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3월 8일 – 북한의 토지개혁 실시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아직 남한과 북한에서 나라가 세워지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북한에 만들어진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는 3월 5일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며 부동산·농기구 등의 매매·처분 등을 금지했다. 이어 3월 8일에 ‘토지개혁에 관한 세칙’이 공포되고 토지개혁이 본격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여러 나라에서 토지 개혁이 실시되었다. 남한과 북한은 물론 미군정 하에 있던 일본에서도 토지개혁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그 방법이 다 같지는 않았다.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나라들은 북한처럼 지주의 땅을 보상 없이 빼앗아(무상 몰수) 농민에게 돈을 받지 않고 나눠주는(무상 분배) 방법을 선택했다. 토지개혁을 위한 북한 당국의 토지 매수는 3월 말까지 짧은 시일에 완료되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5정보(49,587㎡) 이상의 모든 땅은 지주에게서 무상 몰수하였기 때문이다. 분배에도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동리별로 만들어진 농촌위원회가 자신이 사는 동리의 토지대장을 만들어 몰수하고 분배할 토지를 선정했다. 북한 전 지역에 걸친 토지개혁이 약 20일 만에 모두 끝났다.

 

38선 표지석. 북한의 토지개혁은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다. [사진=윤상구]

 

농민들은 돈 안 내고 인민위원회로부터 땅문서를 받았다고 기뻐했다. 그래서 9만여 명이나 되던 농촌위원회 위원은 앞다투어 북조선 공산당에 가입했다. 농민이 농사지을 땅을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좋은 세상을 공산당이 만들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4만여 호의 지주들은 고향에서 쫓겨났고 대부분 남한으로 도망쳐왔다. 이로써 북한에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혁명적인 토지개혁으로 처음에는 농민들이 땅을 거저 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농민들은 받았던 땅을 다시 빼앗기는 엄청난 비극을 겪게 되었다.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실제로 그 땅의 주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 땅을 남에게 팔거나 빌려줄 수도 없었다. 북한 농민들이 받은 권리는 그 땅에서 농사지을 수 있는 권리에 지나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물론 러시아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은 처음부터 농민을 혁명의 영원한 동지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농민의 대부분이 가난했기 때문에 공산 혁명의 주도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쉬우니 ‘노동자‧농민’을 위한 세상을 만든다고 선전했을 뿐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애당초 농민을 끝까지 함께 할 동지로 생각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농민은 자기 땅을 갖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농민도 땅을 가지면 공산주의자들이 최상위로 여기는 ‘무산 계급’의 자격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남한에서의 농지개혁은 한참 후,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에 시작되었다. 국회는 1950년 3월 농지개혁법을 최종 통과시켰다. 이 법의 주요 내용은 유상 몰수와 유상 분배의 원칙에 따라 농지를 재분배한다는 것이었다. 지주에게 보상할 농지의 가격은 연평균 생산량의 150%로 결정되었고, 농민들은 해마다 생산량의 30%를 5년 동안 갚으면 분배 농지를 자신의 땅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유상 분배라고 하지만 농민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상대적으로 불리해진 지주에게는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유익한 사업에 우선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혜택을 주었다. 농지개혁은 6‧25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957년까지 거의 완료되었다.

 
물론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에 불만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북한이 농민들에게 무상 분배를 한 데 비해 남한에서는 유상 분배를 하는 통에 농민들에게 큰 도움이 안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 농민에게 분배된 것은 경작권이었을 뿐이고 남한 농민들에게 분배된 것은 소유권 그 자체였다. 또 북한처럼 급진적으로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배되어야 할 토지가 크게 줄어들었다는 비판도 있었다. 줄어든 이유는 농지개혁이 이뤄지기 전에 지주들이 토지를 팔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주들에게 땅을 산 사람들은 대부분 소작농이었고 땅값도 법으로 정해진 연평균 생산량의 150%를 넘지 않았다. 결국 자연스럽게 농지 분배가 이루어진 셈이다.

 
재산권 관련 제도는 한 사회와 국가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제도로, 이를 개혁하는 일은 사회와 국가의 뿌리를 바꾸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그렇게 중요한 개혁을 남한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진행해버렸다. 이는 남한 사람들이 뭐라 하든 자신들은 공산주의로 가겠다는 확실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토지개혁에서 비롯된 이런저런 이유로 남한과 북한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통일된 국민 국가를 세울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1946년 3월 8일에 이뤄진 북한의 토지개혁은 이렇게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하는 데 중대한 빌미가 된 사건이다.

 
한 가지 더. 남한의 농지개혁은 곧이어 터진 6‧25전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농지를 갖게 된 남한 국민은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공산주의자들에 맞서 싸웠고 대한민국을 방어하는 데 크게 공헌한 것이다.

6‧25전쟁 때 남한 국민은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공산주의자들에 맞서 싸웠다. [사진=윤상구]

 

황인희 작가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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