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투쟁'한 운동권에 진 마음의 빚…30년 가까이 이어져
대학 졸업한 뒤 한참 뒤 다시 방송대 입학...이승만 주제로 졸업논문 쓰면서 감동
엉터리 어린 교수들, 경험하지도 않은 이승만을 악마로 묘사
50대 접어들어 종북 운동권 논리 조잡하다는 것 분명히 인식

정인희 씨.
정인희 씨.

내가 좌파였는지 우파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386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좌파였던 것 같다고 최근에 스스로 진단을 내렸다. 지금은 50대 중반으로 586이 되었는데 이번 기회에 나의 이념의 흐름을 정리해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 <좌파탈출기> 에 응모하기로 했다. 제목이 말해주는 것 같은 드라마틱한 탈출기는 아니지만 좌파성향에서 우파성향으로의 잔잔한 탈출기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나는 1962년 충청북도에서 3남 1녀의 막내딸이자 외동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과수업에 종사하셨고 동네에서는 우리집을 부자라고 했다. 1969년에 초등학교를 입학해서 국민교육헌장을 외웠고 교실에 박정희대통령의 초상화를 처음 보았다. 1980년 10월 26일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 내 머릿속에 대통령은 박정희 한분 인줄 알았다. 그날 여학교 친구들은 목놓아 흐느꼈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드디어 이 군부독재시대가 끝나게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친구들은 울지 않는 나를 냉혈한이라고 비난했었다. 나도 우는척이라도 해보려했는데 역시 마음이 슬프지 않으니 억지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광화문에 있는 학교를 다녔는데 미대사관도 가까이 있었고 법원도 있었고 MBC 방송국이 있어서 그런지 탱크가 학교 앞에 세워졌다. 1979년엔가는 카터대통령이 미대사관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교실의 창문을 열지 못하게하고 커튼을 쳤던 기억이 있다.

1981년 나는 신촌에 있는 여자대학교에 입학했다. 전두환 시대가 도래했다. 군부통치가 이제 끝나나보다 했더니 또다른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대학 시절 내내 사복경찰이 교내에 있었고 서클할동을 할 때면 경찰들이 자료들을 검열하곤 했다. 여자대학이라 데모가 심했던 것은 아닌데 가끔씩 교내에서도 데모가 있었고 옆학교인 연세대학교에서 데모가 있는 날이면 최류탄 때문에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했다. 나는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늘 운동권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나는 현실적인 문제로 또 무식해서 운동권에 가담하지 못하고 있지만 ,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면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는 친구들이 너무 멋있어 보였고 정의로와 보였고 그들의 숭고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들은 나보다 차원이 한단계 높아보였다. 그들에게 빚진 마음은 내가 586세대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87년 졸업후 취직을 하였는데 직장의 위치가 종로구였다. 6월 29일 직장에서 점심 먹으러 광화문으로 나갔다. 6.29 선언의 역사적 현장에 있었다. 정말 기뻐했고 나는 성인이 되어 내 생애 최초로 대통령 선거에 투표를 했다. 김영삼을 찍었지만 노태우가 당선됐다. 다음 투표에서 나는 또 김영삼을 찍었고 당선됐고 너무나 기뻤다. IMF가 오고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난 망설이다가 김대중선생을 존경하지만 너무 전라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 싫어서 이회창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의 햇빛정책에 나는 환호했다. 순안공항에 마중나온 김정일에 대해서도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정말 이 나라에 통일이 오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 청문회가 열렸는데 너무나 독보적으로 청문회 준비를 잘한 노무현 의원이 좋아서 그가 나중에 대통령 후보에 나오면 반드시 그를 찍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주영 회장을 향하여 정경유착이 아니냐고 다그치며 물었고 정 회장은 땀을 뻘뻘 흘리며 노무현의원 앞에서 당황해했다. 그런 장면이 정말 통쾌했다. 재벌이 이 나라 경제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였다. 왜그랬는지 모르지만 주변에서 다 재벌이 나쁘다고 했다. 그런데 정말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올줄이야 ! 너무 기뻣지만 나는 망설이다가 또 이회창 후보에게 표를 던지고 말았다. 주변에서 말렸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당선되면 당시 난 의료계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좋지 않다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나라는 경제성장과 함께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자랑스런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지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나에게 최초로 의식화 교육을 시켜준 사람은 오빠다. 내 위로 세명의 오래비가 있는데 이들은 밥먹으면서 정치 얘기를 자주하곤 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세계지도를 보면 공산진영은 빨간색으로 민주 진영은 파란색으로 표시되었다. 대한민국은 중국과 소련과 북한 밑에 간신히 파란색으로 간당간당하게 매달려있었다. 오빠는 앞으로 소련이 남하해서 우리나라는 빨갛게 공산화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어린 나로서는 다소 무섭기도 했다. 초등학교 5~6학년 즈음에 대학교 사학과를 다니던 큰오빠는 나를 앉혀놓고 강의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매번 약속을 어기고 삼선개헌인 사사오입개헌을 통하여 영구집권하려고 하여 민주화에 역행하였다. 게다가 김구 선생을 비롯한 정적들을 다 청부살인한 잔인무도한 사람으로 권력욕심에 취한 사람이다. 박정희 역시 5.16 쿠데타를 하고 민정이양한다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 역시 유신개헌을 통해서 장기집권을 꾀하는 탐욕스러운 사람이다. 뇌가 순수하던 나에게 이런 오빠의 강의는 머리 속에 그대로 박혀서 아주 오래도록 변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반공교육을 시켰지만 그것은 군부독재 정부에서 시키는 거짓말로 받아들이고 하나도 믿지 않았다.

또 한사람은 조그만 보습학원의 선생님이었다. 교육대학을 나온 분이지만 장애가 있어 교사로 임용받지 못한 선생님은 동네 초등학교 학생들을 모아놓고 과외를 했다. 그 선생님 말씀도 오빠의 생각과 거의 일치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훌륭한 점은 한가지 밖에 없는데 그것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한다고 말하고 실제 하야를 한 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훌륭한 점도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았을 때에도 연설을 끝까지 마쳤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순수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100% 믿게 되어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6.25 전쟁이 북침이라는 설이 돌았고 내 귀에 솔깃하게 들어왔다. 당시 루이제 린저의 ‘북한 방문기’가 인기가 높았다.김대중 대통령의 저서들은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나는 운동권 학생도 아니었고 운동권 공부를 해본적도 없지만 마음으로 그들을 한없이 응원했다. 공산주의와 북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그러던 중에 대학생 때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존경하는 목사님은 일제 강점기 때에 신사참배를 피하여 만주로 생명을 건 탈출을 했던 분이고 여순 반란 사건 때에는 목사라는 이유로 또 그분의 집안이 지주 집안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와 아내가 공산당의 총에 눈앞에서 죽는 것을 목격한 분이다. 실제 경험담이고 공산주의는 기독교 사상에서 나왔는데 아이러니칼하게도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이념이라고 설교하셨다. 정말 공산주의는 나쁜 것이라고 울면서 설교하셨기에 나는 공산주의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작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386세대에서 586세대에 접어들던 50대 초반에 나는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내가 배운 학부는 이과계통이어서 인문학 소양이 너무 부족하다고 여겨서 직장을 다니면서 공부를 하였다. 공부는 재미있었고 한국사며 서양사를 새롭게 배웠다. 몇십년 만에 배운 공부는 내가 예전에 배우던 것과는 사뭇 달라져있었다. 6.25 전쟁에 대한 묘사는 맥아더 장군 얘기도 없고 UN군 개입 얘기도 없고 인천상륙작전이나 중공군 개입에 대한 설명도 없었다. 다만 남과 북이 이념의 차이로 전쟁을 했고 북한은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건국이고 남한은 그냥 정부수립이었다. 5.18 사태는 어느새 민주화가 되어있었다. 다른 역사적 사건은 내가 어릴 때 일이라라서 오빠나 선생님이 주입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5.18은 나도 생생히 기억하는 사건이라서 나만의 견해가 있었다. 왜 전두환 장군이 광주를 학살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이해 할 수가 없다. 전두환 장군이 그럴 필요가 없어보이고 본인도 아니라고 하지 않는가?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교수들은 경험하지도 않은 역사적 사건은 엉터리로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사학과 교수들은 이승만을 거의 악마로 묘사하고 있었다. 백년전쟁이라는 비디오를 유튜브로 시청하라고 했다. 처음 비디오를 보자마자 내 양심의 소리는 이 것은 누군가 이승만을 무조건 나쁘게 묘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제작된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후 박근혜 대통령 탄핵사태가 발생했다. 그 전에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나는 기독교인이고 성경을 진리로 믿기 때문에 동성애는 죄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의료인으로서 동성애자들이 에이즈에 걸려서 처음 진단 받을 때에 막 울던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도덕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동성애는 당연히 반대한다. 오바마와 힐러리가 동성애 합법화를 아메리카의 승리라고 말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트럼프대통령이 막말을 한다고 하는데 난 영어를 못해서 막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가 제시한 정책은 친기독교정책이라서 내게 엄청 좋아보였다.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트럼프를 나쁘다고 했고 내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도 미국에 살다온 분으로 트럼프가 싫다고 대놓고 설교중에 말하는데 난 이해가 안되었다. 이번에 트럼프대통령이 우리나라 국회에서 한 연설을 듣고 난 너무 감동받아서 울뻔했다. 나는 기독교인으로 성경을 소지만해도 수용소로 보내는 북한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설명을 듣고 난 이 분이 우리나라를 통일 시켜줄 분으로 믿게되었다.

탄핵 사건이 난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것은 인민재판이고 인격살인이고 거짓탄핵이라는 것이 눈에 훤하게 보였다. 난 언젠가부터 뉴스를 보지 않는다. 뉴스를 보더라도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보게된다. 어릴때처럼 오빠가 또는 선생님이 주입해주는 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일들이 성경적으로 진행이 되고 있는지 성경의 잣대를 적용해본다. 탄핵 사건으로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념논쟁이 팽팽했다. 내가 오랫동안 존경해왔던 운동권 사람들과 얘기하는 과정에서 이 사람들의 논리가 너무 빈약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엉터리 뉴스를 진실로 믿고 지금까지 과격한 투쟁을 해왔다. 내가 생각하는 진리 또는 진실은 성경이고 기독교 가치관이다. 정직해야하고 기본적으로 사랑과 공의가 바탕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박근혜대통령에 대한 거짓 뉴스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믿었다. 아마도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히틀러 시대에 나찌에 동조한 사람들은 그들도 유대인이 싫었기 때문에 히틀러에게 동조한 것이다.

탄핵 사건을 통해 나는 좌파에 대한 흠모와 막연한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가지는 기독교적 가치가 진리이고 내가 붙들어야할 것이고 이 사회에 실현해야할 가치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오빠의 의식화교육이 틀린 것임을 방송대 공부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승만을 주제로 졸업논문을 쓰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나라 종북 운동권 좌파의 논리는 알고보면 조잡하다. 우파들은 너무 공부를 하지 않는다. 좌파든 우파는 진실과 사실을 토대로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요즈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댓글도 달고 SNS 로 퍼나르는 일도 하고 있다. 진실과 접하게 될 때에 잘못된 이념에서 돌이킬 수 있다.

정인희(56·계약직 공무원) winbird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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