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4인 공동기고]싱가포르 美北 정상회담 이후를 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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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박휘락 국민대 정치대학원장, 송대성 전 세종연구소장, 신원식 전 합참 전략본부장(사진=연합뉴스, PenN)
(왼쪽부터)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박휘락 국민대 정치대학원장, 송대성 전 세종연구소장, 신원식 전 합참 전략본부장(사진=연합뉴스, PenN)

“큰 기대감을 가지고 상자를 열었지만 안은 비어 있었다.” 6·12 미북 정상회담이 내놓은 공동발표문을 보고 세계의 전문가들이 내놓은 일성(一聲)이었다. 필자들의 뇌리에도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는 어려울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계산하면서 북한과 타협할 것 같다.” “한미동맹이 유명무실해질 것 같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뿌리채 흔들리는 최악의 위기가 올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기초하는 피상적 분석일 뿐, 실제로 북핵 문제가 어떤 모습으로 어디로 흘러갈지 예상하기는 매우 어렵다. 북한의 실제 동기(動機)와 미국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가설(假設)들이 존재하고 어떤 가설이 실제화되느냐에 따라 많은 시나리오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싱가폴 회담 후 눈에 보이는 것은 북핵 폐기 여부는 여전히 불분명함에도 동맹은 약화되고 한국의 안보는 위태로워지는 모습이다. 하지만, 발표문에 드러나지 않은 미북 간 합의가 있는지 또는 미국의 숨겨진 전략이 무엇인지에 따라서는 ‘좋은 역사를 열어가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고,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때문에 향후 전개될 협상과 결과에 따라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자신들의 기존 논리에 유연성을 더하거나 논리 자체를 수정해야 할 수도 있다.

일단 수혜자는 김정은, 싱가포르 그리고 중국

발표문에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핵폐기(CVID)’를 의미하는 표현이 없음은 물론 북한 비핵화의 강도, 속도, 방법 및 절차 등에 관한 어떤 원칙도 보이지 않는다. 북한이 ‘북한과 미국의 상호 핵군축‘ 의미로 사용해온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돈이 많이 들고 도발적인 전쟁게임을 중단하겠다“고도 했다. 연합훈련을 ‘북침연습’이라고 하는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한 셈이다. 4·27 판문점선언보다 진일보된 북한 비핵화 방안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의 상황만을 놓고 본다면 싱가포르 회담의 최대 수혜자는 핵지렛대를 앞세우고 엄청난 외교적 위상을 획득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었고 그 다음은 짭짤하게 국가홍보전을 펼친 싱가포르였다. 북한의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 중단과 연합훈련 중단을 맞바꾸자고 제안했던 중국 역시 체면을 챙기는데 성공했다.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 적지 않은 단기적 정치이익을 얻었다는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 개인도 수혜자일 수 있고, 한국 정부의 ‘달빛정책’도 수혜자일 수 있다. 합의의 내실성을 떠나 일단 미북 정상회담의 성사 자체만으로도 중재외교의 결실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이 게임의 최대 피해자는 한국의 안보와 동맹이었다.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하는 한국

현재 상황에서 미래를 예상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동기와 미국의 역할과 관련하여 몇 가지 가설을 설정하여 분석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래서 필자들은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 노력과 함께 안보원칙도 준수해주기를 바랬다. 우선, 북한의 동기에 대해서 두 개의 가설이 가능하다. 하나는 북한 정권이 확실한 핵포기를 통해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개혁개방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선의(善意)를 가졌을 것으로 보는 가설이다. 다른 하나는 핵지렛대를 바탕으로 미국을 움직여 한반도로부터 미국을 몰아내고 연방제 통일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는 대남전략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는 가설이다. 미국의 역할에 있어서도 두 개의 가설이 존재한다. 첫 번째 가설은 트럼프라는 이질적인 지도자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동맹의 가치를 존중하고 세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좋은 경찰(good cop)’의 역할을 자버리지 않을 것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제일주의’와 ‘경제민족주의’의 기치아래 동맹정책이나 북핵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도 단기적·가시적 이익을 중시하는 ‘거래자(transactor)’의 역할에 집중할 것이라는 가설이다.

만약 북한의 ‘선의’와 미국의 ‘좋은 경찰’ 역할이 현실에서 만난다면, 향후 북한의 비핵화는 순항할 것이며, 정부의 달빛정책은 ‘남북상생 시대의 개막’이라는 역사적 성과를 거둘 것이다. 북한의 ‘선의’와 미국의 ‘거래자 역할’이 합쳐지는 경우에는 미국이 한국의 안보에 불리한 ‘헤픈 양보들’을 제공할 수 있지만, 북한이 선의를 고수하는 한 안보가 위험해지지 않을 것이고 달빛정책도 순항할 것이다. 북한의 ‘대남전략’이 미국의 ‘좋은 경찰’ 역할과 부닥친다면 북한 비핵화는 난항을 겪을 것이며, 후속 핵협상 자체가 좌초할 수도 있다. 북핵 문제는 재부상할 것이고 한반도는 다시 대결국면으로 복귀할 것이다.

한국안보에 있어 최악의 시나리오는 북한의 ‘대남전략’과 미국의 ‘거래자 역할’ 간의 만남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의 근간을 흔드는 대북 양보들을 남발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핵대화의 전개 그 자체로 향상된 정치입지를 가지고 재선준비에 돌입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정부 역시 ‘달빛정책의 성공’과 ‘동맹공조 성공’을 자축할 수 있을 것이다. 협력적인(?) 언론까지 가세한다면 국민은 ‘평화의 환상’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신속한 종전선언, 평화협정, 연합훈련 중단,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요구하는 좌파의 주장이 확산될 것이며, 국민의 안보의식은 희석·해체될 것이다. 한국 국민이 명심해야 할 것은 북한의 ‘대남전략’과 미국의 ‘좋은 경찰’ 역할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위기와 긴장’보다는 북한의 ‘대남전략’과 미국의 ‘거래자’ 역할이 합쳐지는 상황이 훨씬 더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전자의 경우 국민적 단합과 동맹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내부분열에 동맹의 이반이 수반되면서 한국의 안보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하고 자유민주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생사(生死)의 기로로 내몰릴 수 있다.

다만, 미국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또 하나의 가설이 존재할 수 있다. 미국이 ‘좋은 경찰’이나 ‘거래자’ 역할을 넘어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보지형을 바꾸는 ‘게임체인저(game changer)’의 역할을 추구할 것이라는 가설이다. 즉, 통큰 양보와 경제지원을 통해 북한주민들로 하여금 더 이상 미국을 적대국으로 간주하지 않도록 만들어 한반도에 독일식 통일여건을 조성함과 동시에 북한을 중국으로부터 떼내어 동북아 신냉전 구도 자체를 바꾸려 한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북한의 세습형 수령독재 체제는 ‘미제에 대한 적개심’을 먹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은 경제가 어려운 것이나 핵개발을 한 것도 모두 ‘미제 승냥이들의 공화국 압살정책’ 때문이라고 선선하면서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체제를 유지해왔는데, 대미 적개심이 소멸된 이후에도 그 체제가 현재대로 존립할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트럼프 행정부가 실제로 이 정도의 큰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지에 대해 현재로서 확인할 방법은 없으며, 한낱 ‘희망적인 생각(wishful thinking)’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 또한 상정할 수 있는 가설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많은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채비를 차려야 하고, 국민도 그만큼 유연해져야 한다. 기존의 찬성과 반대를 고수하기보다는 상대편이 논리도 실현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더 큰 국민적 합의가 가능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동맹관리도 안보원칙 준수의 일환

이런 시기일수록 정부의 역할이 막중하다. 평양정권이 선의를 가지고만 있다면, 남북 및 미북 정상회담은 한반도와 동북아 그리고 세계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아시아판 몰타선언’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대남전략’ 가설이 진실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국민은 정부가 대북 화해협력 노력과 안보원칙 준수를 병행해 주기를 바란다. 특히 동맹의 유명무실화를 방조하는 것은 안보원칙을 준수하지 않는 것이며, 같은 맥락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동맹경시 발언이나 상업주의적 접근이 ‘진담’이 아니기를 희망한다. 그럼에도 정부는 그것이 ‘진담’인 경우에도 대비해야 한다. 정부는 어떤 경우에도 미국의 ‘거래자’ 가설과 북한의 ‘대남전략’가설이 현실에서 만나는 최악 상황은 예방해야 하며, 그래서 동맹관리에 집중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이는 미국이 예뻐서가 아니라 북핵 위협으로부터 유사시 한국을 도울 나라는 미국 뿐이라는 현실인식에 관한 문제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동맹의 미래에 대해 많은 고심을 해주기를 주문한다. 한미동맹은 70년 역사를 거치면서 수만 개의 채널로 구성된 ’국민 대 국민‘ 간의 관계로 발전해 왔다. 한미동맹은 한국의 방위는 물론 미국의 아시아전략과 세계전략에 있어서도 핵심적 중요성을 가진다. 동맹을 통해 양국 국민이 공유해온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가치들은 단순한 돈계산으로 가늠할 수는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실제로 한미동맹을 경시하고 있다면, 이는 중국의 팽창주의가 아시아 안보질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시대에 미국의 세계전략과도 부합되지 않는다.

국가안보는 도박의 대상이 아니며 만전지계(萬全之計)로 접근해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이다. 북핵 폐기라는 결과를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방법과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국민의 불안을 헤아리며 중지를 수렴해야 한다. 한미 양국의 정부는 한국과 미국 내에서도 표출되고 있는 우려의 목소리들을 경청하고 수렴해야 한다. 북한은 지금까지 한번도 핵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싱가폴 합의는 북한에게 제공하는 마지막 기회의 성격이 크다. 과거의 교훈들에 비추어 본다면, 북한의 합의 불이행을 제재하는 방법과 수단을 강구하지 않은 채 북한의 성실한 이행을 바라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지금까지는 “믿되 검증하라(Trust but Verify)”라고 했지만, 이제부터는 “불신하면서 검증하라(Distrust and Verify)”라고 요구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공동기고 : 김태우(前 통일연구원장), 박휘락(국민대 정치대학원장), 송대성(前 세종연구소장), 신원식(前 합참 전략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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