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해외개발인력공사의 
파독간호사 광고를 보고 지원
함부르크에서 뱃사람 상대로 간호일
외로움 달래려 그린 그림이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의 직계 제자인
국립함부르크미술대의 
한스 티만 교수에 우연히 발견돼 
화가의 길 걷기 시작
독일 표현주의 기법, 창의적으로 
단순한 선, 원초적 색 '생명화가'
2022년 10월 독일에서 암투병중 별세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한독 정상회담에 앞서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에게 파독 간호원 출신 노은님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고있다. [대통령실 제공]
생전의 노은님 화백이 독일 미헬슈타트 시립미술관에 전시 중인 작품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가나아트센터 제공]

"독일에 많은 한국인이 오고, 특히 파독 간호사들은 우리 독일의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다"며 "대한민국의 발전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를 바탕으로 양국 관계가 긴밀하게 발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21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진행된 윤석열 대통령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의 정상회담에서 숄츠 총리가 밝힌 내용이다. 

마침 이날 독일 총리의 정상회담 현장에는 '파독 간호사 출신 화가'로 유명한 고(故) 노은님의 작품이 걸려 눈길을 끌었다.

지난해 10월 독일에서 암 투병 중 향연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노은님 작가는 본인은 굳이 '파독간호사 이력을 굳이 밝히려 하지 않았지만 그의 화업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단순한 선과 원초적인 색으로 화면을 채우는 생명의 화가인 노 화백은 국내에서보다는 해외에서 더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다. 

노 작가는 생전에 단순한 선과 원초적인 색으로 화면을 채우는 생명의 화가인 노 화백은 국내에서보다는 해외에서 더 명성을 얻었다. 

노은님, 생명의 시작(Am Anfang), 2020, Acrylic on canvas, 160 x 400 cm
노은님, 암초상어(Riffhai), 1990, Acrylic on paper, 45 x 55 cm

한국 작가로서는 최초로 국립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HF)의 정교수로 임용돼 20여 년간 후학들을 키워냈으며, 바우하우스, 베를린 세계 문화의 집, 베를린 도큐멘타, 국제 평화 비엔날레, 제5회 국제 종이 비엔날레 등 유수의 전시에 초대돼 작품을 선보이며 유럽 화단의 '거장'으로 자리잡았다. 

화가로서의 그의 입신은 '파독 간호사'로부터 비롯된다. 

노 작가가 1970년 독일행 비행기에 오른 것은 화가의 길을 걷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독일행은 현지에서 해외개발인력공사의 파독간호사 광고를 보고 지원, 간호보조원으로 일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국 근대화 시대에 ‘파독 간호사’란 타이틀 아래 독일에 수출되었던 경제 디아스포라 세대인 셈이다.
  
독일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는 항구도시인 함부르크의 병원에서 뱃사람들이나 인근 유흥업소 종사자, 심지어는 알코올 중독자를 상대하며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그러나 간호사 생활은 채 3년을 못 넘겼다. 어느날 몸이 아파 앓아 누웠을 때 집을 찾아 온 동료 간호사들에게 낯선 이국땅에서 고독과 향수를 달래고자 그린 그림이 목격돼 병원회의실에서 전시회가 열리면서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국립함부르크미술대의 한스 티만 교수는 미대 입학을 적극 권했다. 티만 교수는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의 직계 제자였다.

대학을 마치고 노 작가는 한지에 그린 아크릴화, 설치미술, 퍼포먼스, 테라코타 조각, 심지어는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에 이르기까지 매체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장르의 작업으로 현지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노은님, 초록색 잎사귀, 1989, Acrylic on paper, 85 x 60 cm

현지에서 그의 작품은 독일 표현주의와 동양철학의 존재론을 결합한 독자적 결과물로서 평단에서는 자연을 노래하는 '그림의 시(詩)'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한독정상회의가 열린 이날 윤 대통령은 숄츠 총리가 방명록에 서명할 때 배경에 걸려있던 그림 한 점이 노은님 작가의 1984년작 '지구의 어느 구석 아래서'라고 소개했다.

작품은 물고기, 사슴, 토끼, 새 등 평범한 자연 대상을 주로 다루면서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꾸미지 않은 천진한 눈과 소박한 기술을 보여준다.

숄츠 총리는 설명을 들은 뒤 "그림이 정말 아름답다"며 양국의 인연을 고려한 윤 대통령의 배려에 사의를 표했다고 대통령실은 전했다.

이경택 기자 ktlee@pennmike.com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