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에서 가진 한일정상회담에 대한 한국여론의 최대 관심사는 기시다 총리의 ‘성의 표시’ 혹은 ‘선물’이었다. 윤 대통령이 지난 3월 방일에서 국내 여론의 비판을 무릅쓰고 제3자 배상안을 전격적으로 발표하면서까지 한일관계를 정상화하려한 데 대한 일본 측의 실질적인 호응이 이번 방한에서 표현될지 여부에 한일 양국 언론의 시선이 쏠린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한일 정상 확대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한일 정상 확대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즉 윤 대통령이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전범기업의 배상을 골자로 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정치적 결단을 내린 만큼 기시다 총리도 강제징용이나 과거사 등에 대해 한국 여론에 상응하는 발언을 해줄 것을 기대한 것이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이날 정상회담을 마친 뒤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윤 대통령, 기시다 총리의 순으로 각각 회담 성과에 대해 설명했다. 이어 한국 측은 SBS 기자가, 일본 측은 요미우리 신문 기자가 각각 대표 질문을 했다. 두 정상은 이번에 공동선언을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성과 설명 및 질문답변 과정 등을 통해 과거사 문제 등에 대해 어떻게 조율하고 진전된 논의를 가졌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밝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시다 총리는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3가지 성의 표시를 했다는 게 외교 전문가들의 일반적 평가이다. 그 성의 표시의 수준도 당초 한국 언론이 예상했던 것보다 다소 상회한다는 해석이다.

① 과거사 문제에 대해 “마음이 아프다”고 언급...‘개인적 감정’임을 전제해 공식 입장은 유지

우선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예상대로 원론적인 언급을 하면서 동시에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해서는 ‘마음이 아프다’는 구체적인 유감 표시를 했다. 요미우리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유감표시가 일본 정부의 입장이라기보다는 ‘개인적 감정’ 차원이라고 설명함으로써 한 발 후퇴하는 인상을 줬지만, 언급한 것 자체는 평가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3월 윤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1998년 10월 발표된 한일 공동선언을 비롯해 역사인식에 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말씀 드린 바 있다”면서 “이와 같은 (일본) 정부의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림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이라고도 불리는 1998년 한일 공동선언에는 식민 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는 표현이 나온다. 역대 일본 정부 중 가장 명확한 방식으로 식민 지배에 대한 명시적인 사과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시다 총리가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는 표현을 이번 정상회담에서 언급할 경우 과거사 문제에 대해 통 큰 양보를 먼저 했던 윤 대통령이 큰 선물을 받게 되는 셈이었다. 기시다 총리는 결국 이 표현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한일 정상 공동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한일 정상 공동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대신에 기시다 총리는 "윤 대통령의 결단으로 지난 3월 6일 발표된 (강제징용 해법 관련) 조치에 대한 한국 정부의 노력이 진행되는 가운데 많은 분이 과거의 아픈 기억을 잊지 않으면서도 미래를 위해 마음을 열어주신 것에 감동했다"면서 "나 자신은 당시 혹독한 환경에서 많은 분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것에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인적 감정’임을 강조함으로써 일본 정부 차원의 공식 사과나 유감 표명은 없다는 입장은 유지했다.

윤 대통령은 일본에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는 일부 여론에 대해 "진정성을 갖고 하는 것이 중요하지 어느 일방의 상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② 기시다 총리, 윤 대통령과 함께 원폭 희생자 공동 참배 추진= G7 정상회담에서 주목받을 정치행사로 꼽혀

윤 대통령은 또 기시다 총리 초청으로 오는 19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말하면서 한일정상의 원폭 희생자 공동 참배계획을 밝혔다. 윤 대통령은 “우리 두 정상은 히로시마 평화 공원에 있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찾아 참배하기로 했다”고 언급했다.

이는 의미있는 대목이다. 히로시마는 기시다 총리의 지역구 내에 있다. 기시다 총리는 보름 뒤 열리는 이번 G7 정상회담에서 주요 7개국 정상들의 자료관 견학은 물론 원폭 피해자들과 직접 만남을 추진하고 있다. 기시다 총리가 주요 정치행사로 기획하고 있는 히로시마 평화 공원에 윤 대통령과 함께 참배할지 여부는 일본에서도 상당한 관심사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③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에 대한 한국 전문가의 현장 시찰단 파견 합의= 한국 국민 우려 해소 강조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에 대한 한국 전문가들의 현장 시찰단 파견에 합의한 것도 일본 측의 선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합의사항을 밝힌 윤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가 이웃 국가인 한국 국민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고,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면서 "과학에 기반한 객관적 검증이 이뤄져야 한다는 우리 국민의 요구를 고려한 의미 있는 조치가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기시다 총리도 "한국 국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는 점은 잘 인식하고 있다"며 "일본 총리로서 자국민, 그리고 한국 국민의 건강과 해양 환경에 나쁜 영향을 주는 형식의 방류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한일 정상 공동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한일 정상 공동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사실 일본 정부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판단에 근거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방침을 결정했다. IAEA가 방류해도 문제가 없다고 인정한 만큼 국제사회도 용인하는 분위기이다. IAEA의 입장은 미국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 전문가들의 현장 시찰단 파견에 합의한 것은 일본 정부측 자신감의 표명이면서 동시에 한국측 우려를 적극적으로 해소하려는 배려이기도 하다.

기시다의 성의 표시는 윤 대통령의 통 큰 결단에 대한 호응조치...‘미래협상 구상’ 빠른 물살 탈 듯

기시다 총리가 이번 방한에서 개인적 차원의 과거사 유감 표명, 후쿠시마 오염수에 대한 한국 사찰단 수용, 원폭 피해자 공동 참배 등의 성의표시를 준비한 것은 윤 대통령의 과거사 문제 접근 방식에 대한 호응조치로 해석된다. 윤 대통령이 과거사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한일간 미래협력을 강조하는 것은 일본 정부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는 태도이다. 기시다 총리도 그에 상응하는 성의를 표시하려는 노력을 보인 셈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확대정상회담 모두 발언에서도 과거사 문제에서 탈피한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발전을 재차 강조했다. "(한일) 양국이 과거사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으면 미래 협력을 위해 한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다는 인식에서는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이어 "셔틀 외교 복원에 12년이 걸렸지만, 우리 두 사람의 상호 왕래에는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면서 "좋은 변화의 흐름은 처음 만들기가 힘들지만 일단 만들어지면 대세가 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의 한일관계 흐름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과 일부 여론은 비난하고 있지만 자신의 대승적 결단을 계기로 외교안보, 경제, 사회문화 등 다방면에서 한일관계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는 점을 역설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강제징용 해법에 대한 정부의 방침이 바뀔 것이냐'는 요미우리 기자의 질문을 받고 "바뀌지 않는다"면서 "우리가 발표한 해법은 1965년 청구권 협정과 2018년 법원의 판결을 동시에 충족하는 절충안으로서 법적 완결성을 지닌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대신에 한미일 안보동맹, 한일간 반도체 및 인플레이션감축법(IRA) 공동대응, 경제문화협력 및 교류 강화 등의 실리를 추구해나가겠다는 윤 대통령의 구상은 기시다 총리의 이번 방한을 계기로 빠른 물살을 탈 것으로 전망된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