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건국된 후(1948년: 혹자는 건국일을 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일로 잡기도 하는데, 임시정부는 명목상 이름만 정부라 붙였을 뿐 실제 정부가 아니고, 아무리 ‘그건 정부였다’라 우긴다 해도 ‘임시’라는 팻말에서 나타나듯 제대로 된 정부가 아님을 스스로 자인했기 때문에 논의거리가 안 된다. 솔직히 ‘정부’란 팻말도 붙이기 어려운 것이, 대표성이 없는 청년 애국단체에 불과했기 때문에 절대 그 허울에 현혹되면 안 된다,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 언급한 현재의 헌법 전문도 고쳐야 한다. 임시정부엔 법통이 없다) 우리에게 11명의 대통령이 있었다. 그 가운데, 윤보선 대통령은 내각책임제하의 대통령이므로 논외로 하고 최규하 대통령은 과도정부에 해당되므로 역시 논외로 하면, 제대로 대통령이라 칭할 이는 9명뿐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이승만, 박정희,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 중에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했다.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퇴임 후 감옥에 갔고, 노무현 대통령은 자살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현재 까딱하면 감옥에 갈 상황에 몰리고 있다. 연로했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일찍 타개해서 험한 꼴을 면했지만, 아직 살아들 계셨으면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 정도 되었으면, 대통령 중심제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대통령 중심제의 치명적 문제는 일단 대통령이 대체로 국민의 절대적 신임을 못 얻는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여러 후보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50% 이상의 득표를 얻는 후보자가 별로 없다. 요번 문재인 후보도 겨우 40% 정도 얻지 않았는가? 국민의 절반 이상은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임기 초에 여론조사에서 70~80%의 지지율을 얻었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공신력이 없는 통계이고, 나중에 10% 아래로 지지율이 떨어진다 해서 자진 사퇴할 대통령이 아무도 없는 관계로, 결국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못 받는 대통령이 끝까지 임기를 채우려 한다는 게 문제다. (혹시 엉터리 PC 같은 걸로 탄핵 시킬 수도 있겠지만, 과정도 쉽지 않고 아마 후유증을 견디는 것도 만만치 않으리라. 조만간 문재인씨 입에서도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우리 형편에 대통령 중심제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은 일찍부터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임시정부도 처음에는 내각제였다(국회의원도 없는 상황에서 내각제 운운하는 게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본래 대한제국이 입헌군주제 하의 내각책임제였으므로 그 전통을 이으려 한 것 같다). 이승만씨가 초대 수반으로 선출되었지만, 실권 없는 수반은 싫다고 우겨서 결국 임정을 대통령 중심제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탄핵된 후 김구 정권은 다시 내각제로 돌아간 것 같다. 당시에 두 제도의 차이는 임시정부 내 예산을 집행할 때 정부 수반이 독단적으로 결정하느냐 동지들(내각)과 함께 의논해 결정하느냐 정도였던 걸로 보인다.

4.19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독단에 혼쭐이 난 정치인들은 내각제를 채택하였다. 대통령은 대외업무와 군사를 담당하고 총리가 내치를 담당하는 소위 이원집정부제였다. 그러나 이는 우리에게 최악의 정치제도임이 드러났다. 같은 민주당이었지만, 신파 구파로 나뉘어 있던 두 사람은 이권 다툼에 휘말려 책임 있는 정치를 못했다. 요즘 정치인들 중 일부가 이런 개헌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건 정말 우리 상황에선 끔찍한 일이다. 대통령과 총리가 같은 당에 속해 있을 때도 파벌싸움을 벌여 나라를 파국으로 몰았는데, 만약 다른 당에서 나온다면 저들이 화합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럼 둘 다 같은 당에서 나오면 괜찮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소외된 쪽에서 현재보다 두 배 더 큰 반발심을 갖고 극한 반정부 투쟁을 벌일 게 뻔하다. 예컨대, 대통령과 총리가 모두 경상도에서 나온다면? 아니면 둘 다 전라도에서 나온다면? 둘 다 보수 진영에서 나온다면? 둘 다 진보 진영에서 나온다면? 어허, 이런 악몽이!

그러면 대통령 중심제와 내각 책임제 둘 다 안 된다는 뜻일까? 딱 한 가지 돌파구가 있다. 그건 입헌군주제이다. 이 제도는 현대 민주주의를 처음 시작한 영국에서 채택한 제도로, 민주정치 체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본래 국왕이 있던 유럽에선, 혁명을 거친 몇몇 나라를 제외하곤 대부분 국가들이 이 제도를 채택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반면에 신대륙에 나라를 세운 미국엔 왕이 없었다. 그리하여 대통령 중심제란 새로운 정치체제를 도입하였다. 남북 전쟁 같은 큰 갈등도 있었지만, 미국은 내부적 단결을 이뤄내면서 세계 최강대국으로까지 자라났다. 자유와 평등, 거기에 경제적 부와 강력한 군사력. 세계에서 부러워하지 않을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미국 독립 후 혁명을 통해 왕정을 뒤엎은 프랑스를 비롯해 수많은 나라들이 미국을 흉내 내보려 했지만, 성공한 나라는 별로 없다. 솔직히 말해 이번 탄핵 사건에서 나타났듯이 우리나라 역시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면 미국은 어떻게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대통령 중심제를 끌고 나갈 수 있었을까? 학자들 간에 여러 견해가 있겠지만, 신학자적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 건국에 크게 기여했던 프로테스탄트 정신, 즉 기독교 정신이 지금까지 미국 정치 체제를 이끌어왔다 하겠다. 미국 대통령은 취임 선서를 할 때 아직도 성경에 손을 얻고 맹세를 한다. 미국의 모든 지폐에는 In God we trust라는 신앙 고백이 담겨 있다. 미국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서 있는 나라다. 비록 자유와 관용의 정신에 따라 타 종교를 억압하지는 않지만, 미국의 국교는 기독교이다. 심지어 망나니 같은 트럼프 대통령도 스스로 독실한 장로교인으로 자처한다. 비기독교인은 절대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없다.

여당과 야당이 모두 기독교 정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정당들은 웬만해선 레드 라인(red line)을 넘지 않는다. 설사 최정상을 권력을 가진 대통령일지라도, 자기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의 심판은 국민들을 통해 이뤄진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부정한 짓을 하지 못한다. (대신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옳은 일이라 여겨지면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이루려 한다.) 유럽에서 이원집정부제를 하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도 기독교 정신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2공화국 같은 상황에 몰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기독교인 수가 자꾸 줄어들어 기독교 정신이 퇴색되는 가운데 미국의 위기를 맞고 있는데, 미국 지폐에서 신앙 고백이 사라지는 날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조만간 나올 것이다), 미국은 대통령 중심제 채택한 것을 후회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독일과 프랑스는 미국만큼 종교적 다양성이 심하지 않아 그 기간이 좀 길어질 수 있지만 그래도 머잖아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만약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기독교 일색의 국가였다면, 해방 후 대통령 중심제를 택해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제헌의회 의원들이 기독교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국민들 가운데 기독교 비율은 5%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 기독교조차 상당 부분이 현실 도피적이거나 구복신앙적인 즉, 부패적 요소를 지닌 비정상적 신앙을 갖고 있었고 미국 기독교와 같은 자유, 평등, 박애, 헌신의 정신을 결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내 토양 여건을 생각지 못하고 미국산 민주주의 나무를 억지로 우리나라에 심으려 하는 바람에, 우리나라엔 지금까지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면 대통령 중심제도 안 되고 이원 집정부제도 아니라면, 우리나라에 가장 적합한 정치제도는 무엇일까? 앞에서 제시하였듯이, 입헌군주제 아래서의 내각책임제이다. 이 말에 어떤 이들은 “일본을 따라 하자는 거냐?”라며 발끈할 수도 있다. 그렇다. 일본을 따라 하자는 것이다. 중국 등소평이 흑묘 백묘론을 펼치며 자본주의를 도입해 중국을 개혁해 지금의 강대국으로 세웠는데, 우리가 이 마당에 무슨 자존심을 부릴 것인가? 나라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중국식 독재 체제를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자유를 맛본 우리로선 죽음보다 싫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하고 얄밉더라도 일본을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

일본은 국교로 내세울만한 종교가 없다. 대신 국왕이 살아있는 신이다. 일본에선 여당이나 야당이나 국왕의 눈치를 본다. 왕이 정치 전면에 나서는 일은 거의 없지만, 현 정권에 대해 호의와 혐의를 나타낼 수 있는 기회는 많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늘 머리에 왕을 이고 살아간다. 정부뿐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왕을 머리에 이고 산다. 그래서 우리나라 노인들은 무례하고 오만하지만(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은 그렇지 않다), 일본의 노인들은 겸손하고 예절 바르다. 언론은 왕실을 철저히 보호하고, 왕실은 국민들에게 흠결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극도의 절제된 삶을 산다. 그래서 국왕은 나라의 어른으로 존경받고, 국민의 귀감이 된다.

우리나라에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이 뭘까? 바로 나라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줄 수 있는 어르신이다. 온 나라가 미쳐 날뛸 때, 손을 뻗어 저들을 진정시키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지를 생활로 보여줄 수 있는 귀감이 필요하다. 대통령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대통령이 나서면, 반대 정당의 반발만 사고 선거용이란 빈축만 살 뿐이다. 그렇다고 일제시대 안창호 선생님이나 이상재, 조만식 같은 재야의 인사들이 있어서 그런 일을 담당할 수 있을까? 그 역시 쉽지 않다. 위의 언급된 분들은 모두 기독교 계통의 인사였기 때문에 불교 등 타종교인들에겐 외면 받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기독교 신자는 20% 남짓이다. 거기엔 사이비 기독교인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기독교 위주로 국민 의식을 개선하려는 시도는 쉽지 않다. 100년이 지나도 기독교가 국민의 50% 이상을 차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일본식 국왕제도를 벤치마킹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입헌군주제에 대해 “시대착오적” 발상이라 폄하한다. 왜 이것이 시대착오적이란 말인가? 현재 세계의 1/4에 가까운 나라들이 채택하고 있는 “살아 있는” 제도인데 말이다. 더군다나 불과 100년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제도이다. 우리에게 필요하면 없는 제도도 만들 판에 과거에 있던 것을 되살려 쓰는 게 뭐가 잘못인가?

물론 많은 우리 국민들은 조선 왕조에 대해 나쁜 선입견을 갖고 있다. “임금이 오죽 못났으면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을까? 그런 임금은 생각만 해도 싫다.” 이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조금 이해심을 갖고 볼 필요는 있다. 당시는 전 세계가 제국주의로 미쳐있던 시대였다. 심지어 신사적 태도를 견지하던 미국까지도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던 때였다. 약소국은 아무리 훌륭한 정치 지도자가 있어도 강대국에 먹히던 때였다. 한때 막강하던 중국마저 만주를 일본에게 빼앗기고, 중일전쟁에서 거의 전 영토를 일본에게 내어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조선왕실을 되살려 하는 절대적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불법 병탄되었다. 1965년 맺어진 한일협정 2조에서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렇게 한일합방이 무효화되었으니, 우리나라는 한일합방 이전으로 돌아가야 당연하다. 예컨대 A라는 사람이 속임수와 억압적인 방법으로 멍청한 B사람 소유의 집을 차지했다고 치자. 그런데 법정에서 그 억지 매매 계약이 무효라고 선고되면 그 집을 본래 소유자인 B에게 돌려줘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가 멍청하니까 옆집 사람에게 준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이 역시 억지 매매계약 못지않은 불법이 된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이런 잘못을 범해왔다. 그래서 나라가 이렇게 혼란스러워졌고 6.25라는 큰 불행도 겪은 것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불법계약이 이뤄진 지 겨우 100여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 왕실 자손들이 많이 살아 있다. 형식적이지만 대한황실 황제도 추대되어 있다. 이미 늦었다고 말하지 말자.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는 1500년대에 외국 식민지가 되었다가 1957년에 독립했고, 400년이나 지난 후에 국왕을 세워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이 나라는 세습제가 아닌 5년마다 종족마다 왕을 내세우는 특이한 제도를 갖고 있는데, 우리라고 못할 게 무엇인가? 허수아비라도, 필요하면 세워야지.

우리는 보수주의자들이다. 과거의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보수주의자들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디까지 보수해 보았는가? 박정희 때까지인가? 이승만 때까지인가? 기왕 가는 김에 조금 더 가자. 대한제국 때까지 가자. 거기에는 법적 정당성이 있고, 거기에는 현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안도 있다. 그리고 거기엔 우리 후손을 위한 통일 대한의 미래도 있다.

최치남 시민기자(전 배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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