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사진=연합뉴스]

 

누가 춘원을 왜곡하는가? 일본에 후쿠자와 유기치가 있고, 중국에 양계초가 있다면, 한국에는 이광수가 있다. 춘원은 한국 근현대 500년에 걸친 최고의 문호, 지성, 오피니언 리더, 계몽가, 문명 비평가, 사상가, 독립 운동가, 애국자다. 그는 그 누구도 가십거리로 삼아 함부로 욕하거나 폄훼할 수 없는 정치와 문화의 거대한 산맥이다.

나는 1992년부터 왜곡되고 매도당하는 춘원의 진실을 밝히는 연구에 투신했고, 현재 『춘원에게도 봄은 오는가?』라는 저작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지금껏 춘원은 학계와 일반 대중으로부터 ‘친일자’ 와 ‘변절자’로 매도당해 왔다. 학자 혹은 비평가를 행세하는 사람들마저도 춘원의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친일과 반일의 이항대립으로 이광수를 ’친일 변절자’로 몰아세웠다. 

한국 문예비평계의 거장으로 행세했던 김윤식의 대표 저작 『이광수와 그의 시대』는 결코 학술서가 아니다. 춘원을 매도하기 위한 구리고도 구린 정치적 비판서일 뿐이다. 친일이라면, 왜 친일을 해야 했는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함께 진지한 학술적 연구를 방기하고 오로지 시골구석에 처박혀 사는 할멈의 넋두리처럼 무작정 매도했을 뿐이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의 선대들은 어떠했는가. 일본에 대항해서 무력투쟁의 독립운동을 펼친 유형과 일본 체제에 적응하면서 실력을 양성하고 장차 일본에 대항하자는 유형이 상존했다. 전자는 김구 등 ‘바위에 계란 치기’식 만용을 부린 지극히 우매한 패턴이고, 후자는 안창호를 위시한 의기(義氣)보다는 슬기를 발휘하는 전략적 패턴이다. 

도산 안창호의 뜻을 이은 춘원은 바로 후자를 대표하는 천재적 지도자였다. 지금까지 이광수가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에 대해 “문학은 거목이나 인물은 친일”로 파악해 왔다. 이는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너무나 유치하고 비열한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이와 같은 언설은 사실과도 어긋나는 명백한 왜곡이다. 

그렇다면, 이광수의 시대는 어떠했는가. 그는 1921년 상하이 임정을 떠나고부터 당대 한국 청년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전략적 예지를 발휘해서 민족 독립의 리더로 활약했다. 그의 문학 활동은 바로 ‘민족독립’과 ‘민족보존’이었다. 그래서 함석헌도 민족을 계몽하고자 춘원이 잘도 울었다고 감탄하지 않았던가!

춘원은 총이 아닌 붓대를 쥐었다. 탁월하고 명석한 천재적 두뇌는 그를 일찍부터 ‘적자생존’의 사상가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2·8독립선언에서 시작된 그의 생애는 오로지 강대한 일본에 대항해서 민족의 보존과 민족의 장래를 도모하는 ‘전략적 친일’이었다. 

현재 좌파들이 그토록 죄악시하는 친일은 사실 당시 식민지 조선인 모두의 생존방식 그 자체였다. 전근대 조선보다 월등히 선진적이고 우수한 근대 일본의 문명을 조선인 가운데 그 누가 거절할 수 있었던가. 절대 다수는 이를 수긍하고 적응하면서 ‘일본인’으로 살았다.  

사실이 이러하면, 친일이란 용어도 넌센스다. ‘친일’이 아니라 ‘적일(適日)’이다. 춘원은 바로 적일의 정신적 기수였다. 1920년대부터 춘원의 글에는 독창적인 ‘친일전략’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그런데도 제대로 독서하지도 않고 무조건 변절자로 몰아세운다. 그런 바보 천치들의 사고와 안목에 그저 기가 찰 뿐이다.

춘원의 친일은 그 무슨 ‘변절’이 아니라 거칠고 척박한 시대에 적응하면서 길러낸 슬기이자 담력이고, 사상이자 전략적 비전이었다. 이제 우리는 춘원의 ‘친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보다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는 친일의 슬기로움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자유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친일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지혜였고, 한국인의 정체성이었다. 춘원은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그런 위대한 정신 유산을 남겨 줬다.

춘원 이광수.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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