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전 눈치만 살피면서…주견 없이 운전자커녕 조수노릇도 못해" 훈계
文 "김정은-트럼프, 약속 안지키면 국제사회 엄중심판" 발언 계기인듯
新베를린구상에 "낮도깨비같은 소리", '국제사회 심판' 발언엔 "감히 입 놀려"
"중대한 시기에 설쳐대지 말라"
北核 외면때문에 나온 '방관자론' 표현 빌려 "美와 자주적 결별하라" 종용한 격
文정권 통일부는 입장표명 피하면서도 "판문점선언 차질없이 이행" 되풀이

문재인 대통령이 미·북간 중재자를 자임하며 내세운 '한반도 운전자론'에 대해 북한 김정은 정권이 7개월여 만에 "주제넘는 허욕"이라며 비난을 재개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북측 대표단 초청, 4.27 판문점회담, 6.12 미북정상회담으로 남북관계 훈풍을 자평하던 문재인 정권이 정작 북측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은 격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20일 '주제넘는 허욕과 편견에 사로잡히면 일을 그르치기마련이다'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화해평화분위기를 푼수없이 휘저으며 관계개선을 저해하는 온당치 못한 발언들이 때없이 튀어나와 만사람이 미간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최근 남조선 당국(문재인 정부)는 여러 계기에 저들이 굳건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공동의 인식 밑에 북의 겨울철올림픽경기대회 참가와 고위급 특사 내왕, 남북수뇌회담과 북미수뇌회담에 이르는 역사의 대전환을 이끌어냈다고 사실을 전도하며 체면도 없이 자화자찬하고 있다"고 들었다.

또한 "'주변국들과 연쇄적인 외교로 북핵문제 해결에 대한 국제적인 지지분위기를 조성했다'고 청을 돋구던 끝에 나중에는 '북과 미국이 국제사회 앞에서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주제넘는 발언도 늘어놓았다"면서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대한 맹목과 주관으로 일관된 편견이고 결과를 낳은 엄연한 과정도 무시한 아전인수격의 생억지며 제 처지도 모르는 희떠운 '훈시'라고 평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난했다.

사진=7월20일자 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 6면 논설
사진=7월20일자 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 6면 논설

로동신문은 "사태의 심각성은 이것이 일부 언론이나 학자의 견해가 아니라 바로 남측의 '국책'에 따른 고의적인 여론 확산이며 고위당국자들이 그 주창자로 나섰다는 데 있다"며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남조선 당국의 사유의 기초이고 발언의 논거이며 행동의 담보인 '한반도운전자론'에 대해 재조명하고 그 실체를 해보해 볼 필요를 느끼게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6.12 미북정상회담 개최 등을 북한 정권이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대범한 조치"를 통해 주도한 것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이 엄연한 현실은 남조선 당국이 '한반도운전자론'을 꺼내든 것 자체가 얼마나 '비정상'인가를 백일하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고 비난 수위를 높였다.

특히 "원래 운전자라고 하면 차를 몰아갈 도로를 선택하고 운전방향과 속도 등을 스스로 판단하고 조절해나가는 사람을 말한다"며 "남조선 당국이 북남관계 개선과 발전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자기 주견을 가지고 제 마음먹은대로 실천해 나가고 있다'는 말이냐"고 훈계했다.

로동신문은 거듭 문재인 정권을 겨냥해 "입버릇처럼 외우는 한반도운전자론이나 북남관계발전과 평화를 위한 '주도적역할론'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상식 이하의 궤설인가 하는 것은 판문점선언 이후 그들 자신이 취한 행동만 놓고서도 잘 알 수 있다"고 쏘아붙였다.

"말로는 판문점선언의 이행을 떠들고 있지만 미국 상전의 눈치만 살핀다"며 "북남사이에 해결해야 할 중대 문제들이 말꼭지만 떼놓은 채 무기한 표류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북핵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대북제재를 유지해야 한다', '대북제재의 틀 안에서 가능한 북과의 협력 방안을 모색하겠다' 등 정부 측 발언을 문제 삼는 한편 "주변국들을 찾아다니며 대북 제재·압박공세의 지속에 대한 (미국과 일본 등의) 국제적 지지를 구걸한다"고 불만을 쏟아냈다.

"운전자는커녕 조수노릇도 변변히 하지 못한다"며 "현실에 대한 똑똑한 주견도, 대세에 대한 초보적인 판단감각도 없이 헤덤벼치는 남조선 당국의 행태가 얼마나 답답하고 민망스러웠으면 서방언론들까지 '운전자론이 아닌 방관자론', '몽유병자의 장미빛 환상'이라고 조소하고 있겠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신문은 나아가 문 대통령이 내세운 신(新)베를린 구상도 거론하며 "현 조선반도의 대화국면이 그 구상이 현실화된 것이라고 낮도깨비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더욱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갑자기 재판관이나 된 듯이 조미(북-미)공동성명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그 누구가 '국제사회로부터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감히 입을 놀려댄 것"이라며 "허황한 운전자론에 몰입돼 쓸데없는 훈시질을 해대는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남조선 당국의 말과 행동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다"면서 "이제라도 제정신을 차리고 민심의 요구대로 외세추종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주통일의 길, 우리민족끼리의 길에 나서야 한다"고 종용했다.

그동안 운전자론은 정부가 주적(主敵)인 북한에 직접적인 핵 폐기 압박 주체로 나서지 않고 혈맹인 미국 사이에서 제3자를 자처하고, 실질적으로 북한 정권 편을 드는 분위기가 짙어 자유진영의 비판 대상이 돼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북한 쪽에서 '외세'라고 칭하는 자유진영 미국, 일본과 문재인 정부가 관계를 단절하고 북측에 적극 유착하지 않는다며 '방관자론'이라는 표현을 빌려가며 비난한 것이다.

다만 이번 비난논평의 결정적 계기는 지난 13일 싱가포르 현지에서 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싸잡아 "만약 국제사회 앞에서 두 정상이 직접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국제사회로부터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발언한 것으로 보인다.

자유진영에서는 문 대통령이 혈맹국 지도자인 트럼프 대통령을 '심판 대상'으로 언급해 비판 여론이 일었지만, 북측에서는 김정은을 같은 심판 대상으로 거론한 것으로 간주해 반발했다는 해석이다.

사진=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 2017년12월22일자 8면 논설
사진=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 2017년12월22일자 8면 논설

로동신문이 문재인 정권의 운전자론을 비난한 것은 지난해 12월22일 "자주와 사대, 애국과 매국 사이에 다른 길은 없다"는 제목의 논평 이후 7개월 만이다.

당시에도 북측은 "남조선 당국자(문 대통령 지칭)는 미국 상전의 강박에 굴복하여 친미사대와 외세의존에 열을 올리면서 민족의 이익을 깡그리 팔아먹고있다"면서 "그 무슨 당사자론, 운전자론을 운운하면서도 실제로는 외세에 자주권을 깡그리 내맡긴채 '조선반도문제를 해결할 힘도, 합의를 이끌어낼 힘도 없다'는 장탄식만 늘어놓아야 하는것이 바로 남조선당국의 서글픈 처지"라고 비난한 바 있다.

한마디로 '미국과 자주적으로 결별하라'는 입장을, 북측은 남북관계 훈풍과 무관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문재인 정권 통일부에서는 로동신문의 문 대통령 비난 관련 별다른 비판을 내놓지 않아 '대북 저자세의 연속'이라는 의혹이 제기된다.

이유진 통일부 부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노동신문의 문 대통령 발언 비난에 대한 통일부 입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북한 매체의 보도에 대해서는 저희가 특별히 언급하거나 평가할 내용이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거듭된 질문에도 "북한 매체 보도에 대해서 저희가 일일이 언급하거나 평가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린다"면서 "남북 간 정상이 합의한 판문점 선언이 차질없이 이행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다해 나가겠다"고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자유 언론'이 없는 북한 특성상 관영·선전매체들의 입장이 곧 노동당의 입장임에도, 국내 언론계와 같은 일개 매체 보도 정도로 치부하는 건 고의적인 답변 회피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기호 기자 rlghdlfqjs@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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