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이 해제된 뒤로 전국 지방의회 의원들이 기다린 듯 줄줄이 해외연수를 떠나고 있다.

하지만 연수 취지와 동떨어진 대성당, 공원, 투우장, 궁전 등의 관광지 방문 일정으로 채워지기 일쑤인 데다 연수보고서마저 인터넷 자료를 베끼는 경우가 허다해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27일 연합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경기도 파주시의회가 지난달 아랍에미리트와 스페인으로 10일 일정의 연수를 다녀왔다가 외유성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계획서대로라면 출장 목적은 선진도시의 우수제도와 정책 추진현황 파악, 국제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선진의회 구현 및 역량 강화, 관광자원 개발 등이다.

하지만 일정은 대부분 관광 위주로 짜였다.

아랍에미리트에서는 두바이 문화시설 탐방과 팜아일랜드 및 주요 관광산업 인프라 시찰이 잡혔고 스페인에서는 몬세라트 수도원, 톨레도 대성당, 세비야 마리아 루이사공원, 그라나다 론다 투우장 등을 둘러봤다.

마드리드 시의회를 제외한 대부분이 관광지다.

파주 지역 10개 시민단체는 성명을 내고 "세금 낭비가 파주시의원들의 습관이 아닌지 의심된다"고 비난했다.

경북도의회 건설소방위원회는 지난 23일 6박 8일 일정으로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연수를 떠났다.

구미 YMCA는 성명을 내 "일정이 외유성 출장이라고 짐작할 만한 장소들로 가득 차 있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연구할지 등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부채가 2천억원이 넘는데 구미시가 의원들의 외유성 해외연수에 1억원 넘게 사용하는 것은 혈세 낭비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다음 달까지 예정된 각 지방의회의 해외연수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경남 창원시의회 전체 의원 45명 중 4개 상임위원회(기획행정·경제복지여성·문화환경도시·건설해양농림) 소속 39명은 이달부터 차례로 유럽행 공무 국외연수에 나선다.

상임위 소관 업무와 관련한 기관 방문 일정이 일부 잡혀있긴 하지만 업무 연관성이 떨어지는 성, 궁전 등 관광지 방문 일정이 다수 포함됐다.

시의원 39명의 출장에 드는 예산은 1억5천만원가량이고, 동행하는 시의회 공무원 17명 몫까지 더하면 전체 예산은 2억원으로 늘어난다.

부산진구의회는 2030 부산세계엑스포 유치와 관련해 4월에 아랍에미리트 공무 국외 출장을 갈 예정이다.

이에 대해 부산참여연대와 노동당·정의당·진보당 부산시당은 "물가와 공공요금 폭등으로 걱정하는 구민은 안중에도 없이 외유성 출장을 가고 있다"며 "엑스포 실사단이 곧 한국에 방문할 것인데 왜 지금에서야 출장을 가는지 알 수 없다"고 날을 세웠다.

허식 인천시의회 의장은 자신의 지역구에서 발생한 전통시장 화재로 상인들이 큰 피해를 봤는데도, 시의원들과 6박 7일 일정으로 싱가포르·대만 출장을 다녀와 언론·시민단체로부터 비난받았다.

점포 47곳이 불에 탄 대형 화재였지만 허 의장은 피해 복구와 지원 대책 마련은 뒤로한 채 그대로 출장길에 올랐다.

시민단체인 인천평화복지연대는 보도자료를 내고 "시의회 해양항만특위 해외연수에 해당 특위 위원도 아닌 허 의장이 반드시 참가해야 했는지 의문"이라며 "앞으로 민생을 최우선으로 하는 시의회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고 지적했다.

충북도의회 건설환경소방위원회 소속 박지헌 의원은 유럽 연수를 떠났다가 항공기 내에서 술에 취해 승무원, 주변 승객들에게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다는 의혹이 불거졌고 이를 부인하던 박 의원이 결국 공개 사과하는 일이 있었다.

해외 연수 이후 홈페이지에 게시하는 보고서도 엉망이다.

대전시의회 행정자치위원회는 지난해 12월 18∼25일 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를, 산업건설위원회는 같은 달 19∼26일 스페인·프랑스를 각각 방문했는데, 연수 결과를 적은 보고서가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민주당 시당이 해외연수 결과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시의원들은 인터넷 자료를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베꼈고, 일부는 다른 기관 국외 공무 결과 보고서나 전임 시의원들의 보고서를 표절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제도 폐지까지 거론하며 의회의 자성을 촉구했다.

송광태 창원대 행정학과 교수는 "관광성 해외 연수는 비난받지 않을 수가 없고, 국민 눈높이에 안 맞기 때문에 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 예산편성 지침에서도 빼야 한다"며 "현행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건 의원을 위해서도, 의회를 위해서도, 국민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나철성 강원평화경제연구소장은 "보고서를 보면 현장에서 발견한 참신한 발상이나 정책 제언은 찾아볼 수 없어서 식상하다는 표현밖에 나오지 않는다"며 "범위나 내용이 모호한 탐방이 아닌, 분야별·지역별 정책 심화 연수프로그램으로 짠다면 외유성 논란이 불식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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