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범 칼럼] '자살 민주주의'로 가는 나라
[김행범 칼럼] '자살 민주주의'로 가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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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권하는 사회’ ... 정치인에게 자살이 '합리적' 정치행위가 될 수도
자살, 비리의 끝판에 몰렸을 때 '거룩한 우상'으로 거듭나는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
좌파권력ㆍ군중 합작해 자살 정치인들 '영웅'으로 만드는 풍조 막아야
김행범 객원 칼럼니스트
김행범 객원 칼럼니스트

소비자는 합리적이고자 하는 유인이 있다. 비합리적인 소비 후 들인 돈과 구입한 제품을 비교해 보면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투표자들은 그렇지 않다. 개개의 투표자들의 표가 과반수 지지를 얻어 정책으로 실현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소비자와는 달리 투표자는 자신의 선택 행위와 결과 실현의 인과성이 약하다. 이 때 투표자는 선택의 결과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belief)을 고수함 자체에서 효용을 찾으려 한다. 원전 반대가 실제 원전 폐쇄로 이어져 거기서 효용을 얻기 보다는 원전 반대를 표시하는 행위 자체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 ‘난 이런 신념을 가진 사람이야’를 표명함에 가치를 두는 경향이다. 원전 폐지를 반대하는 군중들도 실은 그것이 정말 폐지되어 자신도 전력 부족의 고통을 겪는 지경에는 결코 도달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안심하고 자신의 환경주의 가치에 고착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믿어 온 투표자들이란 실상 이토록 비합리적이다.

투표자들은 왜 비합리적인가?

정치 속 투표자의 이러한 비합리적 행동이 강하면 이들은 이른바 ‘군중’이 되고 특정한 신념, 그것도 진실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맹목적 믿음을 견지한다. 내가 미는 정당 및 인물이 최고라는 신념, 내 임금은 남의 착취 때문에 낮다는 신념, 대기업의 갑질 혹은 저 지역의 횡포 때문에 우리가 못 산다는 신념, 복지가 많을수록 행복하다는 신념, 입시 제도만 바꾸면 내 자녀가 서울대에 입학할 것이라는 신념, 일자리는 정부가 만들어 준다는 신념, 북핵이란 별 것 아니라는 신념에 고착함에서 만족을 얻는다. 이들은 그들의 오류를 지적하는 ‘나쁜 진실’의 전령자를 죽이고 그들이 믿는 신념을 고수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고통의 책임을 무죄한 희생양에게 돌리고 그들을 처형하는 역할을 자임하는 정치인들을 지지하러 몰려간다. 민주주의는 이 군중의 품질에 달려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비합리적 행동을 즐기는데도 비용이 든다는 점이다. 비용이 상당히 클 경우 부득이 자신의 비합리성을 교정해야 한다. 취업 지원서 ‘희망 급여액’란에 수십억을 적었다가는 아예 입사도 못할 것이므로 비합리적인 금액의 기입은 자제함이 보통이다. 시장 속 선택과는 달리 정치적 선택은 잘못된 신념에 몰입하는 비합리성이 나타날 가능성이 강하지만 비합리성 선택에 따르는 비용 때문에 합리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안 그랬다가는 개인이든 국가든 금방 망할 것이므로.

자살은 가장 대표적 비합리적 행위이나 목숨이라는 가장 큰 비용을 수반하므로 실제 선택에서 합리성을 따진다. 비합리성 속의 합리성, 이것이 캐플란(Bryan Caplan)이 규명해 낸 ‘합리적 비합리성’(rational irrationality)이다. 이 국면을 그의 예 중에서 보자. 첫째, 힌두교의 사티(Sati)는 남편이 죽으면 미망인이 남편의 화장 장작 위에서 함께 타 죽어야 한다는 교리이다. 이 자살로 아내는 내세에 큰 보상을 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일부 아내들이 기꺼이 불타는 장작 위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이 악습이 가장 일반화된 벵갈 지역에서조차 10%가 안 되는 사람만이 이를 따랐으며 그것마저 상당 부분은 실은 죽은 남편 가족에 의해 살해된 것이었다. 사티를 거부한 과부는 재혼도 할 수 없고 냉대 속에 단식과 수도로만 여생을 마쳐야 했다. 그러나 핵심은 대부분의 과부들이 살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둘째, 또 다른 예는 이슬람의 지하드(Jihad)이다. 무하마드는 성전(聖戰)에서 죽는 자에게 영원한 천국을 약속했다. 쿠란을 그대로 따른다면 무슬림 군대는 이슬람교도가 아닌 자와 싸울 때 그들은 완전히 정복하거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여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죽고. 물론 이 계명을 그대로 따르는 소수 무슬림도 분명 있지만 전쟁에서 항복 및 영원한 천국이 약속된 죽음 사이에서 대부분은 항복을 선택했다. 9.11 테러와 같이 극렬한 자살 공격을 하는 자들이 있지만 10억 명 정도의 다른 대부분의 무슬림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목숨을 요구하는 가혹한 교리의 수행에서 보통 사람들은 합리성을 고려한다.

자살이 합리적 선택으로 되는 사회

사티와 지하드의 자살이 시사하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비합리성으로 보이는 일들이 빈번하지만 그에 수반되는 큰 비용이 그것을 가급적 억제하고 합리성으로 돌아오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의 한국의 자살 정치에 주는 시사는 그 반대이다. 오히려 비합리적 선택을 강화하고 자살을 촉진하는 것, 곧 자살의 편익을 대폭 올려주거나 혹은 그 비용을 대폭 줄여주는, 말하자면 ‘자살 권하는 사회’말이다.

하루 차이를 두고 일어난 각각 좌우 진영의 두 인물인 노회찬, 정미홍의 죽음에 대한 군중의 몰입행태와 언론 보도에서 이 시대 군중은 비합리적 정치 행위를 조장하고 있다는 우려를 느꼈다. 우리는 몇 년 전부터 정치인의 자살이 있은 후에 그가 왜 자살했는가는 덮어버리고 언제 어디서 죽었는가만 기억하는 나쁜 버릇이 생겼다. 물밀듯한 추모 의식과 언론 보도는 대개 어느덧 본안 사실을 폐기하고 로망화된 만가(挽歌)의 감상으로 바뀐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전혀 타당하지 않게 죽어서 위인으로 부활시켜주는 점이다.

‘합리적 비합리성’ 논리가 정치인의 자살에 주는 함의는 이런 것이다: 정치인들은 자살을 더 이상 비합리적 행동이 아니라 이제 ‘합리적’ 정치행위로 고려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이다. 비리의 끝판에 몰렸을 때, 모든 비리를 대중의 심중에서 일거에 삭제 받고, 거룩한 우상으로 거듭나게 해 줄수도 있는 새로운 선택 대안으로. 지식보다는 기행으로 먹고 사는 한 지적 승려는 자살자를 이미 예수라 비유했고, 한 목사는 다윗에 비유해 주었다. 예수는 빌라도 법정 앞에서도 이토록 천박하게 간주되지는 않았건만 한국 군중 앞에서 이제 부정한 자금을 받은 자로 전락했다. 사후엔 무슨 비리를 저질렀는지 결코 비난받지 않으며 결국엔 민주의 화신으로, 정의로 심벌로 승화되는 기막힌 정치 비즈니스로 만들어주는 것이 두렵다. 정치인들의 행동 지평은 이제 현세를 넘어 내세로까지 확장된다. 계산을 통해 자살까지 고려하는 악행 수준은 종전의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민주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일로 민주의 성인이 될 수 없으며, 정의롭지 못한 일이 왜 청렴과 정의의 사유가 되나. 의(義를) 지키기 위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하다못해 예산낭비 막자고 자살하는 것도 아니다. 수사로 비행이 드러난데 대한 당혹과 수치 때문에 자살함이 왜 기념되어야 하나. 생명이 죽었음에 대한 애도의 뜻은 얼마든지 표하겠지만 그릇된 자살 이유는 냉정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문제를 혼자 지고 가겠다는 상투적 유지들은 대개 지켜질 수도 없으며, 아무 것도 해결되지 못한 채 비리는 묻혀버리고, 우리는 그 사후 처리에 또 상심과 세금을 바쳐야한다.

자살 민주주의를 만드는 자들

투표자에게 좌파는 청렴하고 우파는 부패하다는 편견, 우리 편은 선이고 저쪽 편은 적폐라는 정치 편견을 아직도 강력하게 이 시대 군중이 신봉하고 있다. 그 믿음에 충실하다는 것에서 만족을 얻고 있다. 그래서 경제가 어려워지더라도, 남북문제가 실은 얼마나 불확실한가에도 불구하고, 이 그릇된 편견을 고수함에서 자체에서 만족을 뽑아내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편 정치 아이콘이 실은 전혀 선이 아니더라는 엄연한 사실로 드러난 경우에도 대중은 여전히 이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비합리적 군중에겐 진실보다 믿음이 중요하기 떄문이다. 지금은 자살자가 받은 돈을 거론함을 증오하며, 그가 자살하도록 만들었다는 그 누군가에게 보복하겠다고 공언한다. 지금의 우리 사회의 군중이야 말로 ‘비합리적 투표자’ 이론의 전형이다.

민주주의는 결국 자살한다는 것이 존 애덤스의 주장이다. 민주정치 기제 속에 국가 몰락의 씨앗이 들어 있음을 경고한 것이리라. 우리의 민주주의는 ‘민’을 최고라 여기고 이에 따름에 몰입하다 바로 그 ‘민’이 그릇된 정치 신념에 좌우되는 불합리한 투표자 혹은 광포한 군중의 다면적 인간임을 간과했었다. 시장에서 소비자의 그릇된 선택은 자신만을 불행하게 한다. 정치에서 잘못된 믿음에 사로잡힌 비합리적 투표자의 선택은 국가를 자멸하게 한다. 좌파권력과 군중이 합작으로 자살 정치인들을 영웅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자살이 찬양되는 민주주의는 이미 죽은 세상일이며. 자유 민주주의 밀어내고 자살 민주주의란 변종이 나오지 않게 막아야 할 것이다. 이는 투표자의 비합리성이 얼마나 덜한가에 달려있다.

물가도, 소득도, 노사관계도, 교육도, 이윤도 그리고 죽음마저 좌파는 끊임없이 자연 순리를 벗어난 다른 인공적 질서를 강요한다. 자살은 타살보다 희소한 일이며 가장 부자연스러운 죽음이다. 좌측으로, 혹은 우측으로든 다 ‘살자’며 하는 도둑질이 정치 아니던가. 죽음만은 인공적 질서를 떠나 자연스럽게 자연사로 마감하자. 우파 대통령들이 악법 밑에서 자살하지 않고 죽음보다 못한 수감 생활을 받아내는 건 그것만으로도 작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정치인들은 자살하지 말라. 자꾸 이러면 나도 따라 할 것 같다. 우선 돈부터 챙기고. ‘살면 돈, 죽으면 민주 성자’ 이런 구호 생겨나지 않게 하자.

김행범 객원 칼럼니스트(부산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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