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오른편에서 바라보는 세계[배재희]…좌파탈출기⑤장려상
뒤늦게 오른편에서 바라보는 세계[배재희]…좌파탈출기⑤장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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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씩 기차를 타면 꼭 역(逆)방향으로 자리잡는 이유"
"비뚤어진 운동가 시늉했지만 취업 후 생활이 안정되니 악에 받친 분개는 사라졌다"
"세금을 내는 자, 한 사회의 허리춤에 해당하는 어른의 일원이 되었다는 자각도 한 몫"
"물잔 안에 녹차엽이 느리게 향과 맛을 퍼뜨리듯, 나는 아주 느린 속도로 변했다"
장려상 수상자 배재희 씨.

일부러다. 한번씩 기차를 타면 꼭 역방향으로 자리 잡는 사정. 꼼짝없이 내 옆자리에서 같은 방향을 봐야하는 아내는 늘 내 습관을 힐난했다. ‘안 그래도 흔들흔들 어지러운 기차에서 뭐하러 거꾸로 앉아요?.’ 나는 미안함에 이죽대며 너스레 떨어본다. ‘살살 어지러운게 왠지 사람 마음 간질이는 것 같아서 좋지 않아?’ 솔직히 내 생각에도 설득력 없는 말이다.

아내는 금새 곁에서 잠든다. 나는 차창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기차의 먼 꼬리 방면을 살폈다. 원근감이 매끄럽다. 마음이 묘하다. 지나온 공간, 꼬리편의 풍경을 눈에 담고 있다보면 아내에게 말했던 ‘마음이 간지럽다’는 소리가 아예 실없는 소리인건 아니다 싶다. 지나온 광경을 살핀다는건, 살아가야할 내 몫의 인생을 실감하는 것과 짝을 이룬다. 데칼코마니처럼. 요컨대 같은 맥락이란 소리다. 창밖 풍경으로 여름이 숲을 이뤘다. 내 심정처럼 6월은, 여름은 타들어 바삭바삭하다.

거꾸로 보는 풍경은 묘하다. 내가 디뎌온 짤막한 인생이 쾌속으로 작아지며 풍경이 되어, 그것은 다시 옅은 농도로 흐물흐물 사라져버리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소실점 안으로 뒷걸음질 치듯 빨려간다. 그것은 마치 쾌속으로 멀어지는 별과 별 사이처럼. 기차 밖 풍경이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사실 내가 전진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는 자력으로 달리지도 않는다. 나를 들처업고 기차는 달린다. 반듯하고 곧은 레일을 따라 전진. 또 전진.

개인사를 되짚는 일이란 마치 기차의 역방향으로 흘러간 풍경을 보는 것과 같다. 생각해보면 나는 발버둥치듯 살아왔다 자부했으나 실은 주어진 레일처럼, 주어진 필연으로 착실히 귀결해왔다. 도착지가 분명한 기차에 탑승한 승객처럼 나는 발버둥쳤지만 결국 소위 ‘오른편’에 선 인간으로 귀결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말했던 ‘역사의 종언’을 작은 청년의 인생에서 다시 확인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나의 개인사를 기획한 궁극적 힘이 있었다고 밖에 생각이 안든다. 그것은 종교적 의미의 자애로운 섭리일 수도 있고, 소위 역사의 간지일 수도 있다. 요는 내가 나를 인위로 여기까지 끌어올린게 아님이 분명하다. 신이든, 혹은 역사였든, 나는 천성 이렇게 오른편에 설 수 밖에 없는 자였다. 그나마 감사한 것은 내가 뒤늦게나마 오른 편에 서서 바라보는 세계가 매일매일 신기하고 재미있다는거다. 마치 이성에 처음 눈뜬 소년처럼 발그레져서 시장경제의 눈으로, 보수주의의 안목으로 세계를 묵상한다. 어여쁘고 수줍은 기쁨. 한편으로 기차 역방향으로 바라보는 후일담 같은 세계가 저기 있다. 나는 저 만치 멀리서 어쩔 줄 몰라하던 옛적의 나를 바라본다. 가엽다. 어리석은 신념을 굳게 붙잡지도, 수이 놓지도 못하고 앓는 청춘의 내가 거기 있다. 꼬옥 끌어안아주고 싶다. 울며 안아주고 싶다. 여기 오는데 시간이 너무 걸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원망은 스스로 금해야지. 누구나 각자의 시간표가 있고, 저마다 각자의 속도로 자기 몫의 시침과 분침을 돌리며 사는게 인간의 실존 아니던가. 모두가 자기 하루를, 자기 몫으로 주신 1440분을 최선으로 살아야 한다. 후회는 접자. 요컨대 나는 그 얘기를 지금 하려는 것이다.

돌이키자면 대학시절 교우들 가운데 ‘사회’라는 이름을 내건 정당 쪽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의 범주가 삶의 전영역에 불과했던, 얇고 빈한 청춘답게 나는 마치 당연하다는듯 친구들과 동색이 되었다. 그게 마땅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교리에 무턱대고 세례를 받은 순간, 이미 나는 이후의 이십년 돌고 도는 청춘의 회절을 예정했다. 신기한 노릇이다. 그 시절 뇌리를 채운 온갖 허술한 얘기와 지적 소문은 지금 연기처럼 흔적도 없는데, 정작 나와 또래들을 공분시켰던 교수의 발언은 여전히 기억에 인박혀있다. 아이러니다. 교수의 말은 이와 같았다. ‘훌륭한 유산은 쉽사리 창조되거나 조형되지 않는다... 어떤 유능한 개인과 집단도 인류의 집단유산인 전통과 문화를 뛰어넘을 수 없다.’ 교수가 인용했던 말은 후일 알고보니 근대보수주의의 아버지라는 에드먼드 버크의 격언이었다. 내 청춘의 열기를 조롱하는 듯 했던 그 소리가 지금은 영롱한 별빛 같다. ‘젊은이를 쉽게 속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보지?’ 나는 잔뜩 화가 났다. 삶을 긍정하고 급여생활자의 삶을 사랑하며, 시장을 인정하는 어른들 보기에 나는 전형적인 앵그리영이었다. 더 한심하고 가여운 것은 그런 어른들께 노골적으로 대들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당연하지. 스스로 물적 토대 한번 일궈본 적 없는 존재가 대체 누구에게 무슨 힘으로 대든다는 말인가. 아르바이트도 귀찮은 대학생 주제에 순순히 용돈받아 무탈하게 졸업하는게 유일한 청사진이었다. 나는 그럴수록 더욱 정신만큼은 더욱 급진적이며 비뚤어진 운동가 시늉을 했다. 어디나 대개 순둥이일수록 속에는 불덩이가 더 자맥질하는 법이다. 내 눈에 보이는 세계는 홉스 식의 폭력적이고 야만적 전장이었다. 부자가 빈자를 수탈한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는데 인간은 끊임없이 소외되어 앙상해간다. 환경은 불가역적으로 파괴되어 가며 자기 밖에 모르는 자본주의적 이기심이 서로를 돌보는 인간의 덕성을 망가뜨린다. 가열차게 ‘하나’가 되어야 할 인간들을 사슬로 묶는 저 음험한 자본. 자본. 자본.

나는 속으로 들끓으며 겉은 순순한 대학생을 시늉했다. 교회 잘 다니고 적절한 교양을 뽐낼 줄 아는, 그러면서도 취업생각으로 신음하는 본성이 이기적으로 느껴져 환멸하던, ‘불안’이라는 키워드 말고는 설명이 안되던 어리숙한 시절. 정의의 투사 시늉을 하며 길거리 집회를 하던 친구들이 밤이면 접대부를 찾아 유랑하는 모습을 보며 뇌리 한켠에 ‘위선’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내가 스스로 속고 있다는 자각까지는 닿을 줄 몰랐다. 인간이 얼마나 구조적으로 교활한 예쁜 거짓말을 입으로 엮어내는 이야기꾼인지, 뇌리 한켠에 희미하게 매만져지는데도 나는 숨을 죽였다. 아직 맹아는 동토 속에서 껍질을 두르고 있었다.

군 시절에는 무슨 속인지 ‘부르스 커밍스’ 류를 반입해 읽다가 정훈 장교에게 혼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주장들, 예를 들어 6.25가 쌍방과실이라거나 자연발생적이라는 식의 얘기를 읽으며 나는 쾌감을 느꼈다. 일종의 컬트문화에 도취한, 비뚤어진 아이의 상이다. 모두가 트롯음악으로 흥겹게 으쓱으쓱할 때 홀로 헤드셋 끼고 쿨재즈 같은 류에 심취하는, 정신적으로 좀 뽐을 내고픈 조악한 청년의 심술과 비슷하다. 모두가 나를 특수한 인간, 소수의 계몽된 인간인 것처럼 바라봐줄 때, 그때에야 남루한 내 인생이 위로받는 기분이었달까. 막상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청춘의 두려움, 내 밥벌이를 스스로 해본 적 없다는 자책, 나는 옳은 것이 아니라, 옳아야만 한다는 강박감. 내가 틀렸을지 모른다는 자기부정의 희미한 새벽빛이 두려워 블라인드를 쳐버리는 새벽의 아이가 웅크려 울고 있었다. 90년대 후반의 이미 지리멸렬해질대로 지리멸렬해진 학생 운동의 끝자락에서 나는 이미 많은 것을 회의하고 있었으나, 또한 친구들을 잃고 외딴 섬처럼 아사할까 두렵기도 했다. 생각건데 이데올로기고 뭐고 결국 원만한 인간관계, 친구 따위가 삶의 전부였던거다.

취업이 안되고, 가진 것 하나 없는 자취생 시절에 내 남루한 존재를 긍정할 유일한 방도는 ‘내가 이렇게 사는건 다 사회구조적 폭압 때문‘이라는 신앙고백이었다. 보이지 않는 권력자의 빨대가 내가 자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내 등어리 어딘가에 박혀 쭈욱쭈욱 빨아들이는 중이라는 피학감. 그게 날 살게 했다. 가여운 사연이다. 얼마전 어떤 소설가가 인터뷰로 ‘여학생들이 운동을 잘 하지 않는 것도 다 그렇게 길러졌기 때문이다’는 말을 했는데, 코웃음은 커녕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얘기가 거기 그대로 있었다. 그 하소연, 그 피학감. 문장 하나하나에 내 이십대가 서려 있다.

구체적이고 눈에 띄는 삶의 첫 변화는 부끄러운 계기에서였다. 아주 정직하고 솔직담백하게 말하자면 취업이 나를 바꿨다. 물잔 안에 녹차엽이 느리게 향과 맛을 퍼뜨리듯, 나는 아주 느린 속도로 변화를 맞이했다. 어려운 취업 끝에 생활이 펴고 한 숨을 돌리게 되면서, 악에 받친 분개가 아닌 감정으로 최초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거다. 세금을 내는 자, 한 사회의 허리춤에 해당하는 어른의 일원이 되었다는 자각도 한 몫을 했던 것 같다. 처음으로 궁지에 몰린 앵그리영의 피학감이 아닌, 서른살의 나는 냉정하고 선명한 실감으로 삶을 조심히 다시 살폈다. 어떤 고상한 이는 이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순전히 지적 고심만으로 이뤄낸다더라. 그러나 나 같은 속인에게 변화는 훨씬 촌스럽고 좀 뻔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그게 취업이었다니. 하여간 진리는 스며들듯, 가랑비가 적셔가듯 서서히 나를 감쌌다. 생활이 살만해지면서 무대책에 가까운 분노를 수그러뜨리고 본 세상은 의외로 꽤 질서정연하고 낙천적이었다. 망해간다는 자본주의는 되려 곳곳에서 번영하여 제 3세계 빈곤을 씩씩하게 말소해가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대안국가인양 한국의 모 언론이 가마띄워주던 제3세계 국가들은 하나같이 독재화, 경제붕괴, 포퓰리즘, 종교적 과격주의로 수습못할만치 망가져가고 있었다.

특히나 환경론적 선입견은 청춘의 나를 유독 교조화시켰던 주범이었다. 나는 지금 그린란드를 생각한다. 나는 동네 도서관에서 변방 중의 변방인 그린란드 역사를 우연히 읽던 날의 환희를 잊지 못하겠다. 이 빙하로 덮힌 소대륙 역사를 곰곰히 살펴읽으며 나는 처음으로 엉망으로 지어진 가설건물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공터 위에 새 세계관의 첫 삽을 떴다. 그린피스 같은 환경론자들 저널을 편집증적으로 읽어대던 나는 ‘문명이란 지구라는 가여운 여성을 유린하고 오염시키는 성적 착취행위와 같다‘고 글을 쓰곤 했었다. 생각해보면 허술하고 코믹했다. 나름 교회 다닌다는 녀석이 무슨 자연 정령론자 비슷한, 가이아이론 어쩌고를 시늉하듯 떠들었다. 그런데 막상 책으로 확인한 그린란드는 한 시절, 말 그대로 녹색의 땅이었다. 중세 시대에 어떤 대단한 바이킹 문명이 거기 있었고, 목축이며 각종의 농경생활이 꽃피웠던 기독교 문명국가 있었더라는. 결국 가면 갈수록 뜨거워져 마침내 ‘칼라하리’나 ‘사하라’처럼 모래만 휘날리는 필연적 파국으로 귀결할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과거에 되려 북극해 근방에서 포도 키우고 목축하던 시절이 있었다니. 지구란 자연스레 덥기도 하고 춥기도 한 온도조절기능을 갖고 있으며, 그런 기후학적 변화가 문명을 꽃피우기도 하고 쇠락시키기도 한다는 사실. 반자본주의의 도설에서는 결코 말하지 않는 과학적 세계였다. 영조-정조 교체기때 본격화한 간빙기가 어떻게 농업 생산성을 약화시키고 조선조의 수림을 파괴시켜 동토를 붉은 민둥산으로 표변시켜 갔는지도 다시 알았다. 나는 나이 서른을 먹고서야 환경 종말론에 기초한 왼손잡이의 교조적 이념에 물음표를 던졌다. 이윽고 한번 던져진 물음표는 걷잡을 수 없다. 사회, 경제, 문화, 정치 거의 모든 면에서 내 안의 신앙고백 같던 관념에 의혹이 던져졌다. 갔다. 생각건데 이 걷잡을 수 없는 의혹의 속도감은 내 청춘 내내 지적 동토의 암반 밑으로 ‘질문’을 묻어두었던 압력이 그만큼 억지스럽고 컸기 때문일거다.

내 정신성 속의 거대하고 깨어질 줄 몰랐던 반자본주의 세계관은 의외로 금새 힘이 부쳐했다. 처음에는 내가 먹고 살만해졌다는 정신의 느긋해진 여유에, 다음으로는 환경론적 신념에 대한 의문, 그 다음으로는 한국의 군사정부시절 경제성장문제를 수량적으로 되짚어보는, 요컨대 필연적 의문과 답으로 내달리는 과정이 이어졌다. 일찍히 석학 ‘기 소르망’이 예찬했듯, 한국이 아시아적 낙후성을 유일하게 극복하고 중화학공업을 뚝심있게 밀어부쳐 근대화에 이른 과정. 이 일련의 프로세스는 그 자체로 내 정체성안의 반자본주의적 유독성을 희석해가는 근사한 과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봄날이었다. 유명 시민단체에서 경제정의 어쩌고 하며 과격한 사회운동의 프론티어 노릇을 하던 벗을 만났던 날. 이 날은 내 고심이 마침내 끝을 맺고 매듭지어진 상징적 날이다. 외국 풍력발전업체 주식에 모아둔 돈을 모조리 털어넣었다가 큰 손실을 입은 옛 시민단체 활동가는 낙향해 살았다. 변해버린 내 눈에 친구는 변한게 없었다. 아니 변하지 않았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군사정부 전후로 우리 살림살이는 아무 것도 나아진 것이 없다’는 비뚤어진 옛 시절의 말을 반복하는 그의 얼굴은 격렬하며 한편으로 어딘가 기운이 없다. 입으로 떠들어지는 말과 실제하는 삶의 무력함이 주는 극단적 콘트라스트. ‘풍력발전이든 뭐든 기업주식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총아같은 행위 아니니?’ 나는 이 말까지는 차마 건네지 못했다. 다만 그날 나는 내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했는지 실감하였다. 나는 훌훌 벗어던지듯 그에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젊을 때 하루 두끼를 먹었어. 너의 아버지도 그랬을테지. 지금 우리는 오늘 세끼 잘 먹고 고상한 살롱이라도 되는양 카페에서 토론하고 있네. 미끈거리는 조각케익과 무슨 마끼야또인지 하는 비싼 이런걸 주문해놓고. 친구야. 정말 변한게 없니. 내게 답하지 말고 네 자신에게 답해보렴.’

우리 둘 다 꽤 긴 시간 같은 잠깐을 침묵했다. 둘은 서로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정교하게 깨닫고 있는게 분병했다. 보고 싶지 않은 삶의 진면목 한꺼풀 아래를. 나는 내 초라했던 옛적 관념의 노예생활을 마치 기차 역방향으로 보듯 테이블 맞은 편 그에게서 보고 있다. 그는 변하고 싶지 않은, 자기를 부정해야 얻을 수 있는 어떤 새 모습을 테이블 맞은 편에 두고 있다.

나는 요새 유튜브라는 인터넷 방송을 하나 만들고 있다. 어설프지만 나처럼 소위 지적 전향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반쯤은 장난 같은 방송이다. 티가 나는 어설픔 만큼이나 물론 조회수가 안나오지만, 뭐 그래도 몇 편쯤 더 만들어볼 생각이다. 나의 변해온 이력을 스스로 실감하고 확인하고픈 심정에서다. 돌이켜보면 이 모두가 자연스럽고 우연스러웠다. 생각건데 기차역방향으로 보는 세계도 꽤 그럴듯하다. 가엽고 쓰라리지만, 어찌되었든 현재의 나로 향하는 일관된 궤적이 거기 멀어지고 있다. 역사란 그런것 아닐까. 생각건데 많은 것은 우연 때문이었고, 이 우연이란 기실 필연이라는 눈에 띄지 않는 저류 위에서 싹이 돋아 있는 것이었다. 생각건데. 

배재희(39·교사/장려상 수상자) qowogml2@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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