출신만이 걸어갈 수 있었던 대리석 층계를 통해서였다. 루이 16세는 시위 대표자에게 꽃을 건네주었고, 자기 마차를 타고 돌아가라는 호의까지 베풀었다. 그러나 밖에서는 여자들이 왕과 왕비 일당을 파리로 데려가야 한다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국왕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약속했는데도 그들이 왜 파리의 집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들은 거리 한 가운데 혹은 궁전 열주 밑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밤을 새웠다. 어둠 속에서 비밀 지령을 전달하느라 문을 들락거리는 그림자도 있었다. 다음 날 새벽 5시, 아직 궁전이 어둠과 잠 속에 파묻혀 있을 때 갑자기 한 방의 총성이 일었다. 계획적인 작전 시작의 신호였다. 그러자 곳곳에서 창과 갈고리와 소총으로 무장한 수십,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어떤 손에 인도되어 궁전의 창문 밑으로 은밀히 다가갔다. 여성들과, 여자로 변장한 남자들이 돌진한 방향은 촛불의 방향, 즉 한 치도 어김없는 왕비의 방이었다.

베르사유에 한 번도 와보지 못했던 시장의 생선장수 여자들이 어떻게 궁전의 그 복잡한 수많은 방 중에서 왕비의 침실을 쉽게 찾을 수 있었을까? 경비병 두 사람이 무참히 살해되고, 그 중 하나의 시체에서 잘라낸 머리가 꼬챙이에 끼어져 왕비의 방 창문 앞에 매달렸다. 드디어 라파예트가 나타나 폭도들에게 간청하여 한 경비병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위험이 다 지나간 뒤 말쑥하게 면도를 한 왕의 아우 프로방스 백작과 오를레앙 공작이 나타났다. 이상하게도 폭도들은 이 두 사람에게는 존경에 찬 눈길로 길을 비켜주었다. (왕위를 노리던 이 두 왕족은 혁명 당시 무사히 국외로 도주했다가, 나중에 왕정복고 후 왕이 되었다).

창문 밑으로 몰려간 수천의 무리들은 목소리를 한데 합쳐 “왕을 파리로! 왕을 파리로!” 라고 외쳤다. 어제 밤과 오늘 새벽 몰래 입에서 입으로 속삭이며 전달받은 구호였다. 왕이 나와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자 이번에는 “왕비, 왕비도 발코니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왕비는 두 아이를 안고 꼿꼿이 머리를 쳐들고 입술을 꼭 다문 채 발코니로 나갔다. 나가기는 했지만 몸을 굽히지는 않았다. 군중의 자비를 바라는 여자의 모습이 아니라 당당하게 죽으려는 확고한 결심으로 싸움터에 나가는 군인 같았다. 이런 꼿꼿한 태도가 압도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마주보는 왕비의 힘과 백성의 힘이 서로 충돌하며 불꽃을 튀겼다. 그 긴장감이 어찌나 팽팽한지 1분 동안 넓은 광장에는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흘렀다. 그때 라파예트가 왕비 옆으로 다가와 기사처럼 몸을 굽히고 손에 키스를 했다. 그러자 “왕비 만세! 왕비 만세!”라는 함성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백성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억지 미소도, 비겁한 인사도 하지 않는 여자의 완강한 고집에 환호성을 터뜨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곧 파괴와 약탈이 시작되었다. 궁전의 돌이란 돌, 유리란 유리는 모수 부숴졌다. 수천의 인민이 괜히 빗속을 6시간 동안 행군해 온 것이 아니다. 국민군도 동조하여 무리와 함께 왕궁을 습격하려는 기색이 농후해졌다. 왕실이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왕은 가족들과 함께 파리로 떠날 것을 결심했다는 쪽지를 발코니와 창문으로 내려 보내야만 했다.

6시간 만에 파리 시청에 도착한 왕 가족은 창문 앞으로 끌려 나갔다. 그들의 좌우에는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베르사유에서 온 사람들이 변장한 인형이 아니라 진짜 왕과 왕비라는 사실을 시민들이 잘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국왕은 베르사유궁에서 쫓겨나 파리의 튈르리 궁으로 이송되었다. 같은 시간, 베르사이유로부터 개선하는 여자들의 행렬에는 빵집 주인과 막노동하는 아낙네들이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는 수비병의 머리를 창끝에 꽂아들고 의기양양하게 걷고 있었다.

이 사건은 프랑스 혁명의 수많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극히 단순한 사건처럼 보였지만 정치적으로 보면 극히 조직적이며 조준이 정확하고 올바른 위치에서 올바른 목표를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똑똑하고 학식 있고 민첩하고 노련한 손이 책동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왕을 베르사유에서 끌어낸 것이 남자 군대가 아닌 한 떼의 여자들이었다는 것부터가 훌륭한 이미지 조작이었다.

남자가 갔더라면 반란군 또는 폭도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고, 명령에 따라 훈련된 군인들이 그들을 향해 총을 쏘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왕실 당국은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루이 16세처럼 겁 많고 감상적인 남자는 절대로 여자들을 향해 발포 명령을 내릴 리 없다는 것을 기획자는 잘 알고 있었다.

 

1792년 9월 학살.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3년 뒤인 1792년의 9월 학살도 그랬다. 민중들이 감옥에 있는 반혁명주의자들을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파리의 감옥들을 습격한 이 사건은 역사상 최초의 ‘인민재판’이었다. 러시아와 중국의 공산혁명을 거쳐 6.25 전쟁 당시 한국에서도 벌어졌던 모든 인민재판의 효시가 이것이다. 시민들은 죄수들을 감옥에서 끌어냈고, 즉결 재판 형식으로 유죄판결을 내려 현장에서 죄수들을 즉각 처형하였다. 불과 며칠 동안 이어진 이 학살에서 희생자는 1,200~1,400명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수석 시녀 랑발 공작부인이 무참하게 살해된 것도 이때였다.
 

구글 이미지.

혁명행정부에 의해 준비되었고, 민중에 의해 실행에 옮겨진 이 사건을, 당시의 혁명 세력들은 물론 현대의 일부 역사학자들까지도 여전히 자발적인 대중운동이라고 주장한다. 자발적인 거리의 시위대 사이에서 우연찮게 사법의 최고 권한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반혁명주의자라고 해서 인민재판으로 죽여서도 안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학살된 자 중에서 3분의 2가 잡범이었다. 다시 말하면 귀족이나 왕당파가 아니라 평민이었다. 특히 젊은이와 절도범이 대부분이었다. 그중에는 냅킨 하나를 훔친 자, 시계 하나를 훔친 자, 말 한 마리를 훔친 자, 손수건 한 장을 훔친 자 등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집안에서 도둑질한 요리사까지도 학살되었다. 비세트르에서는 감화원의 어린이 33명을 살해했는데, 가장 어린 아이가 열두 살, 가장 나이 많은 아이가 열일곱 살이었다. 그해 9월 파리의 9개 감옥에 수용된 수감자 총 수는 약 2천8백명, 그들은 40~50%가 서로를 죽였다.

약 사흘 동안 파리의 거리는 인민화된 국가의 잠정적 사법부로서 기능했다. 판사가 된 시민들은 때에 따라 심문을 하기도 하고, 혹은 무죄방면을 하기도 했다. 인민이 임시계약직의 공무원이 된 것이다. “적은 우리의 문 앞에 있다. 우리는 전선으로 가야 한다. 감옥은 가득 차 있다. 수감자들은 우리가 없는 사이를 틈타 우리의 재산과 여자들을 유린하려 한다. 우리는 정부를 돕기 나섰고, 서둘러 그 일을 수행했다.” 이것이 학살자들의 변이었다.

손수건 한 장을 훔친 파렴치범까지도 희생시킨 그 사건을 후세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인민이 힘이라고 찬양했다.

 

우리는 왜 프랑스혁명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피히테, 헤겔 등 19세기 독일 관념주의 철학자들은 프랑스혁명을 한없이 동경했고, 1848년의 (실패한) 독일혁명도 프랑스혁명을 모델로 한 것이다. 레닌, 트로츠키, 모택동의 공산주의 혁명도 프랑스 혁명을 모방하였다. 프랑스 대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고, 자신들은 부르주아를 증오해 마지않는데도, 그들은 프랑스혁명을 넘어서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동경하고 그대로 복사하였다. 프랑스대혁명은 모든 시대 모든 나라에서 혁명의 모델이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지 한참 된 21세기에 들어와 ‘구체제의 타도’ 운운하며 프랑스혁명을 꿈꾸는 혁명가는 그 어느 나라에도 없다.

촛불 집회에 단두대와 참수된 머리 모형이 등장한 것을 보면, 한국만 예외인 듯하다. 해외 방문 시 외국 정상들이 어쩐지 문재인 대통령을 따돌림 하는 듯 했던 것은 이런 시대착오성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2018년 지금 현재 우리가 아직도 1790년대 프랑스혁명을 읽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철지난 혁명가들과 멋모르고 동조하는 민중들을 깨우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서울대 불어불문학 전공.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서울대 불어불문학 전공.

※ 필자 소개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불어불문학 전공(학사, 석사, 박사)
푸코, 데리다 등 포스트모던의 철학과 미학, 그리고 프랑스 혁명에 관심.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 <현대세계의 일상성>, <푸코 전기>, <사상의 거장들> 등의 번역서와, <빈센트의 구두>, <시선은 권력이다>, <눈과 손, 그리고 햅틱>, <이것은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등의 저서가 있다.
최근에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여혐의 희생자, 마리 앙투아네트>를 기획,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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