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을 찾은 윤석열 대통령이 19일 일본 히로시마 한 호텔에서 열린 히로시마 동포 원폭 피해자와의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3.5.19(사진=연합뉴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을 찾은 윤석열 대통령이 19일 일본 히로시마 한 호텔에서 열린 히로시마 동포 원폭 피해자와의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3.5.19(사진=연합뉴스)

5월 19일부터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G7 정상회의가 21일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폐막되었다. G7(Group of Seven)은 미국, 영국, 독일, 일본, 프랑스, 캐나다, 이탈리아 등 서방 선진국 일곱 개 나라를 지칭하며, 이 나라들의 정상들이 1975년부터 매년 만나서 국제현안을 논의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998년에는 러시아를 포함시켜 G8 회의로 확대되었으나 2014년 크리미아 반도를 강제 합병한 러시아가 축출됨으로써 다시 7개국이 되었다. G7 정상회의는 주요 선진강대국들의 정상들이 모여 경제, 안보, 환경, 기후 등 부상하는 국제현안들을 다루는 협의체로서 세계를 움직이는 영향력을 행사해한다. 이 회의는 주최국의 재량에 따라 G7 이외의 국가들도 ‘참관국’ 자격으로 초청해 왔는데, 금년에도 한국, 호주, 인도, 브라질,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8개 나라의 정상들이 초청되었다.

그래서 윤석열 대통령은 2박3일 간 히로시마를 방문하여 G7 확대회의 참석, 기시다 일본 총리와의 한일 정상회담, 한미일 정상 간의 만남,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등 숨가쁜 일정들을 소화했는데, 그중에서 특별한 사람들로부터 특별한 주목을 받았던 것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방문이었다. 두달 만에 세 번째의 한일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던 5월 21일 오전 윤 대통령 내외는 기시다 총리 내외와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앞에 나란히 서서 사자(死者)들을 추모하고 헌화했다.

지금까지 일본 총리가 한국인 원폭 희생자들을 참배한 적은 없었고 한국 대통령의 참배도 처음이었다. 하물며, 한일 두 나라 정상들의 동반 참배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어서 이 행사를 지켜본 사람들은 달라진 한일관계에 놀라야 했다. 그럼에도 놀라기만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78년전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있었던 일들이 앞으로 한반도에서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체통일과 체제유지라는 지고의 목표를 고수한 채 어제도 오늘도 핵무력 증강을 위해 발버둥치는 북한, 한국사회를 분열시키고 자유민주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발버둥치는 한국내 좌파세력들, 나라의 안위보다는 정치권력을 위해 발버둥치는 한국의 일부 정치인들 등을 생각하면 한반도가 핵참화와 무관하다는 보장은 도무지 성립하지 않는다. 이 부질없는 발버둥들이 초래할 미래는 과연 어떤 것일까?

무모한 발버둥이 초래한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의 참극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6월 백악관에서는 두 달전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제33대 대통령이 된 트루먼(Harry Truman)이 군 참모들과 격론을 벌였다. 육군은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전쟁을 끝내는 ‘몰락작전(Operation Downfall)’이 불가피다고 주장했지만 해군은 일본군의 결사항전 때문에 미군의 인명피해가 엄청날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미군은 태평양의 섬들을 탈환하면서 일본군의 결사항전에 진저리를 냈고, 오키나와에서만 5만여 명의 전상자에 1만2천5백 명의 전사자를 기록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7월 16일 뉴멕시코주 엘러모고도 사막에서 실시한 핵실험의 성공 소식을 들었다. 미국은 1941년에 착수한 맨하탄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를 통해 ‘기구(gadget),’ ‘꼬막소년(Little Boy)’ 그리고 ‘뚱보(Fat Man)’라는 이름이 붙여진 개의 원폭을 만들었는데, 그 중 ‘기구’를 터뜨려 본 것이다. 이를 계기로 미국 지도부의 생각은 상륙작전보다는 핵타격을 통해 항복을 받아내는 쪽으로 더욱 기울어졌다.

일본 전쟁지도부의 생각은 달랐다. 패전이 확실해진 후에도 천황 체제 유지, 자발적 전범 처리 등을 요구하는 ‘조건부 항복’을 제안했지만, 미국은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을 통헤 사실상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통첩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11월 상륙작전’이라는 Plan B도 준비하고 있었고, 미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포츠담회담에서 소련의 스탈린에게 만주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을 공격해줄 것을 요구했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는데도 일본의 지도부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항전한다는 ‘결호작전’을 흘리면서 조건부 항복을 얻어내려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이 무모한 발버둥은 결국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의 처절한 피괴를 초래했고 희생되지 않았어야 할 수십만 명의 일본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역사 속에 묻힌 한국인 원폭 희생자

1945년 8월 6일 남태평양 티니안섬에 배치된 미 제509혼성전대의 제393 폭격비행대대에 속한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Anola Gay)’가 캄캄한 새벽에 활주로를 박차고 이륙했다. 폭격기는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 상공에 우라늄 핵폭탄 ‘꼬막소년’을 투하했다. 폭발의 진동은 현장으로부터 24km나 벗어난 폭격기의 승무원들에게도 느껴졌고, 폭발 중심부의 온도는 2,900도에 달했다. 히로시마의 60%가 초토화되고 7만여 명이 즉사했다. 괌에서 상륙작전에 대비하여 대기하던 미군은 침공작전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며 크게 자축했다.

이어서 1945년 8월 9일 0시 150만 소련군이 일본 관동군을 공격했고, 11시간 후인 오전 11시 2분 나카사키에 플루토늄 핵폭탄 ‘뚱보’가 투하되었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파괴되었고 최소 4만 명이 즉사했다. 이 상황에서도 일본의 전쟁지도부는 ‘결사항전’과 ‘즉시 항복’을 놓고 최후의 격론을 벌렸다. 전쟁 지속시 공산국 소련이 일본을 점령할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8월 10일 일본은 스위스와 스웨덴 공사관을 통해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인다는 뜻을 전했고, 쇼와 천황은 8월 15일 정오에 항복을 알리는 ‘옥음(玉音) 방송’을 내보냈다. 항복 조인식은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 중이던 미 전함 미주리함에서 거행되었다.

이로서 제2차 세계대전은 완전히 종결되었지만, 히로시마와 나카사키는 지옥으로 돌변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 속에는 시체들이 가득했고, 악취 속에 파리떼가 도시를 뒤덮었으며, 임시진료소들에는 화상, 골수 손상, 백혈구 파괴, 탈모 등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방사능이 섞인 ‘검은비’가 내렸고 낙진은 도시밖 50km까지 확산되었으며, 폭발 이후에도 사람들은 계속 죽어갔다. 두 도시에서 폭발시 즉사한 사람만 10만 명이 넘었고 이후 각종 질병이나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을 합치면 25만 명에 달했다.

이 참극의 현장에는 한국인들도 많았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강제동원 노동자를 포함하여 14만여 명의 한인이 있었고 나카시키에도 3만5천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두 도시에서 피폭된 한인은 7만 명에 이르며 그중 3~4만명이 사망했고 생존자 중 7,000여 명이 일본에 잔류했다.

이후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은 ‘잊혀진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일본 정부는 1957년 ‘원폭피해지 지원법’을 제정하여 일본안 피폭자들에게 재빠른 지원책을 강구했지만, 피폭을 증명하기 어려운 많은 한국인들을 ‘피폭자 건강수첩’을 교부받지 못해 병마에 시달리다가 외롭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지금도 일본에는 부모의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유전적 질병을 앓고 있는 ‘히바쿠 니세이’들이 다수 살고 있지만, 이들 한국인 피해자 2세들이 제기하는 의료비 국가배상 청구는 번번히 일본 법원에 의해 기각되었다.

이와는 달리 당시 ‘피폭자 건강수첩’을 교부받지 못했던 일본인 건강이상자들에게는 쉽사리 ‘피폭자 인정’ 판결이 내려졌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을 이기기 위해 경제개발에 몰두하고 있던 한국정부가 이 불운한 동포들에게 큰 관심을 기울인 것도 아니었다. 결국 1970년이 되어서야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가 제막되었고, 나카사키 평화공원에는 76년이 지난 2021년에야 위령비가 세워졌다.

한반도 핵참극 부추기는 부질없는 발버둥들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 앞에 나란히 선 한일 정상의 굳은 표정에는 실로 많은 의미들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우선, 전체 원폭 희생자의 10%에 달하는 한국인 희생자들을 충분히 기억해주지 않았던 일본 정부의 사과와 한국 정부의 미안함이 베어있는 것 같았다. 핵무기의 파괴력을 새삼스럽게 재확인하면서 이런 괴물이 사용되는 참극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결의도 베어있는 것 같았다. 사실,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도 그랬다.

엘러모고도 사막에서 실시된 인류 최초의 핵실험이 성공한 직후,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지구종말 무기(doomsday weapon)’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연구책임자 오펜하이머(Robert Openheimer) 박사는 “내가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며 크게 탄식했다. 위령탑에 헌화하면서 윤 대통령도 북한의 불장난이 초래할 수 있는 한반도의 핵참화를 머리 속에 그리면서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을 구상해보았을 지도 모른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수상의 무거운 표정에는 날로 극심해지는 북핵의 위협에 대한 한일 두 나라의 공동대응 의지도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한국의 문제이자 일본의 문제이고 동시에 세계의 문제로 비화된 북핵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한일 및 한미일 협력 뿐 아니라 국제사회와의 공조도 절실하다.

그래서 “북한은 국제 평화를 위협하는 추가 핵실험이나 탄도미사일 발사를 삼가하라”고 촉구하고 “무모한 행동은 신속하고 단결된 강력한 국제적 대응에 직면할 것(reckless actions must be met with swift, united and robust international response)”이라고 경고한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의 공동성명이 한국 국민에게 의미하는 바는 여느 해와는 다른 무게감을 가졌다. 이렇듯 히로시마와 나카사키는 일본과 한국이 세계에서 실제로 핵참살을 당한 유일한 나라들이라는 사실을 회상하게 해주고 있으며, 동시에 한반도에서의 핵참화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해 해야 할 많은 과제들을 일깨워주고 있다.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태우,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연구실장 / 전 통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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