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거실 한 구석 아이들이 먹다 밀어놓은 피자 박스가 보인다. 그런데 피자 브랜드가 ‘졸라 싼 피자’다. 아무리 대한민국 언어생활이 막장이라지만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면 안 된다. 니들은 죽었다고 복창해라, 항의하려고 박스를 들어 전화번호를 찾는데 그제야 한쪽이 가려져 있던 피자의 ‘본명’이 보인다. 고르곤‘졸라 씬 피자’였다. 문제는 소생의 언어생활이었다. 평소 그런 말을 쓰니까 글자가 그렇게 보인 것이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대체로 목표 달성에 성공한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 들다보니 아닌 것까지 그걸로 착각할 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이른바 ‘보수 진영’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혐오하는 대상이 같다보니 뭉뚱그려 한 편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그 안에는 수 없이 많은 다른 생각과 이념이 있다. 어느 모임에서인가 ‘애국적 자유주의 보수우파’라는 표현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을 두 자로 줄이면 ‘괴물’이 된다. 일단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는 상극이다. 내버려 두면 알아서 잘 된다는 자유주의자의 생각을 보수주의자는 이해하지 못한다. 보수와 우파도 같은 등위의 개념이 아니다. 보수는 태도이고 우파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한편 자유주의자는 애국이라는 단어를 불안하게 바라본다. 애국의 한쪽 끄트머리는 어쩔 수 없이 국가주의에 걸쳐 있다. 그래서 이 성향을 모두 가진 사람이라면 그는 이념의 프랑켄슈타인이다. 해골 안 생각이 너덜너덜하다는 말씀이다. 이게 이른바 보수끼리 이야기하다 대화가 끊기거나 얼굴을 붉히는 이유다. 모쪼록 이제는 웃으면서 갈라섰으면 좋겠다. 분열을 조장한다고 하실 분 있겠다. 그러나 이는 매우 정상으로, ‘분열’이 아니라 ‘분화’가 맞다. 분열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분화는 올바르게 작동할 때 긍정적이다. 가령 좌익도 NL과 PD는 세계관이 전혀 다르며 같은 NL이라도 주사와 비(非) 주사는 예리하게 각을 세운다(무슨 뜻이지 모르셔도 전혀 상관없다. 그냥 종파가 많다고 생각하시면 된다). 그러나 이들은 공동의 목표에 ‘단결’을 잘한다. 이들의 공동이란 ‘정권’이다. 힘 합쳐 일단 잡고 보자는 얘기다. 이게 우익이 좌익에게 배울 점이다. 이들이 이념의 차이를 넘어 정권의 달콤함을 공유하는데 걸린 시간이 수십 년이다. 까마득하다고? 걱정 안하셔도 된다. 원래 후발 주자는 빨리 따라잡기 때문에 노력만 하면 몇 년 아니 몇 개월만에도 가능하다. 필요한 것은 이념을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으로 대동단결’인 것이다.

2세대 한국 보수, 이제는 다니엘 블레이크에 그랜 토리노를 섞어야 할 때

전통도 토양도 없는 한국 보수의 시조는 박정희다. 한국 보수가 누구냐 물었을 때 0.5초 안에 ‘미스터 박’ 대답 안 나오면 기회주의자라고 봐도 된다. 그런데 시대가 달라졌다. 실체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존재가 없었던 것은 아닌 1세대 보수에 이어 2세대 보수가 나와야 하는 현재 상황은 박정희 시즌과는 차원이 다르다. 당시는 보수 = 애국이었다. 그래서 산업보국이라는 후진국 슬로건까지 등장했었다. 이제는 아니다. 우리가 애국을 필수로 해야 할 만큼 대한민국은 허약하지 않다. 앞에서 자유주의와 애국이라는 단어의 갈등을 말씀드렸지만 둘은 어울리지 않는다. 국가의 간섭을 극도로 꺼리면서 애국을 외치는 것은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앞으로 등장해야 할 2세대 한국보수의 주요 덕목은 개인의 ‘도덕성’이다(애국 보수라는 레토릭도 가급적 털고 가야 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순간 상대는 그럼 나는 비非애국이란 말이냐 하며 반발하게 된다).

영국 영화감독 켄 로치는 이념과 생활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강남 좌파가 가장 기피하는 인물이다. 좌익 중의 좌익인 그는 정말로 프롤레타리아처럼 산다. 켄 로치는 201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탔는데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라는 영화다.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 틀딱으로 자신의 미래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모욕으로 여긴다. 당신의 빈곤을 위해 국가가 돈을 주겠으니 증빙서류를 만들어 오라는 식의 주문을 그는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거짓말을 하게 되고 자아가 위축되고 비굴한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소중한 내 인생 가지고 서류 위에서 공짜 돈을 주느니 마느니 희롱하지 말라는 것, 이게 도덕성이다. 가령 청년 배당 같은 것이 그렇다. 돈 몇 푼 국가에서 던져준다고 공손히 받아먹는 순간 그는 노예가 된다. 2세대 보수는 그게 마냥 좋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돈 받으니 좋습니까? 국가가 너무 고마워서 눈물 날 지경입니까? 나는 사지가 멀쩡해서 죽어도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부끄러움을 묻는 이 도덕성이 자연스럽게 작은 정부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굳이 부연설명 할 필요 없겠다. 제목이 ‘다니엘 블레이크’가 아니라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거든? 그러니까 내 성질 건드리지 마! 하고 으름장을 놓는다. ‘나’와 ‘개인’에 대한 자존감과 책임감 그리고 그것을 훼손하려는 자들에 대한 투철한 경계심이다. 그러나 경직된 도덕성만큼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것도 없다. 뭐가 더 있으면 좋을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과 주연을 맡은 ‘그랜 토리노’는 보수의 미학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전형적인 미국 틀딱(유식한 말로 WASP) 영감이 불량배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동네 이민 처녀를 돕는 내용인데 영감은 그녀와 자기가 동등하기 때문에, 그래서 인권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돕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자기와 다른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기꺼이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다 한다. 이민자는 싫지만 다만 약하다는 이유로 핍박받는 것을 그는 용납하지 못한다. 그래서 보수는 태도다. 이 신념 과시를 다른 말로 ‘허세’라고 하는데 이렇게 폼 나는 허세를 좀 부려야 딱딱한 도덕성이 보들보들해진다. 사실 1세대 보수에서도 이런 분들이 좀 나와 주셔야 보수가 숨을 돌린다. 별로 기대하지는 않는다.

도덕성을 좌익의 전유물이라 하는 분들이 있다. 틀린 말이다. 그들은 도덕주의자일 뿐 도덕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목표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태도가 그 증거다. 그들은 절대 선을 위해 일시적인 악을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원래 보수의 것이었던 도덕성을 찾아와야 한다. 2세대 한국 보수의 출발점이 도덕성이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절대 심각하지 않게, 약간은 허세 부려가며. 그래야 빤하고 구질구질한 도덕주의를 피해 갈 수 있다.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작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