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범 객원 칼럼니스트
김행범 객원 칼럼니스트

행정부가 거대 국가관료제를 토대로 명목상의 권력분립을 넘어 서는 시기는 1887년 우드로 윌슨의 ‘행정의 연구’가 나온 1887년 즈음으로 본다. 그 해 최초로 설립된 주간통상위원회(ICC: Interstate Commerce Commission)는 우리의 공정거래위에 근사한 소위 독립규제위원회의 남상인데 국가가 시장경제에 개입하는 상징으로도 해석된다. 정부가 개인과 기업에 대한 강력한 규제자로 나선 것은 20세기 초반 및 대공황을 이유로 적극 간섭에 나선 시기이다. 이 때 개인의 자유 및 시장경제에 대한 규제의 두 주역으로 과용된 것이 바로 연방법원과 이 미국판 공정거래위원회였다. 법원은 사법심사를 통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정부 조치들을 정당화해 주었고 이러한 토대에 따라 ICC는 그 초법적 정책집행에 나설 수 있었다. 이 둘은 씨오도어 루스벨트 시대에 시장 경제 및 개인 자유 억압을 위해 선지자로서의 국가가 동원하는 두 마리 곰으로 상징화되었다. 이 정부는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촛불의 첫 번째 곰 공정위는 한 술 더 뜬다. 본래 헌법 119조 2항은 원칙인 1항에 대한 예외적 사항이므로 그 적용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또 다른 유의 포인트는 헌법이 거기서 경제 규제의 여건으로 명시한 것은 경제력 남용이지 경제력 집중 그 자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1조는 경제력 남용 외에 경쟁에서 성공한 자에게 시장이 필연적으로 주는 결과인 경제력 집중까지 규제하는 점이다. 그 오도된 정책결정 및 집행의 주역으로 공정위가 군림하는 것이다. 최근 드러난 국회 개헌특위 자문위의 안대로 거기에 또다시 징벌적 조치까지 부여한다면 아예 국가거래통제위원회가 될 것이다. 공정위 위원장의 대기업 혼낸다는 취중 진담 같은 몇 마디에 기업은 떨고 있고, 그 공정위 권세가 솟아오르니 행정고시 합격자에겐 과거 좌파 정권처럼 최고의 근무부처로 선망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촛불 정권이 즐겨 사용하여 문제가 되는 또 다른 위원회들은 공정위와 같은 법적 기반이 공식적인 것이 아니면서도 직접민주제, 참여민주제로 위장하는 괴상한 것들이다. 본래 복수의 의사결정자가 책임을 진다는 정부조직 방식이 위원회이지만 그 치명적 약점은 결정 책임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부는 오히려 바로 그 약점을 활용하기 위해 위원회를 오용하는 것이다. 대개 국민은 진상조사위원회, 공론화위원회, 통일부 정책혁신위원회, 개헌특위 자문위원회....는 알아도 그 ‘위원’은 잘 알지 못한다. 업무 책임과 권한이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정부 기관이, 확신이 없는 정책의 결정을 애매한 각종 위원회에 넘겨 그 권고안을 수용하는 식으로 처리하면서 그것을 엉뚱하게 참여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라 호도하는 것이다. 공식적 정부기관의 책임 방기에 불과함에도 말이다.

대의제의 본체를 무시하고 현장 인민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은 바로 사회주의의 기초단위 소비에트 수준에서나 오갈만한 일이다. 참여 및 숙의란 말을 좌파정부가 필연적으로 애용함은 이 때문이다. 과거 좌파정권이 한때 지방자치를 ‘지방 단위의 연방제’로 호도해 간 것이나, 좌파 조언자들이 참여 및 왜곡된 자치를 유독 강조하는 것은 결국 남북연방제에 대한 감성적 적응 및 예습 과정으로 만들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좌파정권에게 필요한 두 번째 곰은 진보주의적 사법기관이다. 이제 이 정권은 민변 및 우리법연구회 출신 진보적 법관이 사법부의 중추가 되어 이 정권에 발맞추는 기반을 갖추었고 이제 곳곳에서 실제 그런 결정을 내리고 있다. 미국의 국가개입주의 시대와 너무나 흡사하다. 그런데 우리 사법부가 그렇게 변모한 근원은 바로 헌법재판소가 촛불군중과 더불어 부당 탄핵의 공동 주역이 되면서부터이다.

헌법재판소가 촛불에 힘입어 탄핵에 손들어 줄 때, 실은 대통령 다음으로 가장 상처를 많이 입은 것은 바로 헌재 자신이었다. 헌법재판소가 국민에게 자해행위로 실증해 보인 것은 입법목적정당성-수단의 적절성-최소침해성-법익균형성이란 외관적 심사절차들보다 정치적 풍향에 더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심판 의견을 단일 의견으로 모으자는 재판관들의 담합이 있었고, 탄핵 공신으로 자처한 재판관이 헌법재판소장 지명자로 나섰다 당한 국회동의 부결 역시 탄핵심사 결과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헌법재판소 스스로 사법심사의 엄정함을 일탈하고 정치 국면에 기울어진 것임을 증언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부결 결정이 당시 국회 탄핵 의결 후 반동으로 나타난 총선승리 결과와 관련되어 있고,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인용은 결국 무엇보다 길거리 촛불군중의 위세가 결정했다는 세간의 믿음은 결국 헌법재판소가 통상적으로 알려진 사법적 정의 탐색과는 거리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탄핵을 상원에서 결정하는 미국식 방식과는 달리, 탈(脫)정치화된 가중된 숙고를 하라고 만든 특별 사법기관인 헌법재판소에 맡기면 보다 사법적 진실을 담보하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헌법재판소는 사법 정의의 외피를 쓴 채 정치 저울을 지닌 기관이더라는 실망이다. 그 탄핵의 공적에 대한 보답이란 합리적 혐의 아래 공무원이 받는 최고 훈장을 대통령이 헌재재판관에게 베푸는 것 역시 민주적 정당성이 취약한 사법기관이 갖는 정치 구속의 위기 단면으로 보인다. 이런 태생적 한계를 가진 헌법재판소를 촛불은 너무나 쉽게 포획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촛불군중은 이제 사법과정에도 목소리를 내어 구속되어야 할 자와 구속되어서는 안 될 자를 선험적으로 결정하고는 영장심사를 한 법관의 신상을 털어가며 찬사 아니면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지 않은가.

기업에 대한 가학의 스테로이드가 과잉 분출 중인 공정위 및 법적 근거도 모호하게 급조된 각종 사이비 현장 위원회들과, 민변과 우리법연구회가 주도하는 사법부를 만든 모든 비행의 근원은 1987년 체제를 넘어 한 세대를 넘어 마침내 성공한 2017년 촛불의 군중지배제(mobocracy)란 점으로 회귀한다. ‘오래 확립된 정부가 가볍고도 일시적 이유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인간의 사려는 명령하고 있다’(1776.7.4. 미국 독립선언서 전문 중). 한 정부를 뒤집은 이유가 충분한 급박함과 합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는가는 결국 증명되지 못했다. 탄핵된 대통령에게 온갖 잡범 같은 새 죄목들을 탄핵 이후 지금까지도 발굴하며 이를 기소이유에 덧대려고 기를 쓰는 것 자체가 오히려 결국 촛불 군중은 근본적이고 주된 탄핵의 이유를 입증하지 못했다는 반증으로 보인다.

그 촛불 군중은 글로벌 시대에 대응할만한 역량도 도덕적 기반도 보여주지 못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대통령이 방중에서 기레기 수준의 중국 언론인과의 회견에서 수모에 가까운 구두시험을 받았으며, 한국이 ‘속방’임을 확인시키려는 중국지도층에게 온갖 굴욕을 당했고, 수행 한국 기자는 백주에 집단 폭행을 당하고 돌아왔다. 미국에게 이런 일 당했다면 효순-미순 사건에 버금가는 어마어마한 반미 촛불이 타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광화문광장 및 중국대사관 앞에서 ‘자주’를 외치는 촛불의 용기를 본 적이 없다. 밖에서는 한 마디도 못하고 집 안에서만 똑똑한 못난 자녀가 제 어미 앞에서만 과대 용맹하듯 촛불은 오직 제 나라 여자대통령 끌어 내릴 때에나 쓰인 국내용 감성 기제임을 확인할 뿐이다.

촛불 이후에 이제 어떻게 대처할지가 문제이다. 다 덮어버리고 아무튼 새 세력으로나 급히 연합하자는 힘의 논리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선뜻 가담하지 못한다.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우파의 당면 큰 난점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시 의견이 뚜렷이 갈라진다는 점이고, 그게 회복의 전망을 더 어렵게 한다. 그럼에도, 친중 사회주의 냄새 나는 정권이 잘 생산해주는 여러 실책들을 그 때마다 일일이 열거하는 귀납적 비판 방식을 넘어, 근원적 문제인 촛불로 이루어진 부당 탄핵이란 근본 신념을 견지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 것도 남는 게 없게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인을 평가할 때 자신처럼 소위 80년대 중반의 민자당으로의 삼당통합 참여에 거부했는가를 잣대로 딴엔 정치인의 ‘양심성’ 검증을 했었고, 그 전후 운동권 세계에선 1980년 광주사태 진압에 대한 태도가 기준이었다. 이젠 이 시대의 정치인, 지식인 및 모든 개인은 2017년 촛불군중 및 그 헹가래로 집권한 전대협 정권을 수용하는가? 라는 잣대로 새롭게 평가될 것이다.

누군가는 문화로, 정론으로, 시민사회 활동으로 계속 이 담론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촛불은 잘못된 것이다. 우선, 개인 자유, 시장경제 법의 지배를 신봉한다는 우리들 쪽에서 이미 국가권력에 의해 패배한 이 담론에 대한 믿음에 벌써 피로해지지 않도록. 아무리 적-아의 생경한 힘의 대결이 정치라 하나 거기에도 오랜 시간의 누적 후에야 확인되는 진실의 힘이 있고 그것이 촛불 정권 자신이 스스로 써 내려간 임시 기록들을 지우고 언젠가 역사를 교정해 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린 이 근본 믿음이 얼마나 견고한지 늘 확인해야 한다. 그것 잊어버리고 이것저것 끌어 모아 머리 수 채워 대응하자는 임기응변식 방식으론 희망도 없고 그래봐야 정치 폭력 능력에선 촛불을 이기지도 못한다. 바른 이념 가치로 선다는 것이 본질이고 그게 한국 민주주의를 촛불 이전과 촛불 이후로 나누는 것을 막는 길이다.

김행범 객원 칼럼니스트(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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