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전 패권 도전국이었던 러시아 편에 섰다가 조선 멸망
문재인 정부의 종북(從北)․친중(親中)․반미(反美)․혐일(嫌日) 외교의 종착역은?

김용삼 객원 칼럼니스트

7월 25일. 이날이 무슨 날인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시계바늘을 124년 전으로 돌리면 서해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연합함대 소속 순양함 요시노(吉野)호가 청국 북양함대 소속 순양함 제원(濟遠)호를 향해 함포를 발사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한 날이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전리품을 두둑하게 챙겼다. 일본 본국 정부의 4년 치 세수(稅收)에 해당하는 2억 3,000만 냥의 막대한 배상금, 타이완과 랴오둥(遼東)반도의 획득. 이보다 더 의미심장한 성과는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분리시켜 일본의 보호국화를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것이었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에서 한일 양국은 “조선은 자주국”이라고 맹약했고, 1895년에 체결한 시모노세키조약에서는 “조선은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이라고 명시했다. 이러한 외교적 수사를 일본이나 서구 열강이 조선을 확실하게 독립시켜준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지적(知的) 장애자다. 진짜 의미는 조선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겠다는 뜻이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마크 R. 피티는 『식민지』라는 책에서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취득 목적과 일본은 근본적으로 달랐다고 말한다. 서양 열강들은 국익을 위해 식민지를 취득한 반면, 일본은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식민지를 획득했다는 것이다.

지진․화산폭발․해일․태평 등 때만 되면 자연재해로 시달리느라 겁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자기보호본능이 강해서인지는 몰라도 일본은 국가이익보다는 안전, 즉 안보를 식민지 획득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았다. 그 결과 이웃나라 조선은 안보 확보를 위한 일차적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일본이 국운을 걸고 청일전쟁을 일으킨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조선 문제’였다. 일본 입장에서 볼 때 한반도가 자신들에게 적대하는 나라의 품에 안기면 한반도는 자신들의 심장 혹은 복부를 겨냥한 예리한 비수가 된다. 이렇게 되면 일본의 안보는 치명적 위협에 노출된다.

일본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한반도를 일본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만들던가, 적대 세력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이것이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선언한 주권선․이익선 개념이다. 가장 확실한 선택지는 아예 골치아픈 한반도를 일본이 차지하는 것이다. 만약 힘이 부쳐 통째로 한반도를 차지하지 못할 경우 반도의 중간선으로 분할하여 한쪽이라도 일본의 영향력이 행사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국가전략의 핵심이었다.

일본이 무리수를 두어가며 시모노세키조약에서 랴오둥(遼東)반도를 할양 받은 이유도 전쟁의 주된 목적이었던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고 청국의 간섭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자국 영토 안에서 조선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일본과 청국이 국운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을 무렵, 이 나라 지도자들은 무슨 일들을 했을까?

양다리 걸치다 망한 대원군

오랜 세월 야인으로 지내며 재기의 기회를 모색하던 대원군은 1894년 7월 23일 일본에게 등 떠밀려 친일 괴뢰내각의 섭정에 취임한다. 그런데 대원군은 권좌에 오르자마자 최우선적으로 자기 며느리인 왕비 민 씨와 세자 이척(후에 순종)을 폐위하려다가 일본의 반대로 실패한다.

일본이 자기 뜻을 받아주지 않자 대원군은 평양에 주둔 중인 청나라 장군에게 밀서를 보내 “상국(上國․청나라)은 많은 원병을 보내시어 우리의 종묘사직을 보호해주시고, 또 간당(奸黨)과 일본에 빌붙어 매국하는 무리들을 일소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피눈물로 기원한다”고 요청했다. 대원군뿐만 아니라 고종을 비롯하여 당시 조정의 최고대신이었던 김홍집 등이 청국 사령관에게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문제의 편지들은 평양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에게 고스란히 노획되었다.

1894년 11월 8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주한 일본 공사는 조선의 고위 대신 김홍집·김윤식·어윤중을 일본 공사관으로 초청하여 일본군이 노획한 대원군과 고종의 서한을 공개했다. 증거물이 제시되자 조선 대신들은 공포로 얼어붙었다. 이노우에 공사는 이날 오후 2시부터 밤 11시까지 험악한 용어를 동원하여 일본에 대한 배신행위를 겁박한 후 “모든 책임을 지고 대원군이 사임하면 서한 문제와 관련하여 국왕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조선의 고관들은 국왕 고종이 일본으로부터 책임을 추궁 당하는 비참한 사태를 피하기 위해 대원군을 강퇴 시켰다. 대원군은 일본에게 실컷 이용당하고 토사구팽(兎死狗烹) 신세가 된 것이다.

대원군이 청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는 사대주의자였다면 고종과 왕비 민 씨는 오매불망 러시아를 섬기는 친러주의자였다. 리훙장은 조선 정부에 『조선책략(朝鮮策略)』이란 책을 주어가면서 서양과 수교하여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하라고 조언했다. 이 와중에 고종은 느닷없이 러시아와 수교하여 리훙장의 훈수를 걷어차 버렸다.

고종이 러시아와 수교한 이유는 독일 정부의 비밀 공작원이었던 묄렌도르프의 감언이설 덕분이다. 독일 외무성으로부터 “러시아라는 곰을 동아시아의 목장으로 유인하라”는 극비 지령을 받은 묄렌도르프는 고종과 민 왕후를 꼬드겨 조러 수교를 성사시킨 공로로 러시아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

그 직후 고종과 왕비 민 씨는 러시아와 두 차례에 걸쳐 밀약을 추진했다. 1885년 제1차 조러 밀약은 고종이 묄렌도르프를 통해 러시아에 “청일 간에 전쟁이 벌어질 경우 조선을 확실하게 보호해줄 것, 그리고 5만~6만 명 규모의 조러 연합군 구성” 방안을 제안했다. 고종의 요구에 대해 슈페이에르 서기관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러시아가 조선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문제는 조러 수교와 조러 밀약이 당대의 패권국 영국을 크게 위협했다는 사실이다. 영국은 자신들의 패권에 도전하는 러시아를 전 지구적 차원에서 봉쇄하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을 수행 중이었다. 이 와중에 고종의 조러 수교와 밀약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대러 봉쇄망에 큰 구멍이 뚫린 것이다. 이것을 구경만 하고 있을 영국이 아니었다.

조러 밀약설이 폭로되자 영국은 함대를 보내 조선 영토인 거문도를 점령했다. 조러 밀약을 무효로 만들어 러시아가 조선으로 남하하지 못하도록 저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이를 “개의 목을 졸라 물고 있던 뼈다귀를 떨어뜨리게 하는 전략”이라고 평했다.

러시아와 손잡다가 왕비 시해

조선 정부는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점령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가, 5월 19일 영국 정부의 통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영국의 강력한 압박으로 인해 제1차 조러 밀약은 파탄이 났다.

조선을 향한 러시아의 남진이 저지되자 청나라는 위안스카이(袁世凱)를 통해 속방화 정책을 강화하면서 조선의 내외정에 집요하게 간섭했다. 자존심이 상한 고종과 왕비는 다음해인 1886년 8월 무렵 또 다시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한다. 이번에는 “조선왕조가 청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러시아 정부에 직접적인 보호를 요청했다. 심지어 고종은 러시아가 조선 해역에 함대를 파견하여 청의 압력을 제거해 줄 것을 제안했다. 이것이 제2차 조러 밀약이다.

제2차 조러 밀약은 민영익이 위안스카이에게 관련 사실을 밀고하는 바람에 그 전모가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왕비의 총애를 받던 민영익은 보복이 두려워 홍콩으로 도망을 갔다. 청나라는 제1차 조러 밀약설 때는 묄렌도르프에게 책임을 물어 그를 해임하고 소환했다. 제2차 밀약설이 터지자 이번에는 고종 폐위 계획을 추진했다.

고종은 강제 축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2차 조러 밀약을 건의한 조존두·김가진·김학우·김양묵 등을 체포하여 유배형에 처했다.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일은 국왕이 저질러놓고 청나라가 압박하자 신하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을 보고 “무고한 자를 벌한 행위”라며 고종을 격렬하게 질책했다. 러시아의 압력에 못이긴 고종은 조두순 등을 사면했다. 제2차 조러 밀약도 정보 누설로 허망하게 실패했다.

고종과 민 왕후의 러시아 짝사랑은 청일전쟁 이후 또 다시 폭발했다. 러시아가 주도하는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반납하는 모습을 본 고종은 또 다시 러시아에 손을 내밀었다. 이후 한반도는 러시아 세상으로 변했다.

일본은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희생을 무릅쓰고 청국과 싸웠다. 하지만 조선이 러시아와 밀착하여 청일전쟁의 근본 목적을 다 상실하자 특단의 조치를 강구한다. 일본 정부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소환하고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후임 주한 일본 공사로 임명했다.

서울에 부임한 미우라 고로는 1895년 10월 8일, 수십 명의 일본 자객을 비롯, 일본군 수비대와 거류지 담당 경찰관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으로 쳐들어갔다. 자객들은 민 왕후의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인아거일(引俄拒日) 정책의 몸통인 왕비 민 씨를 잔인하게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민 왕후 시해에 동원된 일본의 군국주의 단체인 천우협(天佑俠)과 현양사(玄洋社) 소속원들은 깡패나 부랑자가 아니라 고도의 지적 능력을 보유한 엘리트들이었다. 미우라 고로 공사와 함께 조선에 건너와 왕비 시해의 주역을 맡은 시바 시로(柴四郞)는 하버드대학과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1892년에는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행동대원으로 참가했던 낭인 출신의 영사관보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萬一)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으로 후에 브라질, 루마니아 전권공사를 역임했다.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는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라는 저서에서 민 왕후 시해 사건은 개인 차원이나 낭인들의 우발적인 살인사건이 아니라 러시아와 일본의 국익이 걸린 대결이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와 일본이 전면전으로 돌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이 왕비를 제거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러시아 황제의 허락 받아 대한제국 선포

왕비를 참혹하게 잃고 친일파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새벽, 왕세자와 함께 궁궐에서 탈출하여 서울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은 본인 의지라기보다는 러시아 병력의 지원 하에 주한 러시아 공사 스페에르와 베베르가 치밀하게 계획한 작전이었다. 일본이 왕비 시해로 도전하자 러시아는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응전한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가장 먼저 친일 각료 처단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탁지부대신 어윤중이 군중에게 타살되었고, 10여 명의 대신들은 일본의 도움으로 탈출, 일본으로 망명했다. 조선 국왕이 졸지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자 고무라 주타로(小忖壽太郞) 외상은 “만사는 끝장났다. 조선에서 우리 세력은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말았다”고 허탈해 했다.

아관파천 기간 중인 1896년 5월 말, 고종은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을 조선 대표로 파견하여 러시아 황제에게 조선을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삼아달라고 요구했다. 니콜라이 황제는 이를 허락했다. 민영환은 또 외무대신 로바노프, 재무대신 비테를 만나 러시아 군대의 조선 국왕 보호, 러시아 군사고문관 파견 등을 요청했다.

두 달 후인 7월 29일, 러시아는 푸차타 대령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교관단을 조선에 파견했다. 러시아 교관단은 조선의 궁성호위대를 훈련시켰고, 이 경비대는 1897년 5월, 환궁한 고종이 지켜보는 앞에서 러시아식 사열을 했다.

주조선 공사로 부임한 스페에르는 부산 앞 절영도에 러시아 해군 석탄기지 건설 추진, 러시아 목재·광산·철도회사 추진, 모든 미국인 고문관들을 해임하고 러시아인 고문관을 채용하도록 했다. 1897년 8월에는 13명의 러시아 장교가 추가로 조선에 파견되었으며, 10월에는 알렉세에프가 조선의 재정고문 및 총세무사에 임명되었다. 러시아 군사교관단은 궁성호위대를 훈련시킨 데 힘을 얻어 러시아군의 지휘를 받는 6000여 명의 조러 연합군 결성을 시도했다.

이 무렵 조선이 일사천리로 친러 정책을 추진하는 모습을 지켜본 주조선 미국공사 알렌은 “조선 문제는 다 끝났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와중에 비테의 주도 하에 추진되던 러시아의 한국 진출 정책은 만주 침투를 주장하는 외무대신 무라비요프와 육군대신 반노프스키가 득세하면서 만주 진출 전략으로 선회하게 된다.

1897년 12월 18일 러시아는 일본이 반환한 랴오둥반도의 요충인 뤼순(旅順)과 다롄(大連)항을 조차하면서 극동 지역에서의 부동항 확보에 성공했다. 이렇게 되면서 조선에 대한 전략적 관심이 크게 줄었고, 조러 연합군 창설 계획은 폐기됐다.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이 체결된 1895년부터 러일전쟁이 개전된 1904년까지의 10년은 한국 입장에서 보면 국가 개혁을 통해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조선의 국가 지도부는 그 기회를 허송세월하면서 일본, 미국, 러시아, 영국 등 외세를 끌어들여 국가 자존을 지키려고 발버둥 쳤다.

당시는 힘 센 자가 약한 자를 찍어 누르고 이권을 차지하는 것이 정의인 제국주의 시대였다. 외세는 산타클로스가 아니었다. 그들이 뭐가 아쉬워 농민 반란조차 스스로의 힘으로 제압할 수 없는 허깨비 조선의 독립을 허락하겠는가?

잃어버린 10년

역사학자 이정식 교수는 한국 근대사에서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를 수 있는 이 시기를 조선의 국가 지도부가 유익하게 사용했다면 한국의 미래는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극동과 세계의 역사도 상당히 변했을지 모른다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고종이나 조선 지도부 인사들에게 있어 국가나 백성의 안위는 남의 일이었을 뿐이다. 해외 외교사절들은 한국을 크게 불신했는데, 근본 원인은 고종의 한심한 통치능력 덕분이다. 서양 외교관들은 고종을 통치자로서의 자격이 완전히 결여된 인물로 판단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2년여 피신했다가 환궁하여 1897년 2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에 등극했다. 일부 학자들은 고종과 왕세자가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치듯 거처를 옮긴 1896년의 ‘아관파천’을 항일 독립투쟁을 위한 ‘국내 망명정부의 수립’으로 해석하여 ‘아관망명’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든 말든, 중요한 것은 고종이 또 다시 러시아를 끌어들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이다. A. 말로제모프의 『러시아의 동아시아정책』(지식산업사)에 의하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자신의 목숨을 의탁할 정도로 우호적인 친러 정책을 수행한 대가로 러시아 황제로부터 “대한제국 공포와 황제 칭호 사용을 인정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대한제국 선포와 고종의 황제 등극은 독자적 결정이 아니라, 러시아 황제의 허락을 받아서 행한 일이라는 뜻이다.

허동현 경희대 교수는 대한제국의 출범은 고종의 적극적인 친러 정책의 결산이라고 주장한다. 러시아는 뤼순과 다롄 항구를 조차하고 동청철도 건설을 통해 만주에 집중하면서 한반도에서 손을 떼려 했다. 이런 움직임을 간파한 일본이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자 1902년 평양에 ‘북쪽 지방의 수도’인 서경(西京) 건설 사업에 착수했다.

황제 고종은 국력이 고갈되어 빈사상태에 놓여 있던 그 무렵, 왜 뜬금없이 평양에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 했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이윤상의 논문 ‘대한제국기 국가와 국왕의 위상 제고사업’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식은 러시아는 1900년 7월 일본에게 “조선에서 러일 양국의 세력범위를 확정하자”고 제안했다. 앞서 1896년 북위 39도선(혹은 38도선)을 중심으로 남북 분할을 제기했던 일본 정부가 이를 수용하려 하자 일본의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 등은 “우리가 조선 전체를 독자적으로 차지해야 한다”면서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만약 일본이 이 안을 수용했다면 한국은 1945년이 아니라 1900년에 남북이 분단되어 러시아와 일본의 보호령으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고종은 혹시라도 제기될 지도 모를 일·러의 조선 분할에 대비하여 북부지방의 궁궐인 서경 건설에 나선 것이다. 1902년에는 자신의 등극 40주년 기념행사에 각국의 특별사절단을 초청하기 위해 덕수궁 내에 서양식 건물을 짓는 등 성대한 준비를 했지만, 재정 고갈로 행사는 취소됐다.

124년 후의 대한민국

2018년 7월 25일.

문재인 정부는 가동 중단시켰던 원전 5기의 긴급 가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철부지 같은 탈(脫)원전을 외친 것이 엊그제 일이다. 멀쩡한 원전을 조기 폐쇄하고, 나머지 원전은 가동 중단 시켰는데, 1년도 채 안 되어 석탄․LNG 발전소로는 폭염 하 전력 수요를 감당 못할 상황이 닥쳤다.

문재인 정부의 평소 신념대로 태양광으로 해결하면 될 것 아닌가. 7월 염천의 작렬하는 태양열에도 불구하고 태양광으로 국가 전력문제를 말끔히 해결할 수 있다는 희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블랙 아웃(black-out) 위기에 직면한 문재인 정부는 체면 불구하고 원전에 손을 내밀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오기를 부리다 탈이 난 것이 원전뿐이라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난맥상은 외교 안보로 주제를 옮기면 더더욱 문제가 심각해진다. 문재인 정부의 종북(從北)․친중(親中)․반미(反美)․혐일(嫌日) 외교는 이제 누구도 말리기 힘든 점입가경의 황홀경에 돌입했다.

이 정부의 망국적 외교 정책이 조금만 더 농밀하게 진행되면 대한민국은 자연스럽게 해체․소멸 내지는 자살에 이른다는 우려는 상상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124년 시차를 두고 애오라지 패권국 편이 아니라 패권 도전국 쪽에 줄을 서는, 동일 패턴의 망국 외교가 고스란히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패권국은 미국이다. 문재인 정부는 일본과는 이미 파탄이 났고, 미국과의 동맹마저 해체한 다음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 편에 붙으려는 외교정책을 과감하게 구사 중이다. 이러한 시대착오적 외교의 종착역은 망국이라는 역사의 교훈을 알고나 있는지….

최근 들어 국내외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오는 9월 9일 방북하여 또 다시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소문의 진위 여부는 좀 더 시간이 흐르면 명확하게 밝혀지겠지만, 설마 하다가 달력을 보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9월 9일, 이른바 북한이 주장하는 건국절 아닌가.

대한민국 건국 70주년을 기념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건국 자체를 부정하는 듯 한 발언으로 물의를 빚는 인물이 문재인 대통령이다. 이런 인사가 북한 건국 70주년 행사에 참석하고,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할 경우 한반도에서 과연 일이 벌어질 것인가? 120년 전 조러 수교, 제1차 조러 밀약, 제2차 조러 밀약, 을미사변의 정황이 괴담처럼 떠오르는 오싹한 여름이다.

러일전쟁 당시 AP통신 특파원이었던 윌라드 스트레이트는 “아시아에서도 한국은 구제가 불가능한 나라”라면서 “고종은 열강 사이의 분열을 이용하여 독립을 유지하려는 나약한 거간꾼이고, 양반 계층은 음모를 통해 사적(私的) 이익을 추구하는 사익(私益) 집단”이라고 강력 비판했다.

그로부터 120년 후, 문재인 대통령이 이끄는 대한민국은 과연 “구제가 불가능한 나라”라는 비난과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위치에 올랐다고 믿을 수 있을까? 조선을 망쳐먹은 군주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인조의 발언을 소개하는 것으로 칼럼을 마무리한다.

“나라는 반드시 자신이 해친 뒤에야 남이 해치는 법이다.”

김용삼 객원 칼럼니스트(박정희기념재단 기획실장/전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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