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노 델라 로베레의 부친은 가난한 양치기였고 본인도 어릴 때 부모를 도와서 양을 돌봤을 것이다. 추기경이던 숙부의 도움으로 신부가 되었으며, 숙부가 교황 식스토 4세로 즉위하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줄리아노 로베레는 식스토 4세의 그늘아래서 인맥을 쌓았고, 식스토4세가 죽었을 때 그는 한 당파의 리더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다음 교황을 선출하는데 영향력을 발휘해서 인노첸시오 8세 교황을 만드는데 1등 공신이 되었다. 인노첸시오 시절에 그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실세였다. 

숙적 로드리고(알렉산데르 교황)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로드리고는 붙임성 있고 사근사근했으며 잘 생겼고 신체도 당당했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했다. 스페인 출신인데도 자기보다 인기가 좋았다. 한 때 자신이 좋아했던 반노차도 로드리고의 정부(情婦)가 되었다. 그래도 식스토4세 시절이나 인노첸시오 8세 때에는 줄리아노 로베레는 항상 로드리고를 앞서 가고 있었다. 다만 로드리고가 교황청의 돈을 관리하는 보직에 있으면서 축재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드리고가 교황이 되자 엄청나게 분노했다. 돈과 뇌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줄리아노는 이 선거에 승복할 수 없었다. 알렉산데르 교황이 취임하자 곧 파리로 도망을 쳤고, 거기서 알렉산데르 6세의 폐위운동을 시작했다. 
 

마침 프랑스왕 샤를 8세가 나폴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줄리아노 로베레 추기경은 샤를 8세를 부추겼다. 나폴리를 치는 김에 로마에 들러 뇌물로 당선된 알렉산데르 교황을 폐위하라고…. 마침 피렌체의 사보나롤라, 밀라노의 루도비코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을 원했다. 드디어 샤를 8세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프랑스왕은 로마를 점령하고도 교황을 폐위하기 위한 공의회를 개최하지 않았다. 교활한 알렉산데르에게 설득 당했는지 모른다. 곧이어 알렉산데르 교황이 주도하는 반 프랑스동맹이 결성되고, 샤를 8세는 이탈리아에서 밀려났다. 자신의 충고를 따르지 않은 결과라 생각했다. 샤를 8세가 로마를 점령했을 때 스페인 출신인 알렉산데르 교황을 몰아내고 자신과 같은 이탈리아 출신을 새 교황으로 옹립했다면 그렇게 이탈리아 연합군에게 쫓겨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삼켰다. 그 후 줄리아노 로베레는 9년 가까운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했다.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은 승승장구했다. 교황에게 대들었던 사보나롤라를 화형시키고 새로 프랑스왕이 된 루이12세와 동맹을 맺어 밀라노를 프랑스왕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프랑스의 힘을 빌려 순종하지 않던 교황령을 정복하고 교황의 절대 권력을 강화했다. 이탈리아에서 신의 대리인이면서 속세의 무력을 가진 절대 권력자가 된 것이다. 이제 로드리고는 감히 줄리아노 로베레가 견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어떠한 권력자도 세월을 이기지 못한다. 알렉산데르 교황의 그 엄청난 불의와 타락에 대해 신이 징벌을 내렸는지, 말라리아에 걸려 갑자기 죽었다. 신은 교황뿐만이 아니라 호가호위하던 그의 아들 체사레도 말라리아로 쓰러지게 해서 알렉산데르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어갈 수 없게 했다.  

교황선출과 체사레 보르자의 도움 
  줄리아노 로베레는 체사레를 비롯한 스페인 세력을 지지를 받아 후임교황이 될 수 있었으나, 교황이 되자 보르지아 가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체사레가 교황이 될 때 자신을 도왔고, 그 대가로 로마냐 공국의 책임자와 교황군사령관을 약속하기는 했다. 하지만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상황이 바뀌면 언제 자신에게 칼을 겨눌지 모르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또 사기와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그에게 약속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체사레 제거와 교황령의 이탈
  그러나 체사레를 제거한 대가는 컸다. 지배자인 체사레가 사라지자, 로마냐 지방은 또 다시 교황에게 불충하는 지역으로 변해갔다. 베네치아 등 외부세력의 힘으로 과거의 폭군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율리오 교황의 꿈은 자신의 경쟁자인 교황령을 정복한 알렉산데르 6세 보다 더 위대한 업적을 쌓는 것이었으나 자신에게는 교황령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알렉산데르 보다 못해진다는 현실을 교황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알렉산데르의 방식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알렉산데르가 교황령을 정복하고 기강을 잡았으나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군주국을 만들었을 뿐이다. 이는 보르지아 족속들이 이탈리아와 교황청을 망가뜨린 것이었다. 그래서 율리오 교황은 아들이 아니라 추기경들을 도시의 수장으로 임명하는 교황 직할체제를 꿈꿨다. 문제는 복종하는 교황령이 있어야 이러한 숭고한 뜻을 실현할 수 있는데, 지금은 도적 떼들이 다시 돌아와서 그 터전을 허물고 있었다.  
  율리오 교황은 참을 수 없었다. 추기경 3명을 서임한 대가로 프랑스왕으로부터 8천명의 군대를 지원받았고, 나폴리, 만토바 등도 소수의 군대를 보내왔기에 율리오 교황은 자신이 직접 교황군을 인솔하고 태만한 교황령의 도시들을 벌주러 나섰다. 교황이 친정에 나서자 그 위세에 짓눌렸는지 교황과 직접 싸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페루지아, 볼로냐 등 교황령의 영주들은 순순히 항복했다. 
  그러나 베네치아가 자신들이 점령한 교황령(파엔차, 라벤나, 미리미)을 내놓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교황은 여러 번 교황령을 돌려 줄 것을 요구했고, 베네치아 출신 추기경을 관리인으로 임명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오만했다. “해볼 테면 해보라,” 이탈리아의 강국인 베네치아를 어쩌겠냐는 식이었다. 이탈리아내의 전통강국들은 힘을 잃어버려, 베네치아에 대항할 세력이 없었다.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이 무너진 후 구심점을 잃고 혼란스러웠으며, 밀라노는 프랑스에 넘어갔고 나폴리는 스페인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었다. 베네치아는 교황이 설마 프랑스 등 외부세력을 끌어들이는 이적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프랑스를 끌어들인 베네치아와의 전쟁
  그러나 베네치아는 율리오 2세의 전투적 기질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교황은 프랑스, 독일, 스페인을 끌어들여 반베네치아 동맹(캉브레,1508)을 맺었다. 동맹국들이 베네치아를 공격하는 동안 교황은 베네치아에 파문과 성무금지령을 내렸다. 아냐넬로 전투의 패배(1509.5월)로 베네치아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점령한 도시들을 다 내놓고 비굴한 조건을 모두 수락했다.
  그제서야 교황은 프랑스를 불러들인 일을 후회했다. 곧 이어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작전을 펼쳤다. 스위스 용병을 이용해서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는 밀라노를 공격하고, 베네치아군이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는 베로나를 공격하며 제네바에서는 시민반란을 유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스위스 용병은 프랑스왕의 요청을 받은 독일황제에게 제지를 당했다. 제네바의 시민반란군도, 베네치아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교황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페라라를 공격하기 위해 서쪽의 미란돌라를 공략했지만 페라라는 오랫동안 선정을 베푼 강한 국가로 쉽게 정복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교황이 이전에 점령했던 볼로냐도 반란이 일어나서 다시 프랑스 군에 돌려 줘야했다. 

  동맹군의 패배와 우유부단한 루이12세
  마지막 수단으로 교황은 스페인을 끌어들여 신성동맹(1511)을 맺었다. 그러나 라벤나 전투에서 가스통 드 푸아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대패했다(1512.4.11.). 1만 4천명이 전사한 치열한 전쟁이었는데, 프랑스군의 사령관 가스통 드 푸아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런데 프랑스는 라벤나 전투가 끝난 지 20일이 지났는데도 로마 진격을 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우유부단한 루이 12세가 로마를 점령하고 나서 교황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심했는지 모른다. 
  더욱이 루이12세는 교황을 폐위하기 위한 피사공의회를 소집하고도 확실한 지원을 하지 않아 공의회는 밀라노로 장소를 옮기는 등 흐지부지되고 있었다. 동맹을 갑자기 적으로 돌려버린 교황을 제지하려는 확고한 의지가 부족했는지, 교황에게 회담을 제시하기도 했다. 교황은 이에 화답하지 않고 로마의 라테라노 성당에서 1512년에 자신이 주도하는 공의회개최를 선언(1511.7.25일)했다. 그리고 프랑스가 주도하는 공의회 참가자를 파문하는 등 개최를 방해했다. 

  라테라노 공의회 개최와 프랑스 고립
  프랑스가 라벤나 승전 후 후속조치 없이 어영부영하는 사이를 율리오 교황은 놓치지 않았다. 지난해에 약속했던 라테라노 공의회 개최를 강행했다(1512.5.2). 프랑스가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2차 회의는 5.10일, 3차 회의는 5.17일 열렸다. 여기서 영국의 헨리8세의 편지, 스페인왕의 편지가 낭독되었는데 다음 회의에 정식으로 대리인을 파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영국, 스페인이 반프랑스 동맹에 사실상 가입한 것이다. 다음 회의는 좀 더 많은 나라가 참가할 수 있도록 여유 있게 12월 3일 개최하기로 했다. 드디어 독일의 막시밀리안 황제가 교황 편을 들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에 있는 독일인 용병을 귀국시키고 스위스 용병의 영내 통과도 허락했다. 프랑스의 루이12세는 상대방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공했고 자신이 고립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영국군대가 노르망디에 상륙했고, 스페인군대가 피레네 국경을 침입했으며 5월말에 알프스를 넘은 스위스 용병들이 밀라노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6.22일 스위스군대가 밀라노 앞의 파비아 공략에 성공하며, 교황군, 스페인군, 베네치아군이 합류하여 밀라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은 사기가 떨어져 성채에서 방어만 하다가 루이12세의 후퇴 명령에 따라 알프스로 향했다. 율리오 교황이 승리한 것이다. 
  그는 에너지가 많아서인지 화를 참지 못했고 가만히 있지 못했다. 에너지를 가장 많이 발산하는 전쟁터에 있을 때 가장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전사 교황이란 이름을 얻었다. 아쉬운 점은 체사레를 이용해서 교황령을 통치한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원수를 사랑하지 못한 탓이라 생각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체사레를 제거하지 말고 관용과 사랑으로 그를 받아들였다면, 외세를 끌어들여 이탈리아를 싸움터로 만들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하는 실없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그는 사랑의 사람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와 싸움의 사람이었다. 보르지아의 일족을 근절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다. 

  외세를 이용한 이이제이: 치명적인 동맹, 치명적인 무기
  자신의 무력이 약하다보니 외세의 힘을 빌려 이탈리아 내부의 적(베네치아)을 공격했다. 조선이 청일 전쟁후 승자인 일본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없어 러시아를 끌어들였듯이 율리오 2세는 처음에는 프랑스에 기대다가, 프랑스가 힘이 세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스페인에게 의존했다. 마지막으로 스페인이 이긴다면 이탈리아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어가고 있었다. 동시대의 역사가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는 율리오 교황의 외교에 대해 '치명적인 동맹, 치명적인 무기'라 평가했다. 
  율리오 2세는 이이제이(以夷制夷)전략외에 이탈리아를 지킬 방도가 없었다. 우리는 조선말기의 경험에서 자신의 힘이 없을 때 이이제이 정책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알고 있다. 교황은 이탈리아 국가들이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원했으나, 영적능력이나 자신의 힘이 아니라 외국세력을 끌어들여 강제로 복종시켰고, 이탈리아 국가들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장군과 시민군을 육성하고 대포와 함선을 만드는 등 교황군을 체계적으로 강화하지도 못했다. 이탈리아에 강력한 교황군을 키워서 외부의 강대국들이 감히 넘볼 수 없게 만든 알렉산데르 6세에 미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인사의 실패와 민심의 이반
  그렇다고 점령한 지역의 주민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지도 못했다. 율리오 2세는 인사도 신상필벌에 기초한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자신에게 순종하는 사람 위주로 주요 보직에 배치했던 것 같다. 족벌주의를 배격하였지만 측근들에 대한 사랑은 원칙이 없었고, 잘못한데 대해 읍참마속과 같은 엄정함도 없었다. 그 결과 서투른 행정으로 시민들의 불만을 초래했고, 적군이 근처에 오기만 해도 점령한 교황령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율리오 2세가 사랑하고 믿었던 아리도지 추기경은 볼로냐 통치를 엉망으로 해서 시민들의 반란을 초래했고, 어렵사리 얻은 도시를 그냥 내줘야했다. 교황의 조카인 귀도발도가 도시행정을 엉망으로 만든 아리도지 추기경을 꽁꽁 묶어 율리오 2세에게 끌고 갔으나 교황은 그의 잘잘못을 묻지도 않고 그냥 풀어 줬다. 그 전에 볼로냐를 맡았던 페렐리 추기경도 시민들과 마찰을 빚어 원성이 자자했다. 교황직할 체제란 이상을 내걸었으나 행정능력을 갖춘 사람을 보임하지 못해 주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뺐고 뺐기는 공방전만 심화시켰다. 

  상처뿐인 영광
  율리오 2세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증과 과시욕이 강했던 것 같다. 불굴의 에너지는 자신에 대한 착각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든다. 율리오 교황은 볼로냐 점령에 감격해서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자신의 동상을 조각해서 볼로냐의 산페트로니오 성당 정문위에 전시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밀리자, 볼로냐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동상을 끌어내려 부수었고, 페라라의 공작은 이것을 녹여서 대포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이 죽어서 들어갈 거대한 영묘를 만들게 했다. 
  다행히 그에게는 상대방의 실책으로 인한 많은 행운이 따랐다. 그러나 그의 후임자들에게는 이러한 행운이 오지 않았다. 외부의 강대국들에게 이탈리아가 얼마나 허약하고 분열되어 있는지를 알려줬을 뿐이다. 그래서 궁극에는 스페인 세력의 지배를 허용하고 말았다. 프랑스를 내쫓는 전쟁에서 승리를 했으나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동시대 사람인 ‘에라스무스’는 갑옷 입은 군인 교황이 천국에서 문전박대 당했다는 이야기를 발표하기도 했다. 

외교관련 발언은 신중해야
중국 관영 방송 CCTV가 "한미 정상회담 결과가 한국 내 우려와 비판 여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기사를 지난달 30일과 1일 잇따라 보도했고, 중국 관영 신화사 통신도 지난달 30일 "한국 정부가 동북아시아 지역, 심지어 글로벌 '신냉전'의 추동자가 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는 보도를 했다. 거기에 “미국이 듣고 싶은 얘기만 했다”는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의 글 등 우리나라의 많은 정치인 교수들의 말들이 인용되었다. 중국이 한미 정상회담을 우려하는 것은 최근 갈등을 빚고 있는 미중관계로 볼 때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너무 많은 국내 인사들의 말과 글이 이용되고 있는 것 같아 씁쓰레하다. 율리오 교황의 예에서 보듯이 외교 문제는 국민의 생사가 달린 문제인데 발언에 좀 더 신중했으면 한다. 중국이 문제 삼는 ‘대만해협에서의 평화와 안정 유지 중요' 문구는 문재인 정부 때인 2021년 한미 정상 성명에도 들어간 내용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김동엽 북한대학원 교수의 ‘워싱턴 선언은 빈 껍데기’ 발언도 인용했는데 빈껍데기라면서 왜 이리 말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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