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재학 시절 미대 학생회장으로 한총련 자동등록...데모에도 참여
만화가 꿈꾸며 미대 졸업, 생업 위해 인테리어 현장 전전 … 탄핵사태 후 만평
대한민국에서 세 자녀의 아빠로 산다는 것은 결국 용기를 갖는다는 것이다

아차달 씨.

나는 1970년생이다. 유신정권에서 태어나서 군사정권을 거쳐 치열한 최악의 입시경쟁을 거친 세대이다. 1988년 이후 대학을 다닌 세대로 운동권세대와 신세대로 이어지는 중간세대이기도 하다. 대학은 장수 끝에 서울근교 미대를 다녔다. 내가 미대를 간 이유는 만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만화학과는 없어서 서양화과로 가서 그림을 배운 후 만화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서였다.

내 생각과는 달리 미대의 커리큘럼은 데생이나 페인팅교육이 아닌 철학과 접목된 개념미술위주로 짜여 있었으며 오브제와 영상위주의 작업이 대부분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개념미술, 분석적 사고에 의한 오브제 미술을 배우면서 현대미술의 의미를 도덕적인 관점보다는 탐미적이고 비판적인 시각과 사고로 교육되었다. 대학 다닐 때 미술대학 학생회장으로 한총련에 자동 등록되어 데모에도 참여하고 걸개그림도 주도적으로 그리며 민주화란 의미에 대해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믿고 행했던 적이 있었다. 적극적인 참여자는 아니어도 틈틈이 응원해주는 일원이었다.

대부분의 선배들은 졸업 후 부잣집 자식이 아니고서는 창고하나 빌려서 작업하는 선배들이 많았다. 창고작가란 것이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노숙자와 별반 다르지 않는 삶을 살면서 순수와 작품세계에 대한 자기들만의 독선적 작품세계에 빠져있는 선배들이 많다. 그런 선배들이 모습이 싫었던 나는 미술과 환경을 결합한 환경미술 디자인 사무실을 운영하며 나름대로 획기적인 사업을 시도하였고 그럭저럭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금융위기를 맞아 거래처가 기본예산위주의 운영으로 바뀌다보니 디자인 환경 관련 사업인 내 사업은 필수사업에 밀려 힘들게 유지하다가 결국 빚만 지고 늦은 나이에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시기에 사업 실패 후 6개월 정도 방황한 적이 있었는데 방황 중에 문득 잊었던 만화가의 꿈이 생각났다.

어느 날 신문 만평을 보게 되었는데 자기의 생각을 담아서 표현하는 좌파신문 만평에 부러움을 느꼈고 나의 꿈이 저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두 아이에 아빠로서 빚도 있고 생활비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꿈은 꿈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 건설관련 설계업무를 담당하던 나는 전국을 떠돌면서 인테리어 현장을 전전하면서 살았다. 이 일도 40대 중반이 되면서 그나마 직장생활 하는 것도 녹녹하지 않았다. 단기계약직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고 계획에 없던 막내가 태어나면서 책임감이 더 늘었지만 힘들다기보다 늦둥이의 재롱도 세상사는 재미라고 생각하고 사는 세 아이의 아빠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차라리 몰랐다면 힘들게 살지만 행복하다고 믿고 사는 세 아이의 아빠로서 살고 있을 수도 있는데 내 삶을 흔드는 일이 일어났다. 그날 인터넷에서 최순실 태블릿이 가짜라는 논평을 보고 한심하다고 생각했으나 그 사람의 행적과 논리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고 내용을 관찰하던 중 종편방송과 검찰의 거짓기사를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 관련된 유튜브 영상들을 보면서 내가 알고 있던 가치관에 대한 혼돈은 가중되었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점점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며칠 후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림 그리는 후배를 만나서 작금의 현실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더 충격을 먹었다. 서울시 예산으로 전시활동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는 그 후배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사회주의로 가는 게 맞는다는 것이었다. 나보고 가짜뉴스에 현혹되지 말라는 얘기를 하였다. 얼마 후에는 1년에 한번 볼까말까 한 고교친구들을 만났는데 초중고를 서울에서 나온 나는 친구들이라서 우익적사고가 있으리라 믿고 탄핵과 태블릿 등 사회가 이상한 부분에 대해 얘기했는데 오히려 미친놈으로 몰렸고 언쟁 끝에 '정치얘기 그만하자'며 안좋게 만남이 끝났다.

친척들도 동료들도 이런 의문점을 제시하는 나의 이야기를 사이비 종교를 전도하는 사람처럼 봤다. 나는 그들의 나를 보는 모습이 느껴졌다. 심지어 가족들도 처음에는 나의 이런 행동을 우려했었다. 하지만 같이 진실을 찾다 보니 다들 이해하고 가족들은 그나마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중학생인 큰아이한테 전교조 선생들의 좌파선동 얘기를 가끔 듣는데 아이가 피해 입을까봐 입단속을 시켰다. 하지만 진실에 관한 탐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항상 강조 하고 있다.

탄핵사태와 정권이 바뀌고 언론과 포털이 정부와 특정세력에 장악되면서 거짓선동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국민들에게는 여과 없이 적나라하게 스며드는 현실인데도 국민들은 비판 없이 받아 들여야 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태극기 집회에 나가려고 맘을 먹었지만 지방으로 이사도 했고 주말에도 일하는 경우가 많아서 참여를 못했다. 지금은 태극기 집회는 와이프가 더 가고 싶어 한다. 언제 아이들 데리고 꼭 참가할 예정이다.

방법을 찾던 중 문득 대학 다닐 때 미술역할은 무엇인가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한 선배가 한 말이 기억난다. 미술은 안개비와 같아서 시나브로 세상을 촉촉이 적시는 거라고. 그런 비와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현재의 내 모습을 보니 어렸을 때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꿈을 세상사는 풍파에 잊고 산지 20년 가까이 되었다. 일과 후 소주1병과 아이들의 미소만 보면서 20년가량을 흘려보냈다.

거짓선동 기사를 보다가 예전에 부러웠던 만평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만평들도 거의 다 좌 편향된 만평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부러웠던 사람들이 그려낸 만평들이 편향된 이념과 정치에 얼룩진 거짓의 붉은비를 세상에 마구 뿌리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이건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매일 매주 좌파와 정부의 입장만 형상화 해주고 있는 만평들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가 없었다. 물론 그 사람들은 직장이고 조직에 대한 충실한 역할로 보면 이해할 수 있지만 작가적 양심에 대해 생각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쪽만 비판하는 그림만 그리는 그들 그림을 보면서 정치에 부역하는 관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벌거벗는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용기를 내서 나도 만평을 그려보기로 했다. 손 놓은 지 오래 돼서 실력은 없지만 실력보다는 일단 시작하는데 의미를 두고 발전해 나갈 계획을 세웠다.

문제는 본업이 있고 생계가 있어서 남는 시간에 그려야 되고 그림 그릴 시간이 제일 문제였다. 하루에 최대 유용 가능시간이 2시간에서 3시간정도 뿐이라서 이시간만으로 만평을 그려야 돼서 첨에는 퀼리티도 안 나고 애를 먹었었다. 그래도 틈틈이 나름 열심히 그렸다. 일단 블로그에 한 달 정도 열심히 그려 올렸다. 한 달이 지나도 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보는 사람이 없는 만평이 무슨 소용이야 싶어서 홍보를 고민을 하던 중 우파 채널에 메일로 그림소스도 보내고 했는데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더 적극적인 홍보가 해야 하나 싶던 중 벌레소년의 인터뷰 기사 내용 중 일베를 하는 이유에 대한 기사 내용을 보고 일베의 표현의 무한자유에 매력을 느낀 후 블로그하고 일베에 같이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나마 아주 조금씩 보기 시작 했다.아직은 그림이 세련되지 못하고 표현 전달력이 떨어지지만 노력중이며 극복을 목표로 한다.

처음에는 만평을 하면서 이게 잘돼서 돈벌이가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6개월 가까이 만평을 90개 정도 올리다 보니 소속이 없고 지시가 없는 창작의 자유로움에 만끽하게 되었다. 자기표현이 자유로울 때 행복이란 게 존재한다는 생각이 새삼 들고 있다. 물론 내용이 좋아야 하고 진실추구가 목적이어야 한다. 내용도 첨에는 특정우파의 내용만 구상했는데 지금은 더 폭넓게 보려 애쓴다. 아직은 너무 많이 좌편향 된 만평의 균형을 위해 안보 쪽은 우파성향의 충격적인 컷을 그려서 균형을 맞춰보려고 하고 있다. 일주일에 2개에서 3개 정도 그리려고 하는데 본업이 바쁘면 힘들 때도 있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 현재 6개월 정도 블로그 만평을 그리면서 40대 후반이 돼서야 버려지던 꿈이란 걸 다시 생각하게 되다니 인생이란 참 신비하다.

갈 길이 멀지만 내년 50대에 들어서면 장편만화를 그려보는 꿈을 꿔본다. 한국근대사에서 속이는 자와 속는 자의 역사를 우파적 시각에서 그려보고 싶다. 현재 왜곡 되어 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우파 피해자 입장에서 기술하고 싶다. 내가 못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한테도 아빠의 꿈에 대해서 설명해준다. 지금은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아빠가 밤마다 그리는 그림에 아이들도 관심을 갖는다. 내가 못해도 아이들은 아빠의 꿈을 이해할 날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도 어렸을 때부터 틈틈이 그림을 가르친 것도 있고 해서 다들 그림을 잘 그린다. 최소한 나는 아이들만큼은 자유대한민국의 소중한 일원으로 키우고 있다.

내가 알고 있던 과거의 대한민국은 지금은 사라졌다. 지금 대한민국은 급격히 좌경화되고 독재화 되어가는 모습만 보이고 있다. 나는 자유대한민국의 일원으로서 내가 믿는 정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다만 내가 지금 이 나라에서 걱정되는 것 중 하나가 표현의 자유까지 억압되어 지려 하는 모습에 깊은 우려를 느낀다. 대한민국에서 세 아이의 아빠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는 상관없지만 세 아이가 피해를 보지 않을까라는 우려가 생긴다. 대한민국에서 세 자녀의 아빠로 산다는 것은 결국 용기를 갖는다는 것이다.

필명 아차달(49·인테리어 디자이너) ckepda70@daum.net

아차달 씨는 현재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아차달의우로보기' 블로그 만평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블로그 주소는 http://blog.daum.net/ckepda70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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