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기 PenN 정치사회부 기자
이슬기 PenN 기자

한진그룹 ‘조양호 일가’ 구성원이 최근 줄줄이 포토라인에 서는 것을 보며 고소한 마음보다는 찝찝한 마음이 컸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는 직원에게 음료수병을 던졌다는 혐의로 포토라인 앞에 섰고,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가사도우미 불법 고용’으로 서울출입국외국인청에 출석하며 포토라인 앞에 섰다. 조양호 회장의 부인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은 직원에게 폭언 등을 한 혐의로 경찰에 출석했다. 이들에 대한 혐의는 한 마디로 ‘갑질’이라는 단어로 설명된다. 갑질하는 재벌은 어느 측면에서 보나 사회에 암적인 존재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은 건 이들에 대한 조사가 ‘사냥하듯’ 이뤄졌기 때문이다.

무작위 심문을 하는 것과, 특정인을 겨냥해 불심검문을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예를 들어, 길거리를 지나는 아무 차를 세워서 운전자의 음주운전 여부를 검사하는 것은 법치주의에 해당하지만, 특정 자동차 운전자의 음주운전을 잡아내기 위해 그 차가 지나는 길 위를 지키고 있다가 그 차만 불러 세워 음주운전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법치주의가 아니다. 검찰이 한진 일가에 대해 벌인 조사는 후자에 해당했다. 이들에 대한 조사가 여론의 분노를 이유로 한 여론재판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한 이유다.

대한민국에서 여론재판에 대한 위험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국민들은 ‘우리의 촛불로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도 탄핵시켰다’는 자신감에 차 있고, 검경 등 사정(司正)기관은 국민들의 이런저런 요구를 맞추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달 31일 나온 김명수 대법원장의 대국민담화는 충격적이다. 법치주의의 원칙을 사수해야 할 대법원장이 ‘여론재판의 원칙’을 직접 확인준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김 대법원장의 담화문은 전임 양승태 대법원 시장 시절 작성됐다는 ‘사법부 블랙리스트’에 대한 3차 조사를 마친 뒤 발표됐다. 특별조사단은 ‘사법부 블랙리스트는 없다’는 결과를 재차 확인했지만, 2·3차 조사를 승인한 김 대법원장은 이에 대해선 설명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대신 새로 제기된 ‘재판 거래’ 의혹 등을 강조하며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기도 전에 기정사실화 해버렸고,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 조치를 암시했다.

김 대법원장은 담화에서 “저는 국민과 함께하는 ‘사법발전위원회’, ‘전국법원장간담회’, ‘전국법관대표회의’ 및 각계의 의견을 종합해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상 조치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고자 합니다.”라고 밝혔다. 또 “사법부는 향후 국민들께서 주시는 모든 채찍을 달게 받으면서, 오로지 국민을 위한 좋은재판을 구현하는 법원 본연의 모습으로 거듭나겠다”는 말로 담화문을 마무리했다. A4 한 장 반 정도 길이의 담화문에는 ‘국민’이라는 말이 14번이나 등장했다. 김 대법원장의 관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국민들의 평가인 듯하다.

김 대법원장에게 묻고 싶다. 국민과 함께하는 사법발전위원회의 의견을 종합해 형사상 조치를 최종적으로 결정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 또 김 대법원장이 말하는 ‘좋은 재판’이란 대체 무엇인가. 맥락을 고려할 때 김 대법원장은 ‘국민들이 원하는 재판’을 좋은 재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합리적인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수천만의 국민들이 원하는 재판이 모두 다르다면 김 대법원장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대법원장이 여론재판을 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사법부의 신뢰는 어떤 판사가 나의 재판을 맡더라도 언제나 똑같은 재판 결과가 나올 거라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여론에 호도당해 억울한 누명을 쓰더라도, 법원에 가면 제대로 한 번 싸워볼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사법부와 법치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다. 언제나 쉽게 변하며 모호한 ‘여론’, ‘국민의 뜻’은 결코 재판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칼을 휘두르는 입장에선 달콤한 유혹이지만, 자신이 재판의 당사자가 된다면 그 어떤 국민이라도 재판이 여론의 영향을 받지 않길 바란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 사법부에 대한 신뢰는 이미 바닥을 치고 있다. “판사만 봐도 재판 결과를 가늠해볼 수 있다”는 얘기가 법조계에서 공공연히 나온지 한참이다. 판사의 성향에 따라 재판의 결과가 정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제는 법치주의의 원칙을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대법원장이 여론재판을 정당화하는 담화문을 들고 나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법치주의의 둑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재벌 기업 오너에게 들이닥친 이 분노의 바람이 힘없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불어닥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슬기 기자 s.lee@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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