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5월 22일 –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 체결

 미국의 배가 조선 앞바다에 나타나 본격적으로 충돌한 첫 사건은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과의 교역을 요구하며 황해도 황주목 앞바다에 정박했다. 당시 쇄국정책을 펼치던 조선은 제너럴 셔먼호에 퇴거를 경고했지만 그들은 대동강 상류 만경대 부근까지 거슬러 올라가 약탈하며 조선인들을 포로로 잡기도 했다. 제너럴 셔먼호는 총과 대포로 공격했고 잡혀간 조선인 중 일부를 죽이기까지 했다. 이에 격분한 조선은 화공과 포격을 퍼부어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버렸다. 이후 미국은 이 일을 빌미 삼아 조선의 해안에 출몰하여 공격하곤 했다. 
 
 그중 가장 심각한 사건은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였다. 그해 4월 서해안 풍도 부근 바다에 나타난 이양선에서 조선 관리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에는 “…… 이 배는 대 아메리카합중국 즉, 대 미국의 배이며 여기에 온 것은 우리 흠차(欽差 : 왕이나 황제의 파견) 대인이 조선의 높은 관리와 협상할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조약을 체결하려면 아직도 날짜가 필요하므로 우리 배는 이 바다 한 지역에서 정박하고 있으면서 조약이 체결되기를 기다렸다가 돌아가겠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이양선은 강화도 광성진에 닿자마자 모두 닻을 내리고 광성진의 성(城)을 향하여 대포를 쏘아댔다. 조선군도 초지진, 덕진진 등에서 크고 작은 대포를 일제히 쏘았다. 이 교전으로 조선군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대원군과 이양선 측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그 사이에도 교전은 계속되었다.

신미양요 때 공격받은 강화도 초지진. [사진=윤상구]

 

 급기야 4월 19일 조선군은 패배하여 광성진을 잃었다. <고종실록>에는 “이양선에서 쏘아대는 대포알은 비 오듯 날아왔고, 육지의 적들이 쏘아대는 조총알은 우박 쏟아지듯 마구 떨어졌다. 한바탕의 혼전 끝에 광성진은 붕괴되고 적들이 광성진의 위아래 돈대를 차지하고 장대를 포위하였다. 그들은 광성진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벙거지를 실어갔다.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공격해오니 적은 수의 조선 군사가 막아낼 길이 전혀 없어 할 수 없이 덕포진에다 진지를 옮겼다”라고 쓰여 있다.

신미양요의 현장 강화도 덕진진. [사진=윤상구]

 

 영토의 일부를 외적에 빼앗긴 다음 날 조정에서 고종과 우의정 홍순목은 다음과 같은, 납득하기 어려운 대화를 나눴다. 
 
 “이 오랑캐들이 화친하려고 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수천 년 동안 예의의 나라로 이름난 우리가 어찌 금수 같은 놈들과 화친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몇 해 동안 서로 버티더라도 단연 거절하고야 말 것이다. 만일 화친하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나라를 팔아먹은 율(律)을 시행하라.”

 “우리나라가 예의의 나라라는 데 대해서는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일종의 불순한 기운이 온 세상에 해독을 끼치고 있으나, 오직 우리나라만이 유독 순결성을 보존하는 것은 바로 예의를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병인년(1866) 이후로부터 서양 놈들을 배척한 것은 온 세상에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지금 이 오랑캐들이 이처럼 침범하고 있지만 화친에 대해서는 절대로 논의할 수 없습니다. 만약 억지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나라가 어찌 하루인들 나라 구실을 하며, 사람이 어찌 하루인들 사람 구실을 하겠습니까? 이번에 성상의 하교가 엄정한 만큼 먼저 정벌하는 위엄을 보이면 모든 사람이 다 타고난 떳떳한 의리를 가지고 있는 이상 불순한 것을 배척하는 전하의 큰 의리에 대해 누군들 우러러 받들지 않겠습니까? 또한 저 적들이 이 소리를 듣는다면 간담이 서늘해질 것입니다.”

 이날 조정에서는 종로 거리와 각 도회지에 척화비(斥和碑) 세울 것을 결정하였다. 척화비에는 “오랑캐들이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미국 측은 다시 교섭을 요구했으나, 조선 정부가 응하지 않자 대규모 전쟁 없이는 조선의 문을 열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일단 물러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그해 5월 외교 교섭의 책임을 지고 온 특파 대원의 접견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내용과 장차 미국 국민이 조선 내에서 조난되었을 때 구조·보호해달라는 요청을 담은 공문을 보내고 청나라로 배를 돌렸다.

 신미양요로부터 4년 후인 1875년에 일어난 운요호 사건으로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처음으로 나라의 문을 열었다. 그 후 1882년 5월 22일에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제물포에서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었다. 또 태극기가 국제 관계에서 처음 사용된 조약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 조약으로 미국과의 공식적인 인연이 시작된 셈이다. 

황인희 작가(다상량인문학당 대표·역사칼럼니스트)/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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