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2년 4월 26일 – 경회루 준공

 경복궁의 경회루는 천원지방(天圓地方 :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의 개념에 기초하여 음양의 조화를 꾀한 건물이다. 경회루 건물을 받치는 누하주(누각 아래의 기둥) 중 바깥 기둥은 사각기둥이고 안쪽 기둥은 원기둥이다.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경회루의 누하주는 마흔여덟 개인데 이는 아미타불이 비구로 수행할 때 마흔여덟 개의 서원을 세우고 정진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누각 내부에는 앞면 일곱 칸, 옆면 다섯 칸의 마루가 깔려 있고 마루 바닥은 3단으로 피라미드처럼 중앙이 높아지게 만들었다. 중앙의 높은 자리는 연회 때 임금이 앉는 자리이다. 가운데 자리는 세 칸으로 이뤄져 있는데 3은 천지인(天地人)을 뜻한다. 세 칸의 공간을 그 바깥과 분리하는 기둥은 여덟 개인데 이는 8괘를 의미한다. 괘는 태극기의 네 귀퉁이에 그려진 것처럼 음양이 변화하는 모습을 층으로 쌓아 보여준 것이다. 중간에 있는 기둥 사이의 칸은 열두 개인데 12는 1년의 열두 달을 뜻하고 바깥 기둥 스물네 개는 24절기를 의미한다. 이렇게 경회루는 불교와 유교 사상에, 백성들의 농사를 걱정하는 마음까지 담아 지은 건물이다. 

 경회루 지붕은 열한 개의 잡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궁궐 건축물 중 가장 많고 유일한 개수임을 생각하면 경회루가 무척 호화롭게 만들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경회’는 경사스러운 연회라는 뜻으로, 현판은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이 쓴 것이다. 경회루는 원래 사신 접대용으로 지어졌지만 연산군의 방탕한 삶을 얘기할 때 자주 등장한다. 경회루에서 연일 연회를 열며 그 자리에 ‘흥청’이라는 기생 조직을 동원했고 여기서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경회루를 가장 활발하게 사용한 임금은 세종이다. 세종은 궁중의 연회는 물론, 기우제, 무과 시험, 활쏘기 시범 장소 등 다양한 용도로 경회루를 사용하였다. 

열한 개의 잡상으로 장식된 경회루 지붕. [사진=윤상구]

 

 경회루에서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준 것도 경회루에서였다. 세조 즉위년(1455) 윤6월 11일, 단종은 자신의 측근들이 고초를 겪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수양대군에게 임금의 자리를 넘겨주기로 했다. 단종은 다음과 같은 선위 교서를 내렸다. 

  “내가 나이가 어리고 중외(中外)의 일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가 은밀히 발동하고 난을 도모하는 싹이 사라지지 않으니, 이제 대임(大任)을 영의정에게 전하여 주려고 한다.”- <세조실록> 1455년 윤6월 11일

 동부승지 성삼문이 상서원으로 가서 옥새를 가져와 경회루의 단종에게 바쳤다. 단종이 경회루에서 부르니 수양대군이 달려 들어갔다. 수양대군은 엎드려 울면서 굳게 사양했지만 단종이 옥새를 잡아 그에게 전해 주었고 수양대군은 옥새를 받았다. 이윽고 선위·즉위의 교서를 짓도록 하고 수양대군은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백관을 거느리고 근정전 뜰로 나아가 선위를 받았다. 
 그런데 옥새를 가져다 넘겨준 사람이 사육신 성삼문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왕위가 수양대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진정으로 부당하다 생각했다면 성삼문은 옥새를 안고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었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심지어 동료인 박팽년이 경회루 연못에 빠져 죽으려 하자 성삼문은 훗날을 기약하자고 만류하기도 했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영월 청령포에는 단종이 지내던 집이 복원되어 있고, 그 집의 처마 밑에 단종이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시가 걸려 있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이는데 / 푸른 솔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구나.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이 시를 읽으면 단종이 더 이상 힘없는 어린 소년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단종이 계속 17세 소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닐 것이며, 세월이 흘러 20세가 넘고 원한을 품은 채 힘을 기르면 세조에게 충분히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세조는 어린 조카를 죽인 것이 아니라 미래의 강한 정적을 죽인 것이었다. 

 경회루를 생각하니 그동안 무심코 받아들였던 역사적 사실에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긴다. 세종은 기가 센 둘째 아들이 왕위를 탐낼 것을 걱정했으면서 왜 굳이 장남에게 왕위를 물려줬을까? 성삼문은 정말 세조의 왕위 계승 자체에 반대한 것일까?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거듭 그의 복위를 꾀한 측근들 아닐까? 경회루를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한 왕은 세종인데, 그가 가장 우려했던 일이 경회루에서 벌어진 것도 얄궂다. 
 아무튼 수많은 굴곡진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그와 상관없이 경회루의 자태는 여전히 아름답기만 하다.

굴곡진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경회루. [사진=윤상구]

 

황인희 작가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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