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2년 5월 13일 – 사도세자, 뒤주에 갇히다

 

 예전 왕조 시대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이나 황제가 아들을 죽이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 왕좌에 앉은 아버지에게 가장 위험하고도 강력한 라이벌은 아들, 그것도 왕위를 잇기로 약속된 아들이었다. 아들은 젊고 이미 어느 정도의 세력을 형성한 채 왕위가 비워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중 가장 엽기적인 방법으로 아들을 죽인 사람은 아마도 조선의 영조일 듯하다. 게다가 사도세자가 어쩌다 그런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지, 영조는 왜 그런 기괴한 방법으로 아들을 죽였는지 그 이유도 불명확하다. 

 흔하게 알려진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40세가 넘어 아들을 얻은 영조는 빨리 든든한 후계자를 세울 욕심에 사도세자가 두 살 때 세자 책봉을 했다. 영조는 큰 기대를 걸었지만 열 살이 지나면서 사도세자는 그 기대에 어긋나기 시작했다. 학문을 게을리하고 정신병까지 얻게 되었다. 실망한 영조는 엄하게 꾸짖었고 그럴수록 사도세자의 병세는 더 심해졌다. 사도세자의 기행에 대해 세자빈이었던 혜경궁 홍씨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대저 옷을 한 가지 입으려 하시면 열 벌이나 스물, 서른 벌이나 하여 놓으면, 귀신인지 무엇인지 위하여 놓고, 혹은 불사르기도 하고, 한 벌을 순하게 갈아입으시면 천만다행이요, 시종드는 아이가 조금만 잘못하면 옷을 입지 못하여 당신이 애쓰시고 사람이 다 상하니 이 아니 망극한 병이냐. …… 신사년(1761년) 미행 때 여승 하나, 관서 미행 때 기생 하나 데려다가 궁중에 두시고 잔치한다 할 제는 사랑하시는 궁중의 천한 계집들과 기생들이 들어와서 잡되게 섞여서 낭자하였으니 만고에 그런 광경이 어디 있으리오. …… 갑자기 땅을 파고 집 세간을 짓고 사이에 장지문을 만들어 닫아서 마치 광중(시체를 묻는 구덩이) 같이 만들고, 드나드는 문은 위로 내고 널판자 뚜껑을 하여, 사람 하나가 겨우 다닐 만하고 그 판자 위에 떼를 덮었다. 그 땅속 집이 지은 흔적이 없자 아주 좋아하시며 그 속에 옥등을 켜 달고 앉아계셨다.”- <한중록> 중에서

 소설은 아니지만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도 100% 믿을 만한 기록이라고 할 수는 없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은 노론으로 사도세자의 적이었고 혜경궁 홍씨 또한 개인의 감정을 담아 글을 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숙부 홍인한은 앞장서서 세손(정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기에 정조 즉위 후 왕의 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홍씨 집안은 멸문을 면치 못했다. <한중록>은 네 차례에 걸쳐 집필되었는데 두 번째 이후는 순조 때 손자 왕에게 자신의 친정에 대한 옹호와 변명을 하기 위해 쓴 것이다. 사도세자의 기괴한 행적과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은 네 번째 <한중록>에 가서야 등장하는데 밝힐 이유가 그제야 생겼기 때문이다.

사도제자를 가둔 뒤주가 놓였던 창경궁 문정전(옛 휘령전) 앞마당. [사진=윤상구]

 

 <영조실록>에 의하면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차라리 발광(發狂)을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하고 세자를 폐하고자 했다. 하지만 궁궐에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하자 세자를 죽일 결심을 하게 된다. 놀라운 것은, 그 유언비어를 전한 사람이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였다는 사실이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은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라고 말렸지만 영조의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사도세자는 아버지와 어머니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1762년 5월 13일 영조는 사도세자를 창경궁 휘령전(지금은 문정전)으로 불렀다. 휘령전은 세상을 떠난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혼전으로 쓰이는 곳이었다. 세자가 뜰에 나타나자 영조는 신하들에게 “정성왕후의 영혼께서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라고 말하며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사도세자는 주위의 만류로 자결에 실패한 채 결국 뒤주에 갇혀 여드레 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그때 왜 느닷없이 뒤주가 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는다. 누가 처음 뒤주 얘기를 꺼냈는지에 대해서도 분명치 않다. 사도세자의 장인이며 당시 영의정이던 홍봉한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지만 처벌받지는 않았다. 정조 때는 차마 ‘뒤주’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하고 ‘일물(一物)’이라 칭하면서도 그 등장과 사용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유력한 요인으로 극심한 당쟁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대리 청정을 시작하면서 아버지를 왕위에 올린 노론보다는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을 가까이했고 이에 불안을 느낀 노론은 사도세자 제거에 나섰다. 안타깝게도 사도세자 주변에는 거의 적밖에 없었다. 여동생들의 시집 식구들이 거의 다 노론이었고 심지어는 생모 영빈 이씨, 아내 혜경궁 홍씨, 장인 홍봉한까지도 사도세자 편이 아니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후궁 숙의 문씨, 사도세자의 동복동생인 화평옹주, 화완옹주는 힘을 합해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이간질했고 이는 사도세자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추존된 사도세자의 융릉. [사진=윤상구]

 

 정녕 당파의 이념은 피보다 더 끈끈한 것일까? 아니면 이 사람들은 집단으로 정신 이상 증세를 나타낸 것일까? 그러나 오늘날 아무리 가까운 사이에서도 정치적 견해 차이에 대해서는 타협이나 양보가 없는 것, 납득할 수 없는 무조건적 지지 행태, 상대 정파에 대해서는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는 태도 등은 위 두 가지 상황이 지금도 우리 사회에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사도세자의 죽음 같은 엽기적 사건의 재현 가능성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상존하는 것 아닌가? 임오화변, 먼 옛날에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라 생각되지만 미래에 우리가 다시 겪게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역사는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황인희 작가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사진 윤상구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