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 근무 시간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던 시절을 살아온 나같은 사람은 지금 전공의들의 근무 시간표를 보면 입을 다문다. 수술하다가도, 회진하다가도 퇴근 시간이 되면 그대로 나가 버린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그러나 이 책 체목이 '라떼 이야기'인 만큼 여기에서만은 내 마음대로 나의 오래 전 경험을 이야기하겠다."(42쪽)

소아심장학 분야 권위자로 울산의대 서울아산병원 학장 등을 지낸 박인숙 전 의원(19, 20대 국회의원)이 자서전을 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병원에서 인턴 1년을 마친 뒤 1974년 미국으로 떠나 소아과, 그중에서도 소아심장과 전공의가 된 일화부터 1989년 서울아산병원 개원에 맞춰 영구 귀국하기까지의 삶이 주로 담겼다.

박 전 의원은 당시 소아심장과에서 세계적으로 이름난 미국 텍사스 Baylor 의대에서 트레이닝을 마쳤다. 이후 귀국하기까지 같은 대학 병원에서 임상 조교수를 지냈다. 특히 재밌는 부분은 박 전 의원이 1970년대 미국 시골 병원에 잠시 있을 적에 겪은 일화들이다. 박 전 의원은 지금은 간호사, 간호조무사, 그리고 각종 기계 및 전산 시스템이 처리해줄 일들을 의사들이 일일이 다 해야 했던 당시 현실과 경험 부족에 영어까지 서툴러 베테랑 간호사에게 크게 혼이 났던 일 등을 담담하게 고백한다. 박 전 의원은 "사람이 너무 슬프거나 너무 기쁠 때 눈물이 나오지만, 스트레스를 너무 심하게 받은 후 긴장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 그냥 울음만 나온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체험하였다"(85쪽)며 "나중에는 내가 이걸 잘한다고, 주사를 한 번에 꽂는다고 'One-time Park'이라는 별명도 들었다. 어떤 말보다도 간호사들로부터 듣는 이런 칭찬이 나를 가장 기쁘게 했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74쪽)고 회고한다.

박 전 의원은 "다양한 경험을 쌓은 것은 좋았지만 밤새도록 아기들의 인공호흡기를 조절하고 검사 시료를 들고 검사실로 달려가고 검사 결과지를 가지러 다시 검사실로 가는 등 당직 때마다 어두컴컴하고 텅 빈 병원 복도를 밤새도록 뛰어다녔던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있다"며 "지금은 모든 검사 결과를 모바일을 통해 병원 밖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시대로 과거의 이런 시절을 '원시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46쪽)고 말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열여섯 번째 이야기, '한국에서 온 심장병 아이들, 남미에서 온 심장병 아이들'이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부인 낸시 레이건 여사는 1983년 11월 한국 방문을 마치고 선천성 심장병 수술을 받을 한국 어린이 두 명을 데리고 미국으로 향했다. 빈국의 아이들은 다른 나라에서 온 아이들과 달리 부모 없이 혼자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원조를 받아야 했던 나라가 수십년 뒤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됐듯 한국은 심장병 아이들을 미국 도움으로 미국에 보내 수술을 받게 해야 했던 나라에서 외국 아이들을 한국으로 데려와 심장병 수술을 해주는 나라가 됐다. 

박 전 의원은 글로벌 출판사 Springer와 함께 소아심장학 교재 최신판, 'An illustrated Guide to Congenital Heart Disease'를 냈다. 박 전 의원은 "남녀차별, 인종차별의 해결책, 예방책은 결국 각자 개개인이 스스로 치열하게 노력해서 실력을 키움으로써 차별을 극복하는 것"이라며 "지난 수십년 간 여러 분야에서 성공한 한국인들이 이를 증명해 보이고 있다"(213쪽)고 강조한다. 

박 전 의원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운이 아주 좋았노라고 수도 없이 말한다. 그러면서 한 때 맺었던 '시절 인연들'이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이야기로 담백하게 풀어나간다. 페이스북에 연재하다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 책으로까지 내게 됐다고 한다.

박인숙 저, 『박인숙의 '라떼' 이야기』, 도서출판 청원, 2023년 03월 17일.

김진기 기자 mybeatles@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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