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명작소설, 알베르 카뮈 ‘페스트’
남을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문명의 질병’이자 ‘살인의 사상’, 공산주의에 감염되지 않은 당신
선량한 마음으로 묵묵히 오늘을 지키는 당신이 희망이자 영웅!

김규나 작가

 페스트(흑사병)가 알제리의 작은 해안도시, 오랑을 습격한다. 처음에는 쥐들이 비틀거리다 피를 토하고 죽지만 이내 고양이가 사라지고 매장할 곳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오랑 시는 폐쇄되고 죽음의 도시에 갇힌 시민들은 속수무책, 언제 무너질지 모를 목숨과 일상을 견딘다. 

사태 초기, 냉철하게 심각성을 인식하고 신속히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판단한 건 의사, 베르나르 리외다. 하지만 그의 보고를 받은 시청의 실무 담당과장이나 의사협회장은 자신에겐 권한이 없다며 결정과 책임을 회피한다. 그 결과 공권력이 움직였을 때는 환자를 격리하고 시신을 치우는 일 말고는 어찌해볼 방도가 없을 만큼 상황이 악화된 뒤였다. 

사회가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눈앞에 버티고 선 재앙과 맞선다. 취재차 오랑에 왔다가 발이 묶인 파리의 신문기자 랑베르는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니’라며 도시 탈출을 필사적으로 모색한다. 어떤 사람들은 위로받으러 교회로 달려가지만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가 사악한 인간에게 신이 내린 징벌이니 회개하라고 설교한다. 페스트라는 공포가 야기한 혼란을 틈 타 암거래로 이익을 챙기느라 신이 난 코타르 같은 범죄자도 있다. 그는 타인과 도시의 불행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시간이 가도 페스트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사람들은 점점 더 깊은 체념 상태에 빠진다. 페스트를 태워죽이겠다며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고 시민을 대상으로 약탈하거나 무장 테러하는 자들도 생겨난다. 그러나 리외는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이라고 믿으며 묵묵히 의사의 직분에 충실하고, 랑베르처럼 외지인일 뿐인 여행객 타루는 자원봉사대를 구성하자고 제안하며 스스로 재난 해결에 앞장선다. 페스트로 어린 아들을 잃고 자신 또한 감염되었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오통 판사도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몸을 아끼지 않게 되고, 기도만이 최선의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한 파늘루 신부 역시 봉사대에 합류한다. 그들을 지켜보던 랑베르도 마음을 바꾼다. 도시경계선의 보초병을 매수하여 마침내 오랑을 떠날 수 있게 되지만 ‘혼자만 행복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도시에 남아 페스트와 싸우기로 결심한다. 

“나는 떠나지 않겠어요. 여러분과 함께 있겠어요. 나는 이 도시와는 무관하고 여러분과도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러나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나도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 사건은 우리 모두와 관련된 거였어요.”

‘반反 공산주의자는 개.’라고 말했던 사르트르와 달리 한때 공산당원으로 활동했으나 소련의 참상을 깨달은 뒤 공산주의는 ‘문명의 질병’이자 ‘살인의 사상’으로 규정했던 카뮈는 ‘<페스트>는 전쟁 속에서 성찰과 침묵 그리고 고통의 몫을 분담했던 사람들의 이미지를 제공할 것’이라고 기록한 적 있다. 노벨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는 “사람이 부정否定 속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긍정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소설로는 <페스트>가 그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페스트가 점령한 지옥, 오랑이 된 지 오래다. 공산주의 종북 좌파 이념은 마치 페스트처럼 정치인과 법조인, 교육자와 예술인 등 지식인층을 감염시켜 좀비로 만들었고 국민의 정신과 영혼을 고사시켜 노예로 전락시켰다. 썩은 내를 진동케 하는 이념의 바이러스는 ‘자유와 생명이 매일매일 파괴 직전에 있음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아직 감염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조차 서로 불신하고 경계하도록 만들었다. ‘끊임없는 패배’만이 거듭되자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에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흔들었던 사람들은 김정은과 악수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보고 패닉에 빠지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존속할 수 있을까, 베네수엘라처럼 쥐와 고양이를 잡아먹으며 목숨을 연명하게 되는 건 아닐까, 공산화가 되어서 나와 내 가족 모두 저들 손에 죽는 게 아닐까.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안보와 경제가 파죽지세로 기울어가는 이 땅의 미래가 두렵기만 하다. 

소설 속의 또 다른 인물, 조제프 그랑은 시청의 임시직 말단 공무원이다. 타루는 ‘그랑이야말로 보건대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조용한 미덕의 실질적 대표'라고 평가하지만 그의 역할이란 저녁 늦게 퇴근하고 자원봉사대로 와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아 하는 것뿐이다. 리외가 그의 수고에 감사를 표하면 그랑은 수줍게 말한다. 

“제일 어려운 일도 아닌 걸요. 페스트가 생겼으니 막아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는 페스트를 크게 두려워하지도 않고 죽은 자를 깊이 연민하지도 않는 것 같다. 누적된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페스트에 걸렸을 때도 눈물만 줄줄 흘릴 뿐, 비명을 지르지도 않는다. 이루고 싶던 꿈, 소설을 완성할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하지만 그마저도 죽음 앞에서는 미련 없이 태워버린다. 그러나 기적처럼 회복되었을 때 그는 “다시 시작하겠어요. 두고 보세요.” 하고 말한다. 그랑에 대해 리외는 이렇게 서술한다. 

“이 보잘 것 없고 존재도 없는 영웅. 가진 것이라고는 약간의 선량한 마음과 아무리 봐도 우스꽝스럽기만 한 이상理想밖에는 없는 영웅.”

타인의 행운을 부러워하며 나의 불운을 비관하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남을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일은 얼마나 간단한가. 대신 매일 매 순간 자신의 절망과 싸워 이기는 일은 얼마나 많은 몰입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가. 얼마나 두렵고 무겁고 고통스러운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작업인가.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부패한 공산전체주의 이념과 그에 부역하는 종북좌파 일당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먼저 싸워 이겨야 할 것은 허무주의와 무감각이다. 체념과 절망과 두려움이다. 자유와 평화가 피와 목숨을 대가로 요구하는 것처럼, 희망 또한 누군가 공짜로 안겨주는 선물이 아니다. 매 순간 주저앉아 절망하고 싶어 하는 나약한 마음과 싸워 이겨야만 꽃 피워 얻을 수 있는 귀한 씨앗, 그것이 희망이다. 

“페스트가 대체 뭐겠어요? 그건 그냥 인생일 뿐이에요.”  

소설 속 어느 노인의 말처럼, 페스트란 태어난 날은 알되 죽을 날은 모르고 살아가는 하루하루이기도 하고, 애써 피하고 싶은 고된 생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한때는 번성했으나 몰락해버린 문명이나 사상의 한 페이지이기도 하고, 셀 수 없는 인명을 앗아간 천년의 중세 암흑시대와 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이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테러, 기아와 폭력이기도 하며, 주변에서 끊이지 않는 사고와 질병이기도 하다. 그러니 페스트를 피해 어디로 도망간단 말인가,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영원한 페스트는 없다. 찬바람 덕분이든 혈청 덕분이든, 기승을 부리며 지구인 절반을 죽였다 해도 모든 페스트는 결국 지나갔다. 그때마다 누군가는 절망했고 누군가는 싸웠고 누군가는 죽었으며 누군가는 기어이 살아남아 오늘을 만들었다. 그러니 잘 보면 그다지 절망적인 상황도 아니다. 다만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는 진실을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을 뿐, 일출 전 세상이 가장 암울하다는 말을 많은 사람들의 실망이 증명해보이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할 일은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다. 끝내 이기리라, 믿고 싸우는 것이다. 리외처럼, 타루처럼, 랑베르처럼, 오통 판사나 파늘루 신부처럼 그리고 그랑처럼, 지금 여기에서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불현듯, 쥐들이 성가시게 뛰어다니고 고양이가 햇볕에 앉아 평화롭게 털을 고르며 하품하는 세상이 다시 시작된다. 그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우리가 계산하고 따질 몫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행운이거나 하늘의 뜻이다. 

당신의 절망과 싸워 이기길 바란다. 매일 매 순간, 당신을 무릎 꿇게 하려는 두려움과 싸워 승리하길 바란다. 나 하나는 세상을 바꿀 힘이 없지만, 리외와 타루를 보며 랑베르가 마음을 바꾸었듯이, 내가 진실하게 희망을 실천할 때 당신이 바뀌고, 가족이 바뀌고, 사회가 바뀌고, 세상이 변화할 수 있다는 개인의 각성, 소박하지만 엄청난 진실을 통감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시대의 페스트와 싸울 수 있고, 죽음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자유와 진실을 존중하고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우리 자식 세대에 가르쳐야 다시는 이 땅에 페스트가 발들이지 못한다. 잠시 후퇴할 뿐 ‘페스트균은 죽거나 소멸하지 않’기에 선배 세대 덕에 잘 먹고 잘 살며 방심하던 우리 앞에 괴물로 되살아난 것처럼, 북한이 무너진다 해도 공산주의나 종북좌파의 뿌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불행과 죽음, 사회의 혼란을 이용하여 잘 먹고 잘 살려는 코타르 같은 자들이 잠시 몰락한다 해도 인간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시기와 질투가 기회만 있으면 사회주의와 공산전체주의를 꿈꾸며 평등과 평화를 부르짖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약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개인, 남 탓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진실한 희망. 공짜와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성실한 노력만이 매일매일 닥쳐오는 삶의 페스트를 이길 수 있다. 더 이상 헤매지 말고, 더 이상 절망하지 말고, 지금이 바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닌가. 이제야말로 넘어진 이 땅에서 주먹 불끈 쥐고 힘차게 일어서야 할 때가 아닌가.

깨어나라, 개인이여! 일어나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여!
TMTU. TRUST ME. TRUST YOU.

*‘TMTU. TRUST ME. TRUST YOU’는 김규나 작가가 ‘개인의 각성’을 위해 TMTU문화운동을 전개하며 ‘개인이여, 깨어나라!’는 의미를 담아 외치는 캐치프레이즈입니다.

김규나 객원 칼럼니스트(소설가,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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