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교과서는 일제가 조선어 말살의 황민화정책을 추진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지금 대부분의 한국인들도 일제의 ‘조선어 말살’을 상식으로 알고 있다. 과연 그럴까. 역사의 진실은 늘 그렇지만, 이른바 ‘상식’의 정반대편에 숨어 있다. 영국 작가 하틀리(L.P. Hartley; 1895~1972)는 1953년 『중개인』에서 “과거는 외국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다르게 행동한다”고 갈파했다. 

살아보지도 않은 일정기를 마치 살아본 것처럼 현대 한국인들, 특히 좌파세력은 그런 거짓말을 생산하고 확대 재생산한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런 새빨간 거짓말에 넘어간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근현대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자신들이 사용하는 한국어는 당연히 자신들이 만들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한국에서 하나의 상식이자 통념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문화어 한국어는 일본인이 만들었다. 그 역사 진실을 살펴보자. 

일본어를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국어는 일본어와 닮아도 너무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장 배우기 쉬운 외국어가 일본어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느 학자는 서울대학에 일어일문과가 없는 것은 바로 일본어가 외국어가 아니기 때문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잘 알다시피, 전근대 조선의 문화어는 한자였고, 소수 엘리트와 독서인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다가 제4대 국왕 세종(1418~1450)이 “한자를 쉽게 습득하지 못하는 다수의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하지만, 중국 대륙의 압도적 문화권에 예속되어 있던 조정과 엘리트층은 한글을 아녀자들이나 쓰는 ‘언문(諺文)’이라 멸시했고, 공적 사용은 기피했다.

그래서 한글은 오래 동안 빛을 보지 못한 채 역사의 버림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세계적인 통찰력을 갖는 동아시아의 지적 거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가 이웃나라 조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임오군란 사죄사(謝罪使)사로 일본을 방문했던 김옥균과 박영효 등 개화파 청년들은 후쿠자와를 찾아 조선 근대화를 위한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자 후쿠자와는 우선 근대 신지식을 널리 백성들에게 보급해야 한다며, 그러자면 신문 발행이 지름길이라 조언했다.

후쿠자와는 조선의 개혁과 근대화를 위해서는 백성들에게 알기 쉬운 언어를 보급하고 식자율을 높이는 것이 최우선이라 판단했다. 실제로, 후쿠자와는 한국인들이 착각하는 그런 악한 사람이 아니다. 조선의 운명에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였던 휴머니즘으로 충만한 선각자였다.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친필 유묵. [사진=김문학 제공]

그리하여 후쿠자와는 한글 활자를 주조해서 만들었고, 제자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郎; 1860~1938)를 경성에 파견했다. 이노우에 회상기에 따르면,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는 새로운 조선어 문체는 후쿠자와가 창안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후쿠자와 선생은 조선에는 언문이 있다. 이를 마치 일본어처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만 있으면 조선도 문명개화의 행렬이 동참할 수 있다.”《이노우에(1934) 「후쿠자와 선생의 조선 경영과 현대 조선문화에 대해서」)》 후쿠자와는 메이지 시기 일본어의 ‘가나와 한자혼용’을 모방해서 조선의 ‘한글한자혼용문’을 창안했다. 바로 문화어로서 근대 한국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 역사적 의미는 매우 깊고도 넓다. 후쿠자와는 압도적인 대륙 문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문만을 고수해 왔던 조선의 언어시스템을 제대로 뒤엎었다. ‘언문+한자’라는 일대 개혁을 성공시켰다. 이는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문명사적 공헌이라 평가할 일이다.

이미 신문 발행의 대중적 파급력을 절감하고 있던 후쿠자와는 조선에서 한글과 한자를 혼용한 신문을 발행해서 대중들이 글을 익히고 신문화를 배울 수 있는 문화 인프라를 정비했다. 사실 ‘한글’이란 명칭 역시 일본인이 명명한 것이다.

1886년 이노우에는 경성에서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유학생 강위(姜瑋)의 도움을 받아 한글한자혼용의 《한성주보(漢城周報)》를 창간했다. 한국 최초 신문의 탄생이다. 한국 교과서 일반에서는 조선 정부가 박문국(博文局)에서 신문을 발행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박문국이 바로 이노우에의 자택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에 인쇄기를 설치하고 신문을 발행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언어이자 문화어가 조선 전역에 급속히 보급되면서 조선 근대화에 시동이 걸렸다. 국문학자 김사엽(1912~1992)은 천덕꾸러기 토속어에 불과했던 언어가 문명어로 거듭난 것을 두고 ‘감동적인 일대 전진’이라 경탄했다.《김사엽(1971), 『조선문학사』》

후쿠자와의 ‘신조선어’ 만들기는 사실 당대에도 파격적인 아이디어였다. 주위의 일본인들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후쿠자와의 발안과 이노우에의 노력으로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문화어를 만들어 준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유묵. [사진=김문학 제공]

 

이후 조선총독부도 한글을 말살하는 대신에 소학교 교과서에 채용했고, 대중적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해서 조선어가 널리 보급되고 정착하게 되었다. 조선어 교육 및 보급에 관한 구체적 실태는 다른 칼럼에서 다룰 것이다. 

언어가 민족의 상징이라면, 한국 근대는 일본에 의해 잉태되고 성장했다. 일본인의 호의로 탄생한 근대 조선어를 오늘날 한국인들이 현대적인 문화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후쿠자와를 비롯한 소수의 일본인들 덕분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일본이란 근대 신사(紳士)와 비교하면 어리석고 생떼만 쓰는 7살의 악동(悪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반면 춘원 이광수는 유학시절 근대 문명의 향도자(嚮導者) 후쿠자와를 숭경하던 나머지 그의 무덤을 찾아 큰 절을 올렸다. 바로 조선 근대화에 더 없이 공헌한 후쿠자와에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발 지금부터라도 한국 근대화에 기여한 일본에 대해 좀 솔직해지자. 일본의 선각자들에 겸허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국민으로 재탄생할 때가 왔다. 비굴하고 천박한 죽창가나 외쳐대는, 터무니없는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버리자. 해방 80년이 다되어가는 이 마당에 보다 성숙하고, 신세 진 상대방에게 감사와 예의를 갖추는, 세계적인 신사 국민 한국인으로 거듭나고 거듭나자.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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