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시장이 정상 상태를 크게 벗어나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앞으로 빠르면 한 달, 늦어도 올 하반기 안에 글로벌 금융시장은 미증유의 대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한국은 과연 그러한 위기의 후폭풍을 피해 갈 수 있는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다고 믿어도 되는 것일까?

#. 1998년 2월의 참혹한 추억

필자는 IMF 외환위기 쓰나미가 한국을 덮치고 있던 1998년 2월, 독일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인천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가는 루프트한자 항공기에 오르는 순간, 입이 쩍 벌어졌다. 최대 500명 이상이 탈 수 있는 B747 점보 여객기 기내에 승무원 제외하고 탑승객이 20명도 채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달러당 800원 정도 하던 환율이 2,000원을 넘어섰으니 누가 감히 해외 나갈 엄두가 나겠는가.

덕분에 텅 비다시피 한 기내에 벌러덩 누워 편안하게 여행했지만, 그 시각 한국 사회 곳곳에선 외환위기 후폭풍에 따른 곡소리가 진동했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철밥통이 깨지면서 대우가 공중 분해되었고, 현대와 기아 그룹이 쓰러지는 등 국내 30대 대기업 중 16개가 파산·해체, 혹은 주인이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200여만 명이 정든 직장에서 정리해고되어 길바닥에 나앉았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장(家長)들이 산으로 들로 헤매는 아비규환의 상황에 부닥쳤다.

6·25 전쟁을 제외하고 한국 경제에 가장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는 외환위기, 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IMF의 구제금융 지원업무에 깊이 관여했던 로런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부 부장관은 서슴없이 “1997년 한국의 위기는 정부의 치명적 실수로 야기된 인재(人災)”라고 진단했다.

#. 김영삼 정부, OECD 가입 위해 무슨 일을 저질렀나?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이 외환위기를 당한 이유 중 하나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 덕분이다. 1985년 타이완의 64% 수준이었던 한국의 인건비는 민주화 여파로 급상승하여 1995년 120%로 타이완을 초월했다. 국민소득 1만 달러 시점에서 한국의 임금 수준은 싱가포르의 두 배, 영국의 세 배가 넘었다.

고비용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저효율이었다. 제조업 취업자 1인당 생산액이 7만 5,000달러로 일본(20만 5,000달러)의 36% 수준, 종업원 1인당 부가가치 증가율은 1995년 19.2%에서 1996년에는 1.1%로 급락했다.

1997년 경영 컨설팅 기업 부즈알랜은 한국이 선진국의 첨단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고, 중국 등 개발도상국의 추격으로 인해 넛 크래커(호두 까는 기계) 사이에 끼인 호두 신세를 면치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하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바로 이 해에 한국은 IMF 외환위기를 겪게 된다.

로렌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부 부장관은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는 정부의 치명적 실수로 야기된 인재(人災)라고 진단했다.
로렌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부 부장관은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는 정부의 치명적 실수로 야기된 인재(人災)라고 진단했다.

경제환경이 난마처럼 얽힌 상황에서 1995년 수출이 1,250억 달러를 기록, 1,000억 달러 고지를 돌파했다. 한국의 1인당 소득도 같은 해 1만 달러를 넘었다. 장밋빛 환상에 젖은 김영삼 정부는 1995년 3월 OECD(선진국 경제협력기구) 가입을 신청했다. OECD는 가입의 전제조건으로 무역·금융·투자 부문 자유화, 즉 국내 자본시장을 완전 개방하라고 요구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던가. OECD 가입을 정권의 최대 치적으로 설정한 김영삼 정부는 이 요구조건을 흔쾌히 수용했다. 덕분에 외국 자금이 어떠한 견제 장치도 없이 손쉽게 국내로 유입·유출되면서 원화 환율이 크게 출렁였다. 1994년 803원이던 원화 환율이 1995년 771원으로 하락했다. 수출경쟁력은 바닥을 치고, 수입 제품 가격은 싸지면서 소비재 수입이 폭증했다. 값싼 수입품이 넘쳐나자 국민은 소비를 크게 늘렸고, 해외여행 자유화 바람을 타고 너도나도 해외여행을 떠났다.

한국 경제가 위기에서 탈출하려면 당장 고평가된 원화를 평가절하하여 수출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원화를 평가절하하면 1995년 말 달성한 1인당 소득 1만 달러의 성과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다. 김영삼 정부는 OECD 가입과 ‘1인당 소득 1만 달러’를 유지하기 위해 고평가된 원화를 의도적으로 방치했다.

#. OECD 가입 후 대기업 연쇄 부도

김영삼 정부는 대기업의 중복 과잉투자를 막기 위해 업종 전문화 정책으로 규제해 왔다. 그런데 고비용-저효율 구조로 무역적자가 급증하는 와중에 김영삼 정부는 수출 활성화를 명목으로 투자 제한 조치를 철폐했다. 호기를 만난 대기업들은 해외에서 저리 자금을 빌려다 경쟁적으로 철강·자동차·반도체·석유화학 분야의 설비투자 경쟁을 벌였다.

그 결과 석유화학·조선은 과잉 설비율이 215%, 반도체·철강은 46%나 됐다. 자동차 생산능력은 1992년 말 180만 대에서 1997년 말 448만 대로 240%나 폭증했다. 급진적인 몸집 불리기 덕분에 1991년 초 국내 5대 대기업 평균 5조 원 정도였던 부채가 1997년 IMF 사태가 터질 무렵 각각 24조~25조 원으로 다섯 배 늘었다. 종합금융사들은 해외 투자 경험 부족에도 불구하고 외국 금융기관에서 단기외채를 빌려다 동남아에 장기 투자 사업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단기외채가 1,000억 달러로 불어났다.

1995년 수출 1,000억 달러 돌파로 축제 분위기에 들떴던 한국은 1996년 무역수지 적자가 237억 달러로 역대 최악을 기록했다. 이는 GDP의 5% 수준에 달하는 엄청난 수치였다. 1997년 1/4분기에는 74억 2,000만 달러, 분기별 사상 최악의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제 살 깎아 먹기식  수출로 무역적자가 심화되자 기업들은 빚을 내서 이자와 원금을 갚는 등 돌려막기에 나섰다. 덕분에 외채는 1993년 440억 달러에서 1997년 말에는 무려 1,500억 달러로 폭증했다.

한국은 1996년 10월 OECD 정식 회원국이 되었는데, 이를 축하하기라도 하듯 대기업 연쇄 부도 쓰나미가 닥쳤다. 1997년 들어서자마자 제철소 건설에 5조 원을 투자한 한보그룹이 쓰러졌고(1월 23일), 삼미(3월 19일), 진로(4월 21일), 대농(5월 28일), 재계 순위 9위의 기아 그룹이 부도가 났다(7월 15일).

기아그룹 부도를 알리는 언론보도. 김영삼 정부가 OECD 가입에 성공한 직후 대기업들의 연쇄 부도로 외환위기가 닥쳤다.
기아그룹 부도를 알리는 언론보도. 김영삼 정부가 OECD 가입에 성공한 직후 대기업들의 연쇄 부도로 외환위기가 닥쳤다.

이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1997년 7월 태국에서 발생한 외환위기 태풍이 동남아를 강타했다. 위기 타개를 위해 한국의 금융개혁위원회는 5개월 작업 끝에 13개의 금융개혁법안을 마련했으나 국회는 상정을 거부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국제 금융기관들은 “한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고 선언, 외국 자본의 한국 탈출이 시작됐다. 주식시장이 폭락하고 경쟁력을 상실한 중소기업들이 쓰러지면서 외환보유고가 급감하여 국가부도 직전 상황에 몰렸다.

#. 김영삼 대통령의 미친 짓

1997년 11월 14일 오전 8시 15분, 강경식 경제 부총리와 김인호 경제수석,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IMF에 구제금융 지원 요청을 보고했다. 대통령이 이를 수락하여 IMF 총재 캉드쉬가 11월 16일 극비리에 입국하여 강경식 부총리와 협상을 벌였다.

이날 강경식-캉드쉬 회담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당시 IMF는 금융위기에 처한 나라에 긴급 자금을 지원하면서 가혹하기 그지없는 재정 긴축, 구조 조정, 고금리 정책을 강제했다. 이로 인해 자금 지원을 받은 나라들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는커녕 골병이 더 깊어지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었다. 워낙 조건이 가혹하여 IMF에 대한 악명이 자자하다 보니, IMF도 지원방식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날 캉드쉬 총재는 IMF가 한국에 3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제공하되, 한국 정부가 앞장서서 개혁을 추진하고 IMF는 이를 뒷받침(back up)하는 형태로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IMF가 악명 높았던 조건을 철회하고 개혁의 주도권을 한국에 양보함으로써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델의 탄생이 기대되었다.

1997년 11월 16일 캉드쉬 총재는 극비 방한하여 강경식 당시 경제 부총리와 300억 달러를 지원하되, 한국이 주도하는 개혁 방식으로 위기를 타개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1997년 11월 16일 캉드쉬 총재는 극비 방한하여 강경식 당시 경제 부총리와 300억 달러를 지원하되, 한국이 주도하는 개혁 방식으로 위기를 타개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한국의 경제위기 타개책이 이날 강경식-캉드쉬 합의대로 진행됐다면 외환위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런데 퇴임 3개월을 남겨놓은 김영삼 대통령이 초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강경식 부총리가 캉드쉬 총재와의 합의한 내용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한 날은 1997년 11월 19일 수요일 아침 8시 10분이다. 대통령에게 보고 후 IMF에 구제금융 요청 사실을 공식 발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관계자들은 캉드쉬 총재와의 합의 내용이 발표되면 위기가 진정되어 안정세로 돌아설 것으로 낙관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은 강경식-김인호 팀에게 IMF와의 협상 내용을 보고받은 지 20분 후 파멸적인 선택을 한다. 강경식 부총리를 경질하고 임창렬(당시 통상산업부 장관)을 후임 부총리에 임명한 것이다. 김영삼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 발표를 몇 시간 앞두고 위기 타개책을 주관해온 사령탑의 목을 치는 충격적인 인사를 단행한 이유를 “분위기 쇄신을 위해서”라고 밝혔다.

이날 경제 부총리 교체가 평지풍파를 몰고 왔다. 김영삼 대통령은 신임 임창렬 부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면서 “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포함하여 업무 인수인계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이날 오후 임창렬은 기자회견에서 무슨 까닭인지 “우리는 IMF 도움 없이도 위기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 IMF 금융지원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며 IMF행을 반대했다. 한국 정부와 IMF 간의 극비 합의사항을 신임 경제 부총리가 뒤집어버린 것이다.

임창렬의 발언은 외국 금융 관계자들에게 “한국은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나라”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그들은 경쟁적으로 한국에서 돈을 빼내가기 시작했다. 원화 가치 폭락, 주식시장 대폭락, 달러 고갈로 경제가 아수라장이 되자 11월 21일 오전, 임창렬 부총리는 “IMF로 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항복 선언을 발표했다.

11월 21일 밤 10시 15분, IMF는 한국에 유동성조절자금 지원 내용을 공식 발표했다. IMF가 위기에 처한 국가에 금융지원을 약속하면 환율이 내려가고 외환시장이 안정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국제 금융시장에서 신뢰를 상실한 한국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벌어졌다. 11월 21일 달러당 1,200원이었던 달러 환율이 12월 13일 1,710원으로 뛰었다. 강경식 부총리 경질 전날인 11월 18일, 159억 달러였던 가용외환보유액은 IMF 지원 요청 후에도 계속 줄어 12월 13일 86억 달러로, 거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김영삼의 11월 19일 개각과 임창렬의 무책임한 발언이 외환위기를 폭발시킨 뇌관 역할을 한 셈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3개월이 남은 상황에서 강경식 부총리를 해임하고 임창렬을 후임에 임명했다. 임창렬은 IMF 구제금융을 거부하는 발언을 하여 국제 금융시장의 신뢰를 상실, 외환위기를 자초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3개월이 남은 상황에서 강경식 부총리를 해임하고 임창렬을 후임에 임명했다. 임창렬은 IMF 구제금융을 거부하는 발언을 하여 국제 금융시장의 신뢰를 상실, 외환위기를 자초했다.

#. 피할 수 있었던 1997년 외환위기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IMF가 캉드쉬-강경식 회담에서 결정했던 ‘한국 주도의 개혁’이라는 프로그램을 파기하고 전과 다름없는 재정 긴축, 구조 조정, 고금리 정책을 한국 정부에 강제했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한국은 충분히 살아날 수 있는 기업들까지 쓰러져 200만 가까운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1998년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6.7%로 6·25 동란이 끝난 1953년 이래 최악을 기록했다. 1998년 1인당 국민소득은 6,800달러로 과거 8년간의 경제성장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또 박정희·전두환 시대를 거치며 건실하게 형성된 중산층을 극빈층의 나락으로 추락시켜 양극화 대결 구도가 형성되면서 민주주의의 토양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김영삼이 저질러놓은 IMF 외환위기의 진상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발견된다. 김영삼 정부 시절 날로 심각해지는 외채 폭증 사태, 백치에 가까운 김영삼 대통령의 경제 상식, 고비용-저효율 구조의 심화가 얼마나 치명적 위협이었는지는 바보가 아니라면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당국자들은 “한국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니 걱정 말라”고 목청을 높였고, 정치권은 대권 놀음에 심취하여 도낏자루 썩히느라 바빴다.

필자가 기억하기로는 이 미증유의 위기 상황을 보면서도 동아일보 회장을 역임했던 이동욱 선생을 제외하면 누구도 경고 사이렌을 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노무라증권 서울지점이 내놓은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Alarm bells is ringing for Daewoo group)’라는 보고서가 위기에 불을 질렀을 뿐이다. 한국의 수많은 금융·재정 전문가와 관료·학자·언론은 위기가 닥칠 것을 알면서도 침묵했을까, 아니면 정말로 몰라서 말하지 않았던 것일까?

#. 미국 SVB·크레디트스위스 은행 파산의 후폭풍

미국 은행업계 16위, 2022년 말 기준 총자산 275조 원, 총예금액 230조 원에 달하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Silicon Valley Bank)이 파산했다. 미국 은행 파산 사례 중 두 번째로 큰 규모다. 미국 내에서 대단한 우량기업으로 평가받았던 SVB의 몰락은 일파만파의 파장을 몰고 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의 가상화폐 전문 은행인 실버게이트 캐피털(Silvergate Capital)에 이어 총자산 1,104억 달러(약 146조 원)에 예치금 886억 달러였던 시그너처 은행(Signature bank)이 폐쇄 조치 되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충격파는 대서양 건너 스위스를 강타했다. 앞서 열거한 은행보다 자산 및 예금액 규모가 훨씬 크고 164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9대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Credit Suisse Bank)가 파산 위기를 맞았다. 이 은행은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경쟁사인 UBS에 헐값에 인수되었다.

세계적인 신용평가사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UBS가 크레디트스위스 인수로 큰 위험이 예상된다면서 신용 전망을 하향 조정했다. 이것은 크레디트스위스의 부실이 일단락된 것이 아니라, 그 위험이 UBS로 전이되었을 뿐이란 사실을 암시하는 신호다. 신뢰와 안전의 상징이었던 스위스 은행의 몰락 사례는 그들에 비하면 규모나 역사, 자본금 측면에서 조족지혈이나 다름없는 한국 금융계에 큰 경종을 울리고 있다.

한국인들의 노후생활을 책임지고 있는 국민연금이 SVB 주식·채권 1,390억 원 상당을 보유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뿐만이 아니다. SVB 충격파로 주가 대폭락 사태를 맞고 있는 미국 중소은행인 퍼스트리퍼블릭의 주식 25만 2,427주(평가액 401억 7,000만 원 상당)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현재까지 드러난 것만 이 정도니 앞으로 다른 곳에서 금융위기가 연쇄반응을 일으킨다면 과연 내가 낸 국민연금이 무사하다고 믿을 수 있을까? 불길하게도 국민연금의 지난해 기금운용 성적은 참혹했다. 수익률이 마이너스 8.22%, 금액으로는 80조 원 손실, 1988년 국민연금 제도가 도입된 이후 최악의 성적표다. 국민이 피땀 흘려 벌어서 노후생활을 기대하며 가져다 바친 80조 원이 연기처럼 허공으로 날아간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후폭풍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한국을 강타할 것인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와중에 상상을 초월하는 무역적자 누적이라는 더 큰 위기가 덥쳤다. 외국의 경제 전문가들은 한국이 무역적자 상황을 타개할 묘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더 심각한 요인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한국은 큰 폭의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외국 전문가들은 한국의 무역수지 적자 폭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데다, 당분간 이를 극복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은 큰 폭의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외국 전문가들은 한국의 무역수지 적자 폭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데다, 당분간 이를 극복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이 큰 폭의 무역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박정희-전두환 시절 터를 닦은 중화학공업과 IT산업 덕분이었다. 최근 들어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전통적 산업구조가 혁명적인 전환기를 맞고 있다. 문제는 한국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하여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해야 할 시기에 이념논쟁을 바탕으로 한 정치 투쟁, 세금이란 이름으로 가진 자 주머니 털어 나눠 먹기, 북한과 연계한 통일 놀이, 과거사 물고 뜯기에 흠뻑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남들은 정부-기업이 손잡고 총력전을 전개하는 와중에 한국은 신성장동력 창출을 기업에 떠넘겨 놓고 기업 목조르기, 기업 활동 방해하기, 노조 감싸기에 올인하다 보니 절망적인 현실에 부딪친 것이 무역적자 폭증의 주된 요인이다.

#. 코앞에 다가온 경제위기, 아무도 걱정 않는 무지의 태평성대

1997년 외환위기 와중에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라는 보고서를 발표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노무라 그룹은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을 마이너스 0.6%로 예측하면서 “한국 경제가 경착륙(hard landing)에 직면할 위험이 있다”라고 밝혔다. 특히 고금리 발(發) 주택경기 악화, 신용위험 증대가 뇌관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했다. 쉽게 말하면 한국은 외환위기 때와 버금가는 경제위기가 목전에 닥쳤음을 알리는 비상 사이렌을 울린 것이다.

코로나 사태 극복을 위한 통화 증발, 가상화폐 시장 붕괴, 인플레 억제를 위한 급진적인 금리 인상, 가계부채 증가로 인한 유동성 위기 등 글로벌 금융시장은 정상 상태를 크게 벗어나 있다. 따라서 앞으로 빠르면 한 달, 늦어도 올 하반기 안에 글로벌 금융시장은 미증유의 대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한국은 과연 그러한 위기의 후폭풍을 피해 갈 수 있는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다고 믿어도 되는 것일까?

경제가 무너지면 정치고 이념이고 다 쓰나미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서는 연일 반일 죽창가를 울려대고, 국회의원 정원을 50명 늘리느냐 마느냐가 주된 화제이며, 이재명을 언제 잡아넣는 것이 자신들의 총선 전략에 유리한지 계산기 두드리기 바쁘다. 국민은 연일 해외여행 계획 짜느라 고심 중이다.

조만간 미증유의 경제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필자의 예측이 제발 빗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그 예상이 적중한다면, 이번에도 그 위기의 원인은 인재(人災)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정치권과 전문가, 언론과 국민의 무지로 인한 예측 능력의 결핍이라는 재앙 말이다.

무지한 나라에 태어난 태평한 시민들은 세계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꿈에도 모른 채 언론이 제공하는 K먹방과 K요리, 트로트 경연으로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대체 이 나라 시민들은 언제쯤이나 우물 바닥에 앉아 하늘만 바라보며 개골대는 신세를 면할 수 있을 것인지…, 참으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봄이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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