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 칼럼] 한 스타 저술가의 터무니없는 오독 - 라캉의 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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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06.13 10:20:16
  • 최종수정 2018.06.14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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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서울대 불어불문학 전공.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실재(實在)’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개념이다. 영어에서 대문자 the Real로 표기하는 그의 실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학자라 하더라도 이 용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큰 흠이 아니다. 인문학은 그 범위가 한 없이 넓어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많은 저서와 강연으로 20~30대 여성 독자들의 멘토를 자처하는 한 문학평론가가 이 용어를 잘 못 이해하고, 그 잘못된 해석을 저서와 강연을 통해 확산시킨다면 그건 다른 이야기다. ‘문학과 심리학을 연결한 감성적이고 따뜻한 글로 현대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인문학자’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 다니는 J 작가의 경우다.

도대체 라캉의 실재 개념은 무엇인가?

우선 라캉은 인간의 심리를 상상계(the Imaginary Order), 상징계(the Symbolic Order), 실재계(the Real Order) 등 3개 차원으로 나눈다.

상상계

여기 귀여운 아기 하나가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바라본다. 아기는 거울 속에 비친, 난생 처음 보는 자기 모습이 신기하고 재미있어 어쩔 줄 몰라 한다. 거울 이미지에 매혹된 아기는 마침내 거울 속 아기가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다. 이 동일시 과정을 통해 아기는 자아를 형성한다. 태어난 지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아기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소위 심리학에서 말하는 거울 단계이다. 이 시기를 라캉은 상상계라고 명명했다.

상상계 속의 아기는 어머니와 이자적(二者的)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세상에는 자기와 어머니 두 사람 밖에 없다. 거울 속의 자기 영상과 나르시스적 관계를 맺는 것과, 어머니의 가슴에 묻혀 구강적 성감대의 쾌감을 즐기는 것은 구조적으로 같다. 그러나 어느 날 이 이자적 관계 안에 제3자가 등장한다. 아버지의 출현이다. 어머니와 배타적으로 맺고 있던 이자적 관계 속에 침입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달리 엄격하다. 아버지는 법의 세계를 대변한다. 이 단계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발생한다. 아이는 아버지에 대해 증오에 가까운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아이는 아버지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처럼 인간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이자적 관계에서 삼자적 관계로 이행하지 않는 한 어른이 되지 못하고, 사회생활도 영위할 수 없다.

그럼 왜 상상계라는 말을 붙였을까? 그것은 이 시기가 이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상상계는, 실제로 지각된 이미지건 아니면 상상된 이미지건 간에, 여하튼 이미지의 차원이다. ‘상상’(imagination)이라는 말로 우리는 흔히 허구의 공상이라는 의미를 떠올리지만 원래 상상은 이미지 즉 상(像)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상상계는 의식적, 무의식적 이미지들의 세계이고, 언어 이전의 영역이다.

거울 단계의 아기를 예로 들었다고 해서 상상계를 단순히 어린이 성장 발전의 한 단계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한 인간이 일생 동안 지속적으로 갖고 있는 주체성의 한 측면이다. 다 큰 어른도 어느 때는 상상계의 심리 상태를, 또 어느 때는 상징계의 심리상태를 갖게 되는 것이다.

상징계

이자적 관계를 극복한 후 새로 진입해 들어간 삼자적 관계의 세계, 그것이 바로 상징계다. 상상계가 자연의 영역이라면 상징계는 문화의 영역이다. 우리말로 ‘상상’, ‘상징’의 발음이 비슷하여 약간 헷갈릴 수도 있으나 영어로는 imagination과 symbol이다. 상징계로의 진입은 신체를 기반으로 하던 물질적 관계에서 사회적 교환의 관계 즉 문화 속으로 진입함을 의미한다. 아이가 어른의 세계로 진입한 후 살아가는 세계, 그것이 상징계다. 상징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세계다.

그런데 왜 상징이라는 말을 붙이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는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란 곧 상징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꽃’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자. 꽃이라는 단어는 실제의 꽃 그 자체가 아니라, 실제의 꽃을 지시하기 위한 기호 즉 상징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상징이다. 상상계가 이미지의 차원이라면 상징계는 언어의 차원이다.

사회란 언어의 세계이다. 사회의 모든 것이 언어를 전제로 한다. 법도, 학문도, 교육도, 계약도 모든 것이 언어다. 한 사회가 사회 구성원 전체를 계몽하고 교육시키는 것도 상징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기본적 사회제도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의 본질은 상징적 질서이고, 언어적 질서이다. 이처럼 언어에 의해 매개되는 문화의 세계라는 점에서 라캉의 상징계는 레비-스트로스의 문화(order of culture) 개념과 동일하다.

상징계가 언어적 차원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상징계와 언어가 곧 등가의 관계는 아니다. 상징계가 언어를 독점하고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상상계와도 관계가 있고, 실재계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상상계 안에서 아이는 언어를 통해 주체가 구성되고,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도 언어와의 접촉을 통해서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상징의 세계로 들어간다. 한편 주체는 언어를 통해 욕망과 감정을 나타내는데, 욕망이란 실재계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여하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상징계와 상상계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문화와 사회는 상징계이다.

실재계

그렇다면 실재계는?

‘실재’라는 말이 무색하게 라캉의 실재(the Real)는 현실(the reality)이 아니다. 라캉의 실재는 상징계의 밖에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현실 밖에 있는, 현실이 아닌, 현실 너머의 어떤 것이다. 라캉의 실재는 경험적 실재와 구별되고, 초감각적 세계의 추상적 실재와도 구별되는 개념이다. 경험적 실재란 우리 주변의 모든 구체적 물건들을 뜻하고, 추상적 실재란 ‘자유’, ‘정의’ 같은 추상 명사들을 뜻한다. 그러나 라캉의 실재는 이것들 중 그 어떤 것과도 상관이 없다.

상징계가 언어적 세계라면 실재계는 언어를 초월하는 언어 밖의 세계이다. 우리의 현실은 언어로 된 세계인데, 실재는 언어로 매개되지 않는 세계이다. 그것은 언어에 포함되지 않고, 언어 외부에, 또는 주체 외부에 있는 성(性)과 죽음의 차원이다. 결국 실재계는 불안의 대상이다. 그 세계 앞에 서면 모든 단어들이 얼어붙고 모든 범주들이 추락하는, 그런 불안의 대상이다.

상징화를 거부하므로 즉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실재계는 표상이 불가능하다. 상상할 수 없고, 상징계 안에 통합시킬 수도 없어서, 우리는 도저히 그 곳에 도달할 수가 없다. 현실 속에서는 결코 제시될 수 없지만 우리가 현실과 밀착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현실 끝에 한계가 있고, 그 한계 너머로 속이 텅 비어 있는 심연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실재다. 실재는 우리가 결코 접근할 수 없는 끔찍한 한계, 즉 그것을 건드리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한계이며, 동시에 그 너머의 공간이다.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를 생각해 보자. 연인 유리디체를 지하세계에서 구출해 나오는 오르페우스에게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가 내려졌다. 돌아서서 뒤에 따라오는 연인을 바라보는 순간 연인이 죽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 중간에 오르페우스는 참지 못하고 뒤돌아보았고, 연인 유리디체는 죽었다. 실재의 은유로 이것만큼 적당한 것이 없다. 실재에 가까이 가는 것은 치명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현실과 실재를 가르는 한계는 근본적 불가능성의 표지이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넘을 수 없고, 거기에 가까이 가기만 해도 죽는다. 그리고 그 너머는 금지되어 있다.

실재는 그러니까 실체도 없고, 물질성도 없다. 일체의 상징화를 거부하므로 그 어떤 말로도 표상할 수 없다. 그러나 굳이 표현하자면 그것은 공허(空虛, the void)이다. 실재는 텅 비어 있는 빈 공간이다. 칸트의 물(物)-자체와 비슷한 개념이어서, 라캉은 그것을 대문자 사물(the Thing)로 표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실재, 그러니까 사물은 욕망의 대상이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필요 - 요구 - 욕망

인간의 욕구에는 세 개의 차원이 있다. 필요(need)와 요구(demand)와 욕망(desire)이 그것이다. 필요는 갈증, 식욕 등 생리적, 생물학적인 욕구다. 목마르면 물마시고 싶고, 배고프면 먹고 싶다. 확실한 대상을 목표로 하므로 충족이 가능하다.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밥을 먹으면 된다. 이것이 필요다.

그런데 목마르다고 떼쓰는 아이에게 물을 주어도 여전히 짜증을 부리는 경우가 있다. 이때 아이는 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물을 넘어서서 엄마의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아이에게 아무리 물을 주어보았자 불만이 충족될 리 없다. 표면적으로 요구는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것으로 간주되는 대상을 겨냥한다. 즉 아이는 물을 요구한다. 그러나 요구의 진정한 목적은 이런 대상을 제공할 능력이 있는 타자의 사랑이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물을 가져다주는 엄마의 사랑이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요구한 물은 짜증을 내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그 표면적 대상이 주어진다 해도 당연히 만족은 없다. 아이의 욕구는 실은 다른 것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요구다.

타자가 우리의 요구에 응하여 대상을 제공할 때 이 대상은 단순히 우리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요구한 대상을 얻을 때마다 주체는 “이것은 그것이 아니다”라는 묘한 경험을 겪게 된다. 자신이 요청한 것을 얻었는데도 요구는 완전히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요구의 진정한 목적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타자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바로 여기서 생겨난다. 욕망은 생리적 욕구와도 다르고, 사랑의 요구와도 다르다. 욕망의 대상은 라캉이 사물(the Thing)이라고 부르는, 실재이다. 그런데 실재란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허공이다. 다시 말해 결핍 상태이다. 따라서 욕망이란 결핍에 대한 욕망이다. 욕망은 구체적 물질성인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결핍과의 관계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원하므로 그 욕망이 충족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말했듯이 욕망의 존재 이유는 만족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욕망을 재생산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현실 세계는 주체로 하여금 대문자의 사물(the Thing) 즉 절대적 행복을 포기하고 대체물에 불과한 기표(記表, 시니피앙)들에 만족하도록 종용한다. 그러나 이 대체물은 결코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없다. 원했던 승진을 했는데 여전히 불만족스럽고, 원했던 명품 가방을 샀는데 여전히 마음이 헛헛하다. 매번 우리는 “이것은 그것이 아니다!”라는 공허감을 느낀다. 왜 그런가? 우리의 욕망의 대상은 결핍이기 때문이다. 결핍은 우리에게 영원히 만족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욕망의 대상인 실재 혹은 사물은 욕망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욕망이 만들어내는 대상이기도 하다. 라캉은 하이데거의 항아리의 비유를 인용하여 그 과정을 설명한다.

항아리의 본질은 자기 한 가운데 있는 텅 비어 있는 공간이다. 겉의 도자기가 아무리 견고하고, 디자인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한 가운데 텅 빈 공간이 없으면 항아리는 항아리가 아니다. 도공이 힘들게 항아리를 만드는 것은 바로 이 텅 빈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이다. 아무것도 아닌 텅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해 도공은 그렇게도 힘들게 창작의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이 텅 빔은 항아리가 완성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공이 항아리를 만들면서 직접 제조한 것도 아니다. 텅 빈 공간은 도공이 항아리를 만들 때 저절로 생겨난다. 욕망하는 사람은 항아리를 만드는 도공과 비슷하다. 그가 욕망할 때 동시에 텅 빈 실재의 공간이 움푹 파인다. 그것은 욕망의 발생과 함께 동시에 생겨나 욕망 안에 움푹 파여 새겨진 공허다.

실재와 숭고 미학

라캉의 실재는 욕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 욕망은 불가능한 욕망이다. 라캉은 그것을 주이상스(jouissance)라는 말로 구체화시킨다. 영어로 enjoyment인 주이상스는 향유, 쾌락, 즐거움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다. 영어의 enjoyment와 달리 프랑스어 주이상스에는 성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예를 들어 통렬한 고통이나 공포 끝의 오르가즘 같은, 고도의 성애적인 죽음 충동이다. 죽음에 이를 정도의 극한적 고통이 주는 지고의 열락(悅樂)으로, 현실 세계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절대적 쾌락이다. 주이상스는 이런 쾌락을 향유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또는 그 쾌락을 주는 대상이기도 한다.

우리의 심리적 삶은 어쩌면 쾌락과 고통을 조절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너무 많은 쾌락을 추구하면 결국 생명 자체가 종말을 맞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쾌락을 끝까지 추구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한 중간에서 되돌아온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쾌락원칙(principle of pleasure)이다. 라캉식으로 말하면 사물과의 치명적인 조우를 피해, 사물의 주변을 빙 둘러 되돌아 와, 현실의 기표(記表)에 그냥 만족하고 사는 것이다.

쾌락 원칙의 선을 넘은 치명적인 쾌락, 그것이 바로 주이상스다. 그냥 쉽게 얻어지는 밋밋한 쾌락이 아니라 극심한 고통을 통과 한 후 그 너머 세계에서 맛보는 절대적 쾌락이다. 성녀 테레사의 경우가 그것이다. 16세기 스페인 르네상스 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그녀의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천사의 손에는 황금으로 된 긴 창이 들려 있었고, 그 쇠 끝부분에는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창으로 그는 내 가슴을 여러 차례 찔렀고, 그것은 내 창자까지 관통했다. 그가 이것을 빼내었을 때 창자도 함께 빠지는 듯 했다. 그 고통이 너무나 예리해서 나는 몇 차례 신음했다. 그러나 이 강렬한 고통은 너무나 달콤해서, 아마 그 누구라도 이것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때 내 영혼을 가득 채운 것이 신(神)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비록 육체가 이것을 공유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이다. 영혼과 신 사이를 흐르는 사랑의 말은 너무도 달콤하다."

(위쪽)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아래쪽) 베르니니의 ‘성녀 테레사’ 부분

천사의 불화살로 심장이 찔리는 고통과 이때 육체가 느끼는 달콤한 희열의 극치 그리고 신성의 황홀경을 그린 이 전율적 고백은 환상 속의 체험이지만, 실제로 그녀는 자기 몸에 스스로 고문을 가하는 고행을 자주 했다고 한다. 로마에 가면 17세기의 조각가 베르니니의 조각상 ‘성녀 테레사의 엑스타시’(Ecstasy of St Theresa, 17세기/사진 왼쪽)가 있다. 이 작품을 역시 로마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피에타’(15세기/사진 왼쪽)와 비교해 보면 우리는 라캉의 주이상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베르니니의 테레사가 피에타의 성모 마리아에 비해 얼마나 강렬한 숭고미를 표현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어쩌면 모든 종교적 엑스터시는 은밀하게 성적 욕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 모른다.

결국 라캉의 실재란 실체적 현실이 아니다. 우리 주체의 내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주체 밖에 있는 어떤 것이다. 주이상스, 또는 대문자 사물과 동의어로 절대적 성적 쾌락 또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다. 프로이트의 죽음의 충동과 비슷하다. 에드먼드 버크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숭고미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철학과 대중문화를 접목시키는 것으로 유명한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의 실재 개념을 자주 영화분석의 주요 틀로 사용하고 있다.

실재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

그런데 J 작가는 라캉의 실재를 자기계발의 도구로 삼고 있다. 물론 철학자의 개념을 자기계발의 도구로 삼을 수는 있다. 다만 잘못 이해한 틀린 개념을 젊은 여성 독자들에게 전파시키는 것은 학문에 대한 모독이다. 그녀의 글과 강연은 대부분 ‘나는 이렇게 성공했다’로 요약되는데, 거기서 라캉의 실재는 마치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던 잠재력’ 정도로 표현된다. 그녀가 실재를 발견하는 과정은 전설 속의 영웅이 용과 싸워 이기는 모험담과도 같다.

아직 성공하기 전, 심리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그녀의 마음속에는 ‘너는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객관적으로 보면 안 될 것 같지만, 주관적으로는 어떻게든 반드시 그걸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자기 안의 가장 빛나는 힘이 무지개처럼 용솟음쳐 올라 마침내 그 괴물과 싸워 이겼다. 자신에게 과연 그런 무시무시한 잠재력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도저히 안 될 것 같다’는 공포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유의 세계가 펼쳐지더라는 것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자기 안의 낯선 자아, ‘자기 안에 있는 용감한 자기’, 이것이 바로 라캉의 ‘실재계’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그녀는 자랑스럽게 모험담을 마무리했다. 터무니없는 해석이다.

과연 그녀의 강연을 들은 어떤 블로거는 자기 블로그에 실재계의 감동을 다음과 같이 메모해 놓았다. “이루지 못할 것 같은 것을 이루는 기적! 상상계를 넘어 실재계로! 현실 속의 제약이 있어야 실재계가 존재한다. 매일 싸우면서 내 안에서 원하는 바를 찾는 것이 조금씩 많아지면 실재계가 어느 순간 열린다. 내가 직접 해야 실재계로 들어갈 수 있다.”

이건 청춘에 대한 힐링이 아니라 일종의 학문적 범죄가 아닌가.

이념의 천박성

청춘의 아픔은 모두 사회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J 작가는 철학적 무지에 대한 신념만큼이나 정치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도 한 치의 회의가 없다. 작년 대선 때는 문재인후보에게 ‘주적을 밝히라’고 다그친 홍준표후보에 대해, 대중의 증오와 분노를 격발시키는 매카시즘 광풍이라고 질타했고, 촛불 시위의 놀라운 결과에 대해서는 마치 어린 동생에게 조곤조곤 말하듯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나는 별로 특별한 힘이 없으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세상을 점점 더 나쁘게 만들 수 있어요. 촛불시민들이 해낸 일을 보세요. 처음에는 촛불 하나로 시작되었잖아요. 저마다 ‘이런 나라에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촛불을 들어 내 마음을 표현하자’라는 소박한 믿음으로 광장으로 나갔는데, 몇 년 동안 전혀 해결되지 못한 채 더 나빠지기만 하던 것들이 이제 가능해졌어요. 기적 같은 일이에요. 하지만 결코 신비로운 기적이 아니죠.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 촛불을 응원하는 사람들 모두가 하루하루 조금씩 만들어낸 지극히 현실적인 힘이지요. 우리 삶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하겠어?’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도 단 한 사람이 매일매일,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노력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정말로 세상이 바뀌어요. 그 한 사람의 힘을 믿을 때 나 자신뿐 아니라 내 주변의 세상, 우리가 속한 더 커다란 세상도 바뀔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서구 철학의 오류를 지적하며, 고대 그리스어의 오역에서부터 서구 사유의 뿌리 없음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실체(substance)와 우연성(accident)이라는 철학 용어의 기원을 논하면서였다. 우리 눈에는 완벽하고 견고하게만 보이는 독일 철학을 천박(淺薄)하다고 말하는 것도 놀라웠고, 그 원인이 잘못된 번역에 있다고 말하는 것에도 깊은 충격을 느꼈었다.

독일 사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천박한 한국 사회의 정신성이야말로 서구 철학 개념의 오역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박정자 객원 칼럼니스트(상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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