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퀘이커 교도들의 델라웨어 계곡 이주

1647년 잉글랜드 Leicester 출신의 조지 폭스가 설립한 개신교의 한 부류인 퀘이커 교는 성서의 해석이 개개의 신자들에게 맡겨져 있으며 각자의 해석을 모두 존중해 주었기에 잉글랜드 중북부의 하류층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퀘이커 교도들은 모든 사람이 신의 가호 아래 평등하다고 믿었기에 왕실과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납세의 의무까지 거부했다.

왕실과 귀족들에게 대대적인 탄압을 받던 퀘이커 교도들은 1675년부터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그들의 지도자 윌리엄 펜이 국왕으로부터 수여받은 토지인 북아메리카의 펜실베니아 그리고 그 주변 지역인 뉴저지, 델라웨어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주로 같은 종파의 남녀들이 혼인하고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다고 믿는 퀘이커 교도들은 교회도 필요 없고 성직자도 필요 없으며 개개인의 노력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설탕은 노예 노동에 의하여 생산되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 '소금은 그에 부과되는 세금이 군대를 유지하는데 사용되므로 요리에 사용하지 않는다' 등 비현실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퀘이커 교도들은 아이들이야말로 양심적이고 천진난만한 존재이므로 용기를 주고 칭찬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존중 받으며 자라난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나면 공동체적 가치에 따라 금욕적 생활을 해야만 하는 동시에 예전에 어른들에게 받았던 지원과 격려를 현재의 어린이들에게 그대로 베풀어야 했다.

외부인들에 대하여 관대했던 퀘이커 교도들이 생각하는 '자유'는 모든 인류가 누려야 하는 자유이며 양심의 자유였으며 "네가 하기 싫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 또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해 주었으면 하는 태도로 네가 다른 사람을 대하라"는 황금률로 표현될 수 있다.

이와 같이 펜실베니아의 퀘이커 교도들은 - 배타적인 매사추세츠의 청교도들이나 버지니아의 왕당파들과 달리 - 외국인들이나 다른 기독교 종파들과 상호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려 했으므로 이민자들의 나라 미국의 초석을 쌓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4. 영국 북부 사람들의 내륙 개척지 이주

18세기에 접어들자 기존의 이민자들과 달리 경제적 이유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경계 지역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양안 지역으로부터 대규모 가족 단위의 이민자들이 영국령 북아메리카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존 영국령 북아메리카 주민들의 눈에 영국의 변방에서 건너 온 빈민들에 불과했던 이들은 우선 펜실베니아로 이주했지만 여기서도 잘 적응하지 못 하고 애팔래치아 산맥 지대로 이주하였는데 버지니아의 서쪽 변경에 정착한 사람들의 숫자가 제일 많았다.

가난 이외에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었던 이들 이민자들은 비슷한 복장을 하고 서로를 성(surname)이 아닌 이름(first name)으로 부르는 등 평등한 인간관계를 유지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유해지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지위에 서게 되고 돈을 못 벌어서 다시 가난해지면 열등한 지위로 떨어지는 새로운 이민자 사회는 이전에 왔던 다른 세 부류의 이민자 사회보다 훨씬 더 오늘날 미국의 모습과 닮은 점이 많았다.

본인부터 글을 읽을 줄 몰랐고 자녀들의 교육에는 미처 신경 쓸 여력이 없이 당장의 생계 유지에 만 몰두하던 영국 북부 출신의 이민자들이 생각하는 '자유'란 굶주림의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살아갈 자유를 의미했다.

영국에서도 빈곤층이었고 신대륙에서도 역시 가난을 벗어나지 못 했지만 매사추세츠, 펜실베니아 및 버지니아의 부유층 밑에서 고용인으로 일하기를 거부했던 이들은 프랑스인들 및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물리적 충돌을 불사하며 계속 서쪽으로 이주하면서 북미 대륙 전체를 영어 사용권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다.

[지도 3] 메이슨-딕슨 라인.

 

이렇게 네 가지 문화가 함께 공존하던 영국령 북아메리카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 했던 방식으로 두 개의 문화권으로 통합된다.

찰스 1세가 퀘이커 지도자, 윌리엄 펜에게 나누어 주었던 영토 - 현재의 펜실베니아주 - 와 성공회 신자였다가 카톨릭으로 개종한 볼티모어 남작, 세실 캘버트에게 수여했던 영토 - 현재의 메릴랜드주 - 사이의 경계선 분쟁은 1681년 이래 1763년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영국에서 온 두 천문학자, 찰스 메이슨과 제레마이어 딕슨은 1763년부터 1767년에 걸친 조사 끝에 북위 39도 43분을 펜실베니아와 메릴랜드의 경계선 - [지도 3]의 적색선 - 으로 확정하는데 이 를 메이슨-딕슨 라인이라고 부른다. 

당시 펜실베니아는 노예제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반면 메릴랜드는 이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독립 이후 메이슨-딕슨 라인이 북부와 남부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첫 번째와 세 번째 이민자 집단은 미국 북부인, 양키(Yankee)가 되었고 두 번째와 네 번째 이민자 집단은 미국 남부인, 딕시(Dixie)가 되면서 네 개의 문화를 가지고 있던 미국이 두 개의 문화를 가진 나라로 변모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861년부터 1865년에 걸쳐 벌어졌던 남북 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하면서 남부의 노예제를 강제로 폐지해 버리자 미국 전역이 단일 문화권으로 통합되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이민 집단의 후손들은 대체로 북군의 편에 섰고 두 번째 이민 집단의 후손들은 대부분 남군에 가담했던 반면 네 번째 이민 집단의 후손들은 스스로 '나는 남부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남군보다는 북군을 응원했다.

당시 북부에는 영국 이외의 유럽 국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기존 잉글랜드 이주민의 후손들과 함께 살고 있었지만 남부의 백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잉글랜드 이주민의 후손들이었기에 북군의 남군에 대한 승리를 미국 문화의 독립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후 유럽 대륙 전역에서 미국으로 이민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기존 잉글랜드 이주민들 중심의 전통적인 미국은 전세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는 현대적인 미국으로 변모해 나가기 시작한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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