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소프트 파워(Soft Power)’를 선보였다. 26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주최한 국빈 만찬에서 돈 맥클린의 ‘아메리칸 파이(American Pie)’의 일부를 능숙하게 불러 미국 정계를 열광시켰다. 이는 역대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만들어낸 문화적 장면이다.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국빈만찬 특별공연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싱어송라이터 돈 매클린의 친필 서명이 담긴 기타를 선물받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국빈만찬 특별공연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싱어송라이터 돈 맥클린의 친필 서명이 담긴 기타를 선물받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 대통령이 부른 ‘아메리칸 파이’, 바이든과 미국인이 ‘가슴아픈 추억’에 잠기게 만드는 노래

바이든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서 부르는 형식이었는데 ‘선곡’도 절묘했다. 아메리칸 파이는 바이든 대통령의 요절한 장남의 애창곡이기도 하다. 고(故) 보 바이든의 어린 시절에 함께 즐겨 불렀던 노래라고 한다. 보 바이든은 델라웨어주 법무장관을 역임하며 아버지의 뒤를 이을 정치 후계자로 꼽혔지만, 46세이던 2015년 뇌종양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백악관 국빈 만찬장에서 무대에 선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타들이 앙코르곡으로 돈 맥클린의 ‘아메리칸 파이’를 선택하면서 “윤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들었다”고 운을 뗐다. 윤 대통령은 박수를 쳤고, 바이든 대통령은 “아들들이 어렸을 때 이 노래를 좋아했으며 가사 중 ‘위스키 앤 라이(whiskey and rye)’를 ‘위스키 앤 드라이(whisky and dry)’로 바꿔 불렀다”고 추억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도 “학창시절 애창곡 중 하나”라고 화답했다.

경쾌하면서도 서정적인 멜로디, 미국에서 프레슬리와 함께 초창기 '로큰롤의 왕'으로 숭배받는 버디 홀리가 비행기 사고로 요절한 사건을 다룬 가사 등은 미국인의 심금을 울리면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이다. 아메리칸 파이는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관련돼 있다. 미국인이나 바이든 대통령에게 ‘가슴아픈 추억’에 잠기게 만드는 노래인 셈이다.

백악관 국빈 만찬장에서 앙코르 곡으로 돈 맥클린의 ‘아메리칸 파이’가 선곡됐다. [사진=연합뉴스 유튜브 캡처]
백악관 국빈 만찬장에서 앙코르곡으로 돈 맥클린의 ‘아메리칸 파이’가 선곡됐다. [사진=연합뉴스 유튜브 캡처]

윤 대통령, 엄숙주의 깨고 미국 정치인들과 정서적인 공감대 형성해

그동안 한미정상간의 관계는 공식적인 관계에 머물렀다. 친숙하고 약간은 사적인 관계 형성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한미간의 대중문화적인 공통점은 충분했지만, 양국 정상이 문화적이거나 정서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기는 어려웠다. 역대 한국의 대통령들은 일종의 엄숙주의에 집착하는 스타일이었다. 가장 소탈했던 고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미국 정상과 공감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게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윤 대통령은 그 관행적인 한계를 깼다. 대선후보 시절에도 TV연예프로그램에 출연해 능숙하게 팝송을 불러서 유권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던 윤 대통령은 미국인들도 부르기 까다로운 팝송으로 꼽히는 ‘아메리칸 파이’를 침착하고도 정확한 음정으로 소화해냈다.

이 대목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공식적인 행사장에서 윤 대통령이 미소를 짓거나 친근감을 표시해도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았던 바이든 대통령은 윤 대통령이 노래하는 동안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심지어는 윤 대통령을 얼싸안고 어깨동무를 했다. 국빈 만찬에 참석한 다른 미국인들도 손벽을 치면서 환호했다.

이번 방미의 공식적인 최대 성과는 한미간의 강력한 확장억제를 명문화한 워싱턴 선언이다. 하지만 비공식적인 최대 성과는 윤 대통령의 ‘아메리칸 파이’ 부르기를 통한 소프트 파워 구축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한국 야당은 방미 성과 폄하에 열을 올리지만 미국 워싱턴 정가의 화제는 ‘윤석열의 아메리칸 파이’

더불어민주당 등 한국의 야권 정치세력들은 이번 방미를 폄하하는 데 집중하고 있고, 공교롭게도 윤 대통령의 지지율도 소폭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방미 전에 이뤄진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불거진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발언 논란 등의 영향이 큰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아메리칸 파이’를 부름으로써 미국 정치인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문화적 코드’를 발신한 것은 한미 관계에 의미있는 소프트 파워로 작동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의 백악관 출입 기자 피터 베이커는 '아메리칸 파이'를 "현대 미국 사회에서 가장 상징적인 노래 중 하나"로 규정하면서, 윤 대통령의 노래가 외교관들과 귀빈들을 열광시켰다고 소개했다. 특히 그는 80세인 바이든 대통령이 윤 대통령의 노래에 맞춰 주먹을 흔들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두 번째 국빈만찬의 흥겨운 마무리는 지금껏 열린 백악관 저녁 행사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아메리칸 파이를 부르자, 만찬장에 참석한 하객들은 환호했다. [사진=연합뉴스 유튜브 캡처]
윤석열 대통령이 아메리칸 파이의 한 소절을 부르자, 만찬장 참석자들은 기립 박수로 환호했다. [사진=연합뉴스 유튜브 캡처]

27일(현지시간)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공동 주최한 국빈 오찬에 윤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에서도 아메리칸 파이가 화제로 떠올랐다. 블링컨 국무장관은 윤 대통령에게 전날 백악관 국빈만찬을 언급하며 "어젯밤 윤 대통령이 '아메리칸 파이'를 노래해 모든 사람을 웃게 했다"며 "(오늘 오찬에서도) 또 다른 공연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공연을 이어가시라"고 조크를 해 좌중의 웃음을 끌어냈다.

이날 윤 대통령의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 후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 주최로 열린 리셉션에서도 '아메리칸 파이'가 화제에 올랐다. 매카시 의장은 "그렇게 좋은 가수 음성을 보유하고 계신지 몰랐다"고 덕담을 건넸다고 대통령실 김은혜 홍보수석이 서면 브리핑을 통해 전했다.

같은 날 윤석열 대통령은 워싱턴DC 미국영화협회(MPA) 건물에서 개최된 '글로벌 영상콘텐츠 리더십 포럼'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도 ‘아메리칸 파이’ 이야기가 나왔다. 찰스 리브킨 미국영화협회장은 "어젯밤(국빈 만찬)에 '아메리칸 파이'를 너무나 멋지게 불러줘서 전세계가 즐겁게 감상했다. 오늘은 노래를 감상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농담을 던졌다.

돈 맥클린도 윤 대통령에게 관심과 호감을 표시했다. 27일(현지시간) 미국 CNN방송과 정치전문매체 더힐 등에 따르면 맥클린은 이들 매체에 보낸 성명을 통해 전날 백악관 국빈 만찬에 초대받았지만 콘서트 투어 중이라 참석할 수 없어 아쉬웠다며 "윤 대통령과 함께 노래하고 싶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도운 대변인 뒷이야기 공개...“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 윤 대통령 애창곡 물어와”

대통령실 이도운 대변인은 28일(현지시간) 보스턴 현지 프레스룸 브리핑에서 뒷이야기를 공개했다. "백악관 측이 한미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좋아하는 노래가 있으면 만찬장에서 연주하겠다고 청하면서 곡명을 물어왔다"고 밝혔다. 백악관 국빈만찬에서는 백악관 소속 해병대 밴드의 반주하에 미국의 유명 뮤지컬 가수인 놈 루이스, 레아 살롱가, 제시카 보스크 등이 브로드웨이 뮤지컬 노래를 부른 뒤, 앙코르곡으로 '아메리칸 파이'를 불렀다.

이도운 대변인은 아메리칸 파이와 관련된 뒷이야기를 공개했다. 만찬장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직접 노래를 청한 것으로 알려진다. [사진=연합뉴스 유튜브 캡처]
이도운 대변인은 아메리칸 파이와 관련된 뒷이야기를 공개했다. 만찬장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직접 노래를 청한 것으로 알려진다. [사진=연합뉴스 유튜브 캡처]

이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갑자기 윤 대통령에게 직접 노래를 청했고, 윤 대통령은 약간 당황했지만 만찬 참석자들이 한미동맹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지지자들이라는 점과 바이든 대통령 부부가 만찬 준비에 기울인 노력을 생각해 응했다는 게 이 대변인 설명이다.

이 대변인은 "노래가 온라인에 오르고 난 다음에 이걸 우리가 공식적으로 (영상을) 풀해야되나 고민했는데 윤 대통령은 우리 전속이 촬영한 공식 영상은 제공할 필요가 없고, 그냥 문의하면 바이든 대통령의 요청으로 한 소절 불렀다는 점만 확인하자고 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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