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장담컨대 현재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국제 정치 드라마는 아무리 뛰어난 할리우드 작가라 하더라도 절대 못 쓰는 시나리오다. 상상력이 따라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시나리오란 나름대로 개연성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지금 현실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는 그런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작가는 종이에 이야기를 옮기기 전에 피칭이란 걸 한다. 피칭이란 먼저 말로 주변의 반응을 살피는 것인데 “이런 얘기 어때?” 하고 현재 진행 중인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돌아올 소리는 뻔하다. “에이. 그게 말이 되냐.” 그렇다. 말이 안 된다. 난데없이 북ㆍ미간에 정상회담을 한다고 하더니 며칠 있다가 서로 악담을 퍼부은 끝에 판을 깨고 한 쪽에서 하지 말자 통고를 보내자마자 다른 한쪽에서 하루 만에 꼬리를 내리는 이런 드라마는 영화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다. 오직 현실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이 경이로운 이벤트에는 여러 나라가 얽혀있다. 먼저 미국과 북한이다. 여기에 회담의 한 축인지 운전자인지 북한의 대변인 겸 보디가드인지 정체성이 오락가락하는 남한이 있다. 그리고 어떻게든 발언권 내지 숟가락을 얹으려 드는 중국과 일본과 러시아가 있다. 북ㆍ미 정상 회담을 둘러싸고 촉각을 곤두세우는, 성향도 취향도 다른 이 여섯 나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쉬운 문제에 바로 답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이 중 한 나라가 정답에서 이탈하여 독창적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남한이다. 답은 국익이고 다들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남한만 대체 목표가 무엇인지 뚜렷하지 않은 채 그저 지갑을 열 생각만 하고 있다. 모두가 자기 지갑을 채울 계획에 후끈 달아있는데 대체 이 나라는 왜 이렇게 따로 놀고 있을까. 소생의 짧은 생각으로는 국가관이다.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이 역사적으로, 학문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서적으로 완전히 궤도 이탈한 끝에 이런 기이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가 추구해야 할 것은 선善이다?

인터넷 검색창에 국가란 무엇인가를 쳐 보면 블로그, 카페, 뉴스를 점령하고 있는 한 권의 책이 있다. 유시민이 쓴 ‘국가란 무엇인가’인데 그만큼 인기가 있다는 이야기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의 서술에 공감하고 있다는 증거겠다(책을 거의 옮겨 놓다시피 한 리뷰가 많아 다행히 책을 사야 하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유시민은 먼저 원론적인 측면에서 국가론을 설명하고 있다. 자유주의국가론, 국가주의, 목적론적 국가론, 마르크스 국가론이 그 넷인데 왜 그렇게 복잡하게 설명하는지 모르겠다. 국가론은 딱 둘이다. 하나는 낭만주의 국가론으로 여기에 부합하는 게 유시민 자신의 국가관이다. 옮겨보면 이렇다.

“국가가 추구해야 할 것은 선善이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수립하는 국가를 원한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국가, 국민이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존중하는 국가, 그런 국가가 훌륭한 국가다.”

멋진 말이다. 100% 동의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 세계에 국가가 하나뿐일 경우에나 가능한 얘기다. 세상에는 많은 국가들이 있고 이들 국가들의 수준은 불행히도 중 2 수준이다. 이기적이고 감정적이며 어느 순간 폭력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게 국가라는 존재다. 그래서 유시민의 국가론은 낭만적이다. 현실에는 없고 그저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그런 국가다. 다른 하나는 현실주의 국가론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문장을 하나 빌려 와 보자.

“절대적으로 자기 조국의 안전이 걸린 문제일 때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은가, 자비로운가, 잔혹한가,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 치욕스러운가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양심의 가책을 제쳐놓고 인간은 모름지기 어떤 계획이든 조국의 생존과 조국의 자유를 유지하는 계획을 최대한 따라야 한다.”

어떠신가. 듣기만 좋은 낭만주의 국가론과 달리 가슴에 팍팍 꽂히지 않는가. 물론 100% 동의하지 않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현실이다. 가혹하다고 해서 현실을 외면하거나 거부할 수는 없다. 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국가관을 기본 전제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인권과 평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그래야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인류가, 세계가 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훌륭한 국가에서 살고 싶어요?

낭만주의 국가론의 다른 이름은 일국一國 국가론이다. 자국 내로 한정시켜 놓고 국가에 대해 논하는 수법으로 역시 세계에 국가가 하나뿐일 때나 통하는 얘기다. 그러나 국가론이란 반드시 다른 국가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이것은 민족주의도 마찬가지). 그럼 모든 국가가 착하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러나 역사책을 한 챕터라도 읽어보신 분이라는 이런 세월은 이제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실 것이다. 몸으로 실감하고 싶다면 담배 피우는 중 2들 앞에 가서 흡연은 건강에 나쁘고 주변에도 피해를 끼치니 평화를 위해 금연하자고 설교해 보시라. 슬프게도 국가들 사이의 관계란 게 딱 이런 수준이다. 유시민의 글을 한 문장 더 옮겨보자.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세우고 모든 종류의 위험에서 시민을 보호하며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훌륭한 국가다.”

역시 아름다운 얘기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위험’에서 시민을 보호할 때 국가는 유시민이 말한 대로 계속해서 선을 추구할 수 있을까.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이란 사람이 있다. 스웨덴 왕족으로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학살로부터 수많은 유대인의 목숨을 구했다. 유대인들에게는 구세주 같은 인물로 감사장까지 받았는데 이 사람이 3차 중동 전쟁 때 UN 중재관으로 온다. 이스라엘은 내심 반겼지만 백작이 이스라엘에 불리한 보고서를 연달아 내자 바로 암살해 버린다. 이스라엘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이스라엘은 앞에서 나온 대로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은가, 자비로운가, 잔혹한가,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 치욕스러운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게 국가가 ‘모든 종류의 위험’으로부터 시민을, 국민을 보호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동의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국가는 초지일관 ‘이기적’이어야 하고 국가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살아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시민의 낭만주의는 그냥 병이라 치자. 짜증나는 게 반복해서 등장하는 ‘훌륭한 국가’라는 표현이다. 이건 마치 좋은 나라, 나쁜 나라처럼 중2 때나 하던 분류법이다. 세상에 훌륭한 국가가 어디 있는가. 가끔 훌륭한 국민 같은 게 있는 경우는 있지만 국가 자체가 훌륭한 것은 현실에서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기어이 그런 표현을 써야만 한다면 경제를 살리고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 정도가 그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국가관에 정답은 없다. 각자의 가치관에 따른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쁜 것을 전제로 선을 추구하는 것과 선한 것을 바탕으로 답을 모색하는 것 중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올바른 선택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이 올바른 국가관이 될 것이다. 불행히도 현재 달동네 정부의 국가관은 이와는 전혀 무관한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평화, 정의, 자유 뭐 이런 아름다운 말들로 살짝 덮어 놓은 쓰레기통을 보는 느낌이다. 가리는 건 된다. 냄새는 어쩔건데. 그리고 언제까지 그게 가능할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담론으로 국가관을 주장하고 설파하는 것은 한 나라를 자살로 몰고 가는 지름길이다. 나는 훌륭한 국가가 아니라 ‘안전한’ 국가에서 살고 싶다.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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