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의미의 후계자를 육성하지 못한 박정희 시대의 견제받던 2인자
가치정치보다는 이익에 충실했던 정치9단 : 야당 총재로서 다시 국무총리로서 계속된 권력 행사
김종필의 빛과 그림자를 같이 떠 않은 한국정치

​강규형 객원 칼럼니스트
​강규형 객원 칼럼니스트

김종필씨의 외아들인 김진씨가 과테말라 여성을 부인으로 맞았을 때 기자들이 짓궂은 질문을 했다. ”과테말라 며느리를 얻는 심정이 어떻습니까?“

김종필씨는 씨익 웃으면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가 김해김씨 아닙니까? 우리의 선조인 김수로 왕은 인도의 허황옥을 신부로 맞았으니 우리 집안은 조상의 전통을 잇는 것이외다.”

기자들 사이에선 폭소와 탄성이 나왔다 “역시 JP다”

김종필씨(JP)의 타계로 소위 3김(金)시대의 마지막 인물이 이승과 작별을 고했다. 3김 중에 유일하게 대통령이 못된 사람이지만, 누구보다 오래 2인자 또는 실세로서의 권력을 누렸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로써 3김시대는 완전한 종언을 고했다.

김종필씨는 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 육사 8기에 입학했고 우등으로 졸업했으며, 임관 직후에 6,25 전쟁을 맞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군 생활 중 만나게 돼 그의 조카사위가 됐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의 주역으로서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던 그였다. 5.16은 사실 박정희보다 김종필의 역할이 더 컸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 군은 육사 5기가 대령에서 적체돼 있었고, 육사 8기가 중령에서 적체돼 있어서 승진에 불만을 가진 장교들이 대단히 많았다. 심지어는 육사 4기인 박태준 씨도 대령이었다.

물론 5기의 선두주자들인 채명신 이용 등은 장군이었고, 8기의 선두주자인 강창성 등 극소수는 대령이었지만 대부분 5기는 대령에, 절대 다수의 8기는 중령에서 진급이 막혀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6.25전쟁에서 일선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으로 가장 처절한 전투를 치른 사람들이었기에 이런 진급 적체에 불만이 많았고, 이러한 불만을 가진 장교들을 조직화 한 사람이 바로 김종필이었다.

수려한 외모에 비상한 두뇌 그리고 능란한 언변을 가진 그는 군사정변의 최고 설계자로서 박정희 장군을 리더로 군사정변을 감행했고 성공했다. 5.16은 형식상 분명히 쿠데타였지만 훗날 한국사회에 가져온 격변적 변화를 고려한다면 하나의 혁명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적어도 이집트 나세르의 군사혁명보다는 더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5.16 이후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부장에 취임한 김종필의 권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간의 평을 받았다. 그러나 하늘 아래 태양이 둘이 있을 수 없는 법. 결국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기 싸움에서 밀린 그는 “자의 반 타의 반“이란 유명한 말을 남기고 ”외유”에 나서기도 했다.

박정희 시대는 다층적으로 해석돼야 할 시대이다. 그 정권이 이룩한 경제성장과 안보태세는 대한민국이 발전할 초석을 깔았지만, 철권통치가 가져온 후유증도 있었다. 당시 한국사회는 세계 최빈국으로서 끼니를 걱정하는 시절이었고 아직 자유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기 이전의 시대였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박정희 체제가 혹독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체제가 이룩한 경제발전과 산업혁명 등이 결국 한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운영할 물적 토대와 기반을 이뤘다는 것도 부정하기 힘들다.

박정희 시대의 단점을 두 개만 더 지적하자면, 지나칠 정도로 영남 위주의 엘리트(특히 물리력을 가진 군에서의 지휘부) 구성을 했다는 것과 진정한 의미의 후계자를 육성하지 못했다는 점이리라. 자신이 군을 통해 집권한 만큼 뛰어난 군 지휘관이 군 수뇌부를 형성하는 것을 두려워해 영남 위주의 2-3류 장교들을 중용했다는 점이 지적돼야 한다. 특히 이북출신의 빼어난 지휘관들을 소장, 중장 정도에서, 심지어는 대령에서 전역시키고 일본군 하사관 출신들을 중심으로 육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방부장관을 구성했다. 원래 진급이 느린 장교들을 벼락출세시켰으며, 육사11기 부터는 노골적으로 하나회라는 영남 중심의 군벌을 지원했기에 훗날 한국군대의 약체화와 10.26, 12.12 사태를 가져오는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충남 출신의 김종필은 군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하여 그가 군사적인 물리력을 근본적으로 못 갖게 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진정한 권력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김종필과 김성곤 두 사람 밖에는 없었다. 이후락, 박종규 같은 인물들은 조연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조카사위이자 5.16 최고의 수훈자인 김종필을 철저하게 견제하면서도 중간중간 적절히 중용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아마도 박정희정권에서 가장 많이 가택수색을 당한 사람은 김종필일 정도로 많은 견제를 받았다. “국민복지회”라는 공화당 내 김종필 대통령 만들기 조직은 철저하게 탄압되고 뿌리를 뽑혔다. 그러나 박정희는 김종필 이외의 또 다른 실세 그룹이 부상하면 김종필을 다시 불러 그들을 견제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을 구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결국 김종필을 불신했고, 그에게 나라를 맡기면 나라가 거덜 낼 것으로 우려를 가지고 그에게 실제적인 권한을 주지 않았고, 그를 후계자로 내세우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이런 김종필 견제가 과연 옳았느냐는 후세 사가들의 면밀한 연구와 판단에 맡겨야 할 것이다.

반면 김성곤 씨는 원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남로당 출신이었다. 그는 뛰어난 정치 능력과 통 큰 스타일로 공화당 정권의 최고실세로 떠올랐다. 원래는 김종필을 견제하기 위해 구성됐던 소위 ”4인체제“는 김성곤(공화당 재정위원장), 백남억(공화당 의장), 김진만(공화당 원내총무), 길재호(공화당 사무총장)로 구성된 막강한 라인 업이었다. 정치자금과 인간관리에 달인이었던 김성곤은 어느 순간 대통령을 능가하는 권력을 갖게 됐다. 국회의원, 도지사, 군수, 경찰서장이 어느덧 김성곤의 지시를 따르는 상황이 되자, 박정희는 김종필을 국무총리로, 김종필 직계인 오치성을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4인체제 특히 김성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이 당시 터진 경기도 광주 폭동사태 때문에 야당인 신민당은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 결의안을 냈다. 부결을 지시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일부 공화당 의원들이 무시하고, 가결을 지시한 김성곤의 의도대로 해임안이 가결되자 박 대통령의 진노는 극에 달했다. 이 사태는 김성곤 등을 체포하는 일로 발전돼서 4인체제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러면서 김성곤 씨가 이원 내각제에서의 실세 총리가 되는 방안 등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박정희는 김성곤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자신의 권력을 침해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그가 최고지도자가 됐을 때 한국 정치가 일본식 금권정치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렇게 후계자 그룹들이 사라진 후 최규하가 총리에 임명되고, 10.26 사태 이후 상황수습 능력을 결여한 최규하 체제는 무력하게 무너져갔다. 항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최규하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일선 후퇴를 생각했다고 하는데, 사실 최규하는 진정한 후계자가 되기엔 턱없이 무기력한 인물이었다. 오히려 최규하 후계자론은 박정희 수렴청정의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주장으로 평가된다.

이렇듯 박정희 체제는 진정한 후계자를 육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끝나게 됐다. 그 이후에도 김종필 씨는 야당 총재로서 그리고 DJP(김대중-김종필)연합정권에선 국무총리로서 계속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2004년 17대 총선에 불과 몇 퍼센트 차이로 비례대표에서 낙선하고,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8번후보인 노회찬에게 비례대표 국회의원 직을 빼앗기면서 일선 정치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정계 원로로서 게속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촌철살인의 세평과 조언을 주면서 임종 직전까지 한국정치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쳐왔다.

그는 빼어난 능력에다가, (비록 키는 크지 않았지만) 수려한 외모, 높은 지식수준, 촌철살인의 언변과 재치, 그리고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예술인적 자질까지 갖춘 한 시대의 호걸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젊었을 적의 패기와 이상은 사라지고 지나치게 현실적인 이득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행태가 그의 외모에서도 나타났다. 젊었을 적 호방한 이상주의자의 용모는 어느 순간부터 노욕(老慾)의 화신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DJP연합은 정치철학적 연대가 아니었고 순전히 권력을 나눠 갖기 위한 연대였을 뿐이다. 그러니 이 연합은 양측의 화학적 결합 없이 계속 서로가 서로를 겉도는 이익집단에 불과했다. 또한 돈에 집착하고 자기 가신(家臣)들을 매정하게 내치는 인정 없는 정치인으로 비쳐 지기도 했다. 나중에 김영삼, 김대중의 측근이 되는 양순직 예춘호 김창근 같은 정치인들이 원래는 JP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측근 관리에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JP와는 평생을 같이 한 정치인이 거의 없다.

김종필 전 총리가 타계함으로서 이제 한국정치는 바야흐로 완전히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것 같다. 한국 정치의 방향타가 실종되고 대중영합주의가 횡행하는 오늘날 그가 사망했다는 것은 새로운 정치철학과 인물의 탄생을 예고하는 느낌까지도 준다.

그가 남긴 긍정적 유산과 부정적 유산, 모두 다 한국 정치의 유산이 됐다. 앞으로 그의 정치에서 배울 건 배우고 버릴 건 버리는 가운데 한국 정치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의 명복을 빈다.

강규형 객원 칼럼니스트(명지대 교수,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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