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앞으로 회담 또다시 취소하거나 회담 중간에 자리 박차고 나갈 수 있다”

북한에 대한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를 '일괄 타결'하겠다고 공언해 온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1일(현지 시각) 김영철을 만난 뒤 "천천히 갈 수도 있다"며 말을 바꿨다. 이에 대해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를 추진했던 과거 미국 정부들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김영철을 80여 분간 만난 후 기자들에게 "솔직히 나는 오늘 그들(북한)에게 천천히 하라고 말했다“며 ”우리는 빨리 갈 수도 있고, 천천히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 속도를 늦추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기존의 협상 원칙인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NYT)는 2일 트럼프 대통령이 사실상 북한이 요구하는 '단계적 해법'을 받아들인 것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개인명의 사설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과 협상을 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WSJ은 “진지한 협상은 오직 시간과 지식이 있는 양측의 전문가들에 의해서만 행해질 수 있으며 정상회담은 핵 외교를 위한 적합한 장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입장을 누그러뜨렸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더 이상 김정은이 핵무기를 즉시 폐기해야 한다는데 동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트럼프 대통령은 싱가포르 회담이 서로를 알아가는 기회가 될 것이며 과정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며 “북한이 아직 공식적으로 비핵화 의지를 밝히지 않았는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정권에 대한 최대 압박을 가하기로 한 맹세를 저버리고 김정은의 편지와 미국의 실질적인 입장 변화를 맞바꿨다”고 지적했다.

WP는 “지난 수개월 동안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미국 행정부가 요구하는 CVID에 즉시 동의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며 평양은 각각의 단계마다 북한정권에 보상을 해주는 단계적 비핵화를 원한다고 경고했다”며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이 이러한 반복을 피할 수 있는 전략이 있느냐하는 것”이라고 했다.

WP는 또 “일주일 전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은 매우 빠른 시간 안에 핵무기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지난 금요일에는 ‘북한과 공식적으로 한국전쟁을 끝내는 평화조약을 체결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대답했다”며 “그러나 그로 인해 미국이 얻을 수 있는 반대급부는 무엇인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앞서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잔인하고 공격적이며 예측불가능한 북한정권과 공식적인 평화협정을 맺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WP는 “외교는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을 때만 효과를 발휘한다”며 “미 행정부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완전한 북한 비핵화에는 못 미치지만 분명한 중간목표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어 “북한이 영구적으로 핵미사일 실험을 끝내기로 결심하는 것이 한 가지 목표가 될 수 있다. 또 다른 목표는 전문가들에 의한 북한 핵사찰”이라며 “범죄적 체제(북한정권)의 옆에 서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과시적인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만남’은 실질적인 북핵 해법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해리 카지아니스(Harry Kazianis) 미국 국가이익센터 국방연구국장은 3일(현지시간) 의회전문지 더 힐(The Hill)에 보낸 기고문에서 “오는 6월 12일 트럼프 대통령은 싱가포르에서 역사를 만들 수 있다”며 “김정은과의 회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전에 북한으로부터 신뢰할 수 있고 검증가능한 비핵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공동성명이나 과거와 같은 형태로 받아내지 못한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을 다시 한 번 취소하거나 심지어 회담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한다”고 했다.

더 힐은 “현 상태보다 덜한 조치를 취해 북한 핵무장을 받아들일 경우 이는 아시아와 전 세계에 핵확산이란 파급효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북한은 미국과 정상회담을 위해 큰 양보는 하지 않은 채 그러나 반대급부로 큰 보상을 요구하며 핵 서약을 할 수 있다”며 “이 경우 트럼프 행정부는 기꺼이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이며 김정은 정권을 장기간의 비핵화 플랜 속으로 데려갈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양연희 기자 yeonhee@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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