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일개 용병대장에서 밀라노의 왕위까지 차지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란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용병대장으로 잘 싸웠고,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 전략으로 이겨서 부하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래서 서출이지만 밀라노 공작 필리포 비스콘티의 딸과 결혼할 수 있었다. 갑자기 장인이 죽고 밀라노에 공화정이 수립되려 할 때 그는 아내의 권리를 주장하며 밀라노를 차지했다. 그의 출세가 너무나 드라마틱해서 용병들은 모두 그와 같이 되기를 선망했다.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그의 넷째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형이 밀라노를 다스렸으나 7살 된 아들 쟌 갈레아초 스포르차를 남기고 암살당했다. 그 때부터 삼촌인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섭정을 맡았다. 루도비코는 얼굴과 머리칼이 검정색이라 모로코의 무어인처럼 보였고, ‘일 모로’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이 별칭을 애칭으로 받아들였다.

  루도비코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며 능률적인 통치로 백성들의 신망을 얻게 되었다. 섭정이라는 불완전한 권력이었으나, 좋은 정치로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애썼다. 광대한 실험농장과 가축사육장을 통해 농업과 축산업을 육성하고, 철물, 에나멜, 악기 등 제조업을 지원했다. 상품과 사람들의 통행을 촉진하기 위한 도로를 확장했다. 2만명의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견직물 산업은 피렌체를 위협할 수준이 되었다<문명이야기 5-1>.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필렐포 등 예술가를 지원했다. 일종의 3S 정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자신의 훌륭한 통치로 밀라노가 풍요롭고 화려한 행복에 빠져있다는 착각을 주려 했는지 모른다. 밀라노는 전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궁정을 자랑하게 되었고, 메디치의 피렌체에 버금가는 르네상스의 절정을 구가하고 있었다.

조카는 똑똑하지도 못했고 병약해서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루도비코는 외형상의 최고 의전과 사치스런 생활을 조카에게 보장했다. 그러나 조카가 이미 20세의 성년에 도달해 있었고, 본인은 능력이 없었으나 처가인 나폴리 아라곤 왕가가 뒷받침하고 있었다. 특히 공작의 아내이자 나폴리의 공주는 남편의 권리, 즉 실질적인 권력을 되찾으려 했다. 밀라노에서 조카와 삼촌간의 권력다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한편 루도비코는 페라라의 공주인 베아트리체 데스테와 결혼을 했고, 그녀는 밀라노궁에 웃음과 기쁨을 줬으며 루도비코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루도비코가 실각하면 아들과 자신이 버림을 받을 것이라고 베아트리체는 생각했다. 루도비코가 아무리 실세라 해도 공작은 조카였고 퍼스트레이디는 나폴리 공주였다. 그들이 아들을 낳으면 미래는 어두워 질 것만 같았다. 이러한 처지를 베아트리체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찬탈을 부추겼다. 역사의 전면은 남자들의 무대지만 장막 뒤의 여자가 실질적인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폴리 아라곤 왕가의 간섭이 심해지자 루도비코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와 동맹을 맺었다. 자신의 조카인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를 막시밀리안 황제와 결혼시키고 많은 지참금을 제공했다. 대신 자신에게 밀라노 공작의 직위와 권한을 약속받았다. 나폴리는 루도비코의 이러한 행보에 거세게 항의했고, 불안해진 그는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듯이 프랑스와도 동맹을 맺었다. 샤를 8세가 나폴리의 왕권을 노리고 이탈리아로 들어올 때 밀라노 통과를 허용했다. 남의 칼로 적을 제거하는(借刀殺人之計) 계책을 실행한 것이다. 1495년 루도비코는 밀라노 공작이 되었다. 조카는 샤를 왕의 침입시기에 병으로 죽었다. 독살로 소문이 났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프랑스는 나폴리만 원하지 않았다. 샤를 8세를 따라온 오를레앙공 루이는 할머니(발렌티나 비스콘티)가 밀라노 공주였다며 밀라노의 왕위를 요구했다. 루도비코는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꼴이 되었다. 루도비코의 아버지가 혼란을 틈타 비스콘티 가문의 아내를 내세워 밀라노를 무력으로 차지한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루이는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어머니는 서출이고, 오를레앙공의 할머니는 적출이라며 밀라노 공국의 권리를 요구했다. 루도비코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교황 알렉산데르 6세, 베네치아와 힘을 합쳐 반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샤를 8세와 프랑스 군을 몰아냈다. 루도비코는 승리를 만끽하고 자부심에 가슴이 벅찼다. 나폴리를 제압하고 오를레앙공의 계획을 좌절시켰으며 연맹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조카도 이미 죽고 없었다. 루도비코의 지위는 튼튼해 보였다. 

그는 새로운 애인을 얻어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밀라노에 즐거움을 주던 아내 베아트리체가 웃음을 잃어버리자 밀라노 궁은 침울해졌다. 더욱이 1497년에 베아트리체는 출산과정에서 22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밀라노는 크나큰 슬픔에 잠겼다. 루도비코는 자책하며 고독과 기도로 세월을 보냈다. 2주 동안 직무를 정지하고, 하루 세 번 미사를 드리고 매일 아내의 묘소를 찾았다. 그리고 자기가 죽으면 아내와 함께 묻어달라고 소원했다. 

  그러나 비극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498년에 오를레앙의 공작이 프랑스의 왕(루이 12세)이 되었다. 그는 어릴 적에 할머니로 부터 밀라노는 네 재산이니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밀라노를 요구하는 루이왕은 대단히 치밀했다. 우선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교황의 아들인 체사레 보르자를 자신의 사촌누이와 결혼시키고 1499년 7월에 그와 함께 밀라노로 쳐들어 왔다. 루도비코는 황급히 동맹을 찾았으나 모두들 냉담했다. 교황이 한 편이 된 프랑스를 상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베네치아는 1494년에 프랑스 세력을 최초로 이탈리아로 끌어들인 문제를 상기시켰고, 피렌체는 사보나롤라의 등장과 죽음 등으로 혼란에 빠져있었으며 나폴리는 원수가 되어 있었다. 

  루도비코는 전쟁에는 능하지 못했다. 부하들에게 방어를 맡기고 막시밀리안 황제에게 구원군을 요청하러 갔는데, 그 사이에 부하 장수가 뇌물을 받고 항복해 버렸다. “유다 이후로 이보다 더 큰 배신은 없었다.”고 루도비코는 탄식했으나 엎질러진 물이었다. 황제에게서 빌려온 적은 병력으로는 프랑스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 루도비코는 체포되어 프랑스로 연행되었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히기도 해서 엄격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1508년 로슈의 지하 감옥에서 58세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탈리아는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나폴리, 교황세력 간의 견제와 균형으로 큰 전쟁 없이 현상유지하고 있었고 프랑스 등 외세의 침입에 대해서는 서로 힘을 합치는 묵계가 이루어져 있었다. 루도비코는 이러한 묵계를 배반한 것이다. 이후 이탈리아는 외세의 침입에 속수무책이 되었다. 다섯 세력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힘을 소진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영광은 사라지고 있었다. 그 책임이 루도비코에게 있었다. 

발단은 공자에 의해 성인으로 추앙받은 주공처럼 하지 못한데 있다. 주공은 조카인 성왕을 잘 보필하여, 조카가 장성하였을 때 권력을 돌려주는 미덕을 보여줬다. 루도비코는 조선의 수양대군처럼 조카의 자리를 찬탈했다. 지나고 보니 찬탈할 필요도, 프랑스를 끌어들일 필요도 없었다. 조카는 시간이 지나 병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냥 때를 기다리고 있었으면 저절로 왕관이 굴러왔을 텐데 조급해서 기다리지 못했다. 군자는 편안히 강태공처럼 때를 기다리는데 소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란다는(君子 居易而使命 小人 行險而徼倖) 중용의 글귀가 생각난다. 루도비코는 소인처럼 행동했다. 한 순간의 탐욕이 자신과 이탈리아의 불행을 초래했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묻듯 신은 루도비코에게 무거운 형벌을 내렸다. 아내도 죽고 밀라노공국은 외국으로 넘어갔다. 자신은 차디찬 외국의 감옥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래도 자기 아내 옆에 묻히고자 하는 소망은 들어줬다. 

  민주당 대표 선거에 돈 봉투가 건네진 사건이 언론의 초점이 되고 있다. 인과응보의 법칙은 비껴가지 않고, 신은 정치인의 잘잘못에 대한 책임을 빠짐없이 묻고 있는 것 같다. 루도비코를 처벌했듯이…. 공자님 말씀처럼 정치는 올바르게 해야 한다(政者正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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