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지 않고 고종이 계속 통치했다면 대한제국은 총독부 통치 시절보다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됐을까?

일주일여 후면 104주년을 맞는 3·1절이다. 이날을 맞아 일부 국수주의 학자들과 언론, 사이비 정치인과 지식인의 선동으로 일게 될 반일 광풍을 우려하며 이 글을 쓴다.

#. 이토 히로부미 통감, 궁금령(宮禁令) 발동의 비하인드 스토리

1906년 2월 1일 통감부가 문을 열었다. 그 전해 11월 17일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의 외교 업무를 감리·지휘하기 위해 일본 정계의 거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대한제국을 보호국화 하기 위해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 있던 이토 통감은 1906년 7월 2일, 고종 황제를 알현하여 궁중 개혁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궁금령(宮禁令)을 시행한다고 통보했다. 궁금령이란 고종이 거처하는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에 일본 순사·헌병을 배치하여 출입자를 통제하는 것을 뜻한다. 공적·사적 목적을 막론하고 궁중에 출입하여 황제를 알현하려면 반드시 일본 경무고문부의 허가를 득해야 하고, 확실한 사유가 있는 자에 한해 출입을 허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토 통감이 느닷없이 궁중 출입자를 통제하려 들자 고종은 “유림 중에서 사람을 수시로 불러 조언을 듣는 것은 군자의 임무”라면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에 대해 이토 통감은 “산속에 은거하고 있는 유림을 불러 국정을 논의하느니 공자의 백골을 구해 와서 마주 앉아 국정을 논하는 것이 낫다”라며 고종의 항의를 일축했다.

통감부는 ‘궁중의 위엄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7월 9일부터 전격적으로 궁금령을 시행했다. 이날부터 고종은 통감부의 허락 없이는 관리들조차 마음 편히 만날 수 없는 고립 상태가 되었다. 대한제국 고위 관리 중 한 명이었던 이용태 예식경(禮式卿·황실의 의식과 제사, 예의 절차를 담당하는 관리)과 육군 참장(현재의 육군 소장) 김영진이 허가증 없이 궁궐을 출입하려다 궁금령 위반으로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무렵 취재를 위해 서울에 온 영국 트리뷴(Tribune) 신문 특파원 더글러스 스토리(Douglas Story)는 일본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 상태에 놓인 고종을 ‘유폐된 황제(The Captive Emperor)’라고 보도했다. 열강과의 외교 관계를 중시하는 신중한 이토 통감이 영국 언론의 비판이라는 무리수를 두어가며 궁금령을 밀어붙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국의 국수주의 사학자들은 궁금령은 “대한제국 주권을 찬탈하기 위한 예비 조치”라고 입에서 침이 튀도록 강변한다. 그런데 타인의 시선으로 그 시대를 조망하면 이런 주장과는 크게 다른 인과관계가 발견된다. 이 무렵 통감부와 일본 군부는 고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더글러스 스토리 특파원은 “고종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일본 정보원들은 세계에서도 가장 민완한 수준”이라고 보도했겠는가.

고종 주변에서 암약하는 일본 첩보망이 탐지한 바에 의하면 고종은 겉으로는 이토 통감을 예우하는 척 하고, 돌아서서는 열심히 뒷담화를 즐겼던 것 같다. 고종은 이토를 ‘통감’이라는 공식 관직명을 무시하고 ‘이토 후작’, 혹은 ‘섬나라 오랑캐 이토(島夷敵 伊藤)’라고 표기했다(다키이 가즈히로, 「지(知)의 향도(嚮導)로서의 한국통치」, 이성환·이토 유키오 편저,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 선인, 2010, 282쪽).

모욕적인 언사를 사용한 고종의 비밀 친서가 발견되자 이토는 잔뜩 열을 받았다. 게다가 경운궁에는 수많은 내시·궁녀들이 바글거렸고, 전국에서 용하다고 소문 난 역술인·풍수가, 이름 없는 무녀 무리가 국운 융성과 고종의 황제권 유지를 위한 각종 묘수풀이, 푸닥거리를 위해 무시로 궁중을 드나들었다. 

고종이 비밀리에 일본에서 모셔오려 했던 일본 신흥종교 '대일본정신'의 창시자 이이노 기치사부로.
고종이 비밀리에 일본에서 모셔오려 했던 일본 신흥종교 '대일본정신'의 창시자 이이노 기치사부로.

그저 역술·풍수에 현혹된 황제의 취미생활 차원이었다면 일본인들도 그럭저럭 인내할 만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종이 ‘일본의 괴승 라스푸틴’, 혹은 ‘신탁(神託)의 달인’, ‘숨겨진 들판의 신’으로 알려진 신흥종교 ‘대일본정신’의 창시자 이이노 기치사부로(飯野吉三郞)를 비밀리에 모셔오려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일본 첩보원들의 염탐 결과 고종은 문제의 신흥종교 창시자를 “고금에 둘도 없는 신격 높은 학식자로서 일본 정계 원로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같은 인물도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의 교시에 따라 거취를 정하는 인물”로 과대평가했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고종은 이이노 기치사부로의 신통력으로 이토 통감의 위세를 꺾어 누르기 위해 비밀리에 사절을 일본에 파견, 그를 초빙하려 한 것이다. 가뜩이나 대한제국 궁중이 역술인·무당에 놀아나는 판에 일본의 신흥종교 창시자까지 불러다 일을 벌이려 하자 이토 통감은 인내심이 바닥 났다. 그는 고종을 외부와 차단해 미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궁금령이란 극약 처방으로 대처한 것이다(이이노 기치사부로 관련 내용은 다키이 가즈히로, 「지(知)의 향도(嚮導)로서의 한국통치」, 앞의 책, 284~285쪽 참조).

#. 공동묘지·화장(火葬)에 격렬 저항한 조선인들

조선은 예로부터 조상 묘지를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다. 속칭 명당 터에 부모의 묘를 쓰면 자손만대가 번창한다는 풍수설이 조선인의 영혼을 사로잡은 것이다. 명당이라 불리는 곳의 지형도를 보면 여성 생식기의 핵심 부위에 해당하는 곳을 뜻한다. 이런 곳에 부모를 모셔야 자손이 복을 받는단다. 죽은 사람 묘지의 길흉에 자손들의 화복(禍福)이 결정된다는 풍수의 근원은 미신이다.

이처럼 황당무계하기 이를 데 없는 풍수설이 21세기 인공지능(AI)과 빅 데이터가 판을 치는 시대에마저 장엄한 권위로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저당 잡고 있다. 덕분에 사업 번창을 갈구하는 자, 정치에 입문하려는 자, 선거 출마자, 대권에 도전하려는 자, 좋은 보직 받고 승진에 목마른 공무원 등등 너나 할 것 없이 부모 뼈다귀를 명당에 파묻는 경쟁을 벌이는 난리굿판이 도처에서 횡행해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한국인들이 끔찍하게 숭앙하는 명당의 지형도를 보면 여성 생식기의 핵심 부위에 해당하는 곳이다. 죽은 사람 묘지의 길흉에 자손들의 화복(禍福)이 결정된다는 풍수의 근원은 미신이다.
한국인들이 끔찍하게 숭앙하는 명당의 지형도를 보면 여성 생식기의 핵심 부위에 해당하는 곳이다. 죽은 사람 묘지의 길흉에 자손들의 화복(禍福)이 결정된다는 풍수의 근원은 미신이다.

1910년 한일병합 후에도 조선인들의 풍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심오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지관이 점지해주는 명당 터는 전 재산을 바쳐서라도 얻으려고 기를 썼다. 돈으로 묘터를 얻을 수 없으면 남의 소유라도 몰래 들어가 점유하거나, 타인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으면 밤에 몰래 파묘하여 자기 부모 시신을 갖다 묻는 범죄행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자고 일어나면 묫자리 강탈에 따른 범죄자가 속출하고,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묘지와 관련된 소송이 줄을 이어 가산을 탕진하는 사례가 부지기수였다.

이 땅의 통치자로 등장한 총독부 관리들 보기에 경치 좋고 물 맑은 산하는 온통 묘지가 차지하여 죽은 자가 산 자를 호령하는 모습은 너무나 낯설고 기이한 풍속이었다.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조선인의 풍수도참에 의한 묫자리 맹신은 풍속·교화·위생상 도저히 방치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였다. 게다가 산 사람을 위해 활용해야 할 토지를 죽은 자들이 깔고 앉아 산지를 황폐하게 하고 민력을 소모하고 있으니 이 기회에 악습의 뿌리를 끊기로 작심한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1912년 6월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 규칙’(총독부령 제123호)이다. 이 규칙의 제정 목적은 “종래의 미신·누습을 타파하고, 이로부터 생기는 많은 범죄와 쟁송을 예방함으로써 민력의 육성을 도모하고자 함”이었다(박찬승·김민석·최은진·양지혜 역주, 『국역 조선총독부 30년사(上)』, 민속원, 2019, 217쪽).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 별짓을 다하는 조선인들의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총독부는 공동묘지에만 시신을 매장하는 '묘지 규칙'을 엄격하게 시행했다. 사진은 총독부 시절 조성된 미아리 공동묘지.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 별짓을 다하는 조선인들의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총독부는 공동묘지에만 시신을 매장하는 '묘지 규칙'을 엄격하게 시행했다. 사진은 총독부 시절 조성된 미아리 공동묘지.

‘묘지 규칙’에 의하면 묘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공단체에서 설치하고, 공동묘지 이외의 곳에 매장을 금지했다. 또 조선인은 예로부터 화장을 기피하여 전염병 사체도 염을 하여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 때문에 화장을 장려하여 폐습을 일소하고자 했다.

“앞으로 모든 시신은 공공단체가 설치한 공동묘지에만 묻어라. 매장은 비위생적이니 가급적 화장을 하라.”

이 규칙은 1913년 9월 1일 경성부(현재의 서울시)에서 시동이 걸렸고, 1915년 충청남도를 마지막으로 모든 도에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총독부는  ‘묘지 규칙’을 통해 조선인이 혹세무민하여 목숨 걸고 찾아 헤매는 명당·길지 따위의 미신을 타파하겠다고 별렀다. 그런데 ‘묘지 규칙’이 발표되자 조선인들은 자랑스런 문화적 전통으로 떠받들어온 명당 신화를 일거에 박살내버리는 왜놈·쪽발이들의 ‘문명을 앞세운 폭거’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특히 명당 풍수라면 사죽을 못 쓰던 양반층이 극도로 반발했다. 1915년 3월 경남 창녕 직교리 마을 주민들은 묘지 신고를 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거세져 경찰이 출동, 주동자인 성근호 등 3명이 체포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조선인들의 저항으로 묘지 규칙 위반 건수는 1917년 2,499건, 1918년 2,509건에 달했다. 1919년 3·1운동에 수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이유 중 하나는 부모를 명당이 아닌 공동묘지에 모시도록 강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불효자를 양산한 ‘묘지 규칙’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일부 국사학자들의 분석이다.

총독부 측도 ‘묘지 규칙’이 지나치게 엄격하여 조선인의 관습과 풍속을 무시함으로써 불평불만을 사게 된 점을 인정했다. 그 결과 3·1운동 후인 1919년 9월 ‘묘지 규칙’을 약간 완화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박찬승·김민석·최은진·양지혜 역주, 앞의 책, 217~218쪽). 총독부가 조선인들의 뿌리 깊은 풍수 애호 사상에 브레이크를 건 ‘묘지 규칙’이 3·1운동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연구 결과를 이성적 시각에서 깊이 음미할 때가 되었다.

#. 3·1운동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윤치호

일주일 후면 3·1 만세운동이 벌어진 지 104주년 되는 날이다. 대한민국은 이날을 국경일 겸 공휴일로 지정하여 길이길이 그 고귀한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당대의 개화 선각자 윤치호는 3·1운동에 대한 인식이 일반 대중과는 크게 달랐다. 그는 조선인들이 크게 기대했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보았고, 조선 독립 문제는 파리 강화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못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 이유를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1919년 1월 29일)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2) 일본 입장에서, 조선은 생사가 걸린 문제인 만큼 다른 열강의 군사력에 일본이 제압되지 않는 한 조선이 독립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이나 영국이 하찮은 조선을 독립시킬 요량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불사할까? 그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3) 역사상 투쟁하지 않고서 정치적 독립에 성공한 민족이나 국가는 하나도 없다. 싸울 수 없다면, 독립을 외쳐봐야 부질없는 짓이다. 우리가 강해지는 법을 모르는 이상, 약자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윤치호 지음·김상태 편역,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 산처럼, 2014, 63쪽)

3.1만세운동은 고종의 국장을 계기로 일어났다. 윤치호는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에 팔아넘긴 망국 군주 고종의 죽음을 기뻐하기는커녕 백성들이 통분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3.1만세운동은 고종의 국장을 계기로 일어났다. 

이 와중에 고종이 사망하면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윤치호는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에 팔아넘긴 망국 군주 고종의 죽음을 기뻐하기는커녕 백성들이 통분해 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자신의 일기(1919년 1월 26일)에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고종 황제가 병합 전에 승하했다면 조선인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가면서 고종 황제를 위해 폭동 일으키려 하고 있다.”(윤치호 지음·김상태 편역, 앞의 책, 62쪽)

3·1 만세 시위가 고종의 국장(國葬)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사실은 총독부의 ‘묘지 규칙’, 대구 10월 폭동 당시의 시체 데모와 연계된 시각으로 바라볼 때 의미심장한 상상력이 발동된다. 조선인들은 타인의 죽음을 자신의 내적 불만을 활화산처럼 표출시키는 역사적 전통이라도 있는 것일까?

#. 3·1운동 주역 손병희를 극도로 혐오·비난한 윤치호

윤치호는 조선인은 독립이 주어져도 국가 운영 능력이 없어 독립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만세 시위는 백해무익하며, 무단통치를 연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러한 윤치호의 냉엄한 현실 인식은 “대중목욕탕 하나 운영하지 못하는 우리가 현대 국가를 다스리겠다고?”(1919년 2월 28일), “주먹만 가지고 기관소총에 덤벼드는 행위는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다”(1919년 5월 11일), “누군가가 나 혼자 조종한다는 조건으로 비행기나 잠수함을 준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그걸 받을 수 있겠나?”(1919년 7월 11일)라는 외침으로 터져 나왔다.

윤치호는 3.1운동 주동자 중의 한 사람인 손병희와 천도교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인 기록을 남겼다.
윤치호는 3.1운동 주동자 중의 한 사람인 손병희와 천도교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인 기록을 남겼다.

게다가 그는 시위 주동자 중 하나인 손병희와 천도교 인사들을 극도로 혐오하여 “천도교 인사들 같은 음모꾼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라고 경고했다. 그는 자신의 일기(1919년 4월 20일)에서 손병희·오세창 같은 천도교 지도자들이 만세 시위에 참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썼다.

“(1) 가난하고 무지한 신도들로부터 수백만 원을 사취한, 몹시 비열한 행위를 감추기 위해서. (2) 이름을 날린 후 영예와 명성을 등에 업고 감옥에서 나와 신도들로부터 더 많은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 수십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손병희 같은 사기꾼에게 다년간에 걸쳐 농락을 당해왔다는 것이야말로 조선 민족이 아직 독립국으로서의 생존을 향유할 만한 지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윤치호 지음·김상태 편역, 앞의 책, 99쪽)

#. 3·1운동 사망자를 10배 부풀린 문재인 대통령

지난 2018년 12월 14일 당시 국무총리 이낙연 씨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전체 회의에서 과거 민족진영에서 3·1운동을 혁명으로 칭했다면서 3·1운동을 ‘3·1 혁명’으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용어 문제는 그렇다 치고 사망자 수와 관련하여 중대한 하자가 발생했다. 2019년 당시 대통령 문재인 씨는 3·1절 기념사에서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의 10%나 되는 202만여 명이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7,500여 명의 조선인이 살해됐고 1만 6,000여 명이 부상했다. 체포·구금된 수는 무려 4만 6,000여 명에 달했다”라고 연설했다.

다음 해 3·1절 기념사에서도 “1919년, 한 해에만 무려 1,542회에 걸친 만세 시위 운동으로 전국에서 7,600여 명이 사망했고, 1만 6,000여 명이 부상했으며, 4만 6,000여 명이 체포·구금되었다”라고 연설했다. 대통령이 두 해 연속 3·1운동 사망자 수를 7,500명, 7,600명이라고 공개석상에서 발언한 것이다.

3.1절 기념사에서 3.1운동 사망자를 학계의 연구 결과보다 10배나 과장한 문재인 대통령.
3.1절 기념사에서 3.1운동 사망자를 학계의 연구 결과보다 10배나 부풀려 발표한 문재인 대통령.

이 수치는 독립운동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3·1운동 당시 일제의 폭력적인 탄압으로 한국 민중이 입은 피해 상황을 기록해 놓은 수치와 비슷하다. 박은식은 참여자 202만 3,098명, 사망자 7,509명, 부상 1만 5,961명, 피검자 4만 6,948이라고 밝혔다.

독립운동 연구가들은 이 수치가 상당 부분 과장되었다면서 3·1운동 관련 데이터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객관적으로 연구 분석했다. 그 결과 국사편찬위는 2019년 2월 3·1운동 관련 데이터베이스를 오픈했다. 학계의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작성한 이 데이터베이스에서 국사편찬위는 3·1 운동 당시 발생한 시위는 1,692건, 시위 참여 인원은 79만 9,017∼103만 73명, 사망자 수는 725∼934명이라고 밝혔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사망자 수에 비해 10분의 1로 줄어든 수치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 대통령이 자국 역사 연구의 대표 기관이 오랜 기간 연구하여 발표한 사망자 수를 10배나 부풀려 반일 선동에 앞장선 것이다. 이처럼 대통령이 앞장선 역사 뻥튀기, 반일 선동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 일제 치하에서도 비석에 ‘숭정(崇禎)’ 연호를 사용한 조선인들

제6대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의 재임기는 1931년부터 1936년까지였다. 그는 “내가 조선으로 가면 제일 먼저 농민들에게 밥을 먹게 해주겠다”라고 선언하고 조선 총독에 부임했다. 그는 (멸사)봉공·자조·협동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농촌진흥운동을 펼쳤다. 이것이 근면·자조·협동을 슬로건으로 한 박정희 새마을운동의 원조다. 우가키 총독은 또 북선(北鮮) 지역에 수력발전소 건설을 통한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여 조선의 중화학공업화에 앞장선 인물이기도 하다.

농촌진흥운동의 성과를 파악하기 위해 조선 곳곳을 누빈 우가키 총독은 어느 날 조선인 공동묘지 시찰에 나섰다. 명당 풍수에 목숨을 걸다시피 한 조선인들은 이 시절에도 총독부가 강제한 공동묘지는 조선 전래의 전통과 배치되는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며 침략적인 매장 제도라며 이를 갈았다. 

그런데 얼마 전 공동묘지에 조성된 묘지 앞에 세워진 묘비에 사망자의 생년 일시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연호인 ‘숭정(崇禎) 모년 모일’로 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한 우가키 총독은 큰 충격을 받는다(우가키 총독의 묘비명 관련 내용은 윤치호 일기 1934년 10월 6일, 윤치호 지음·김상태 편역, 앞의 책, 395쪽 참조).

1930년대 우가키 총독 시절에도 조선의 뼈대 있는 유림 집안에서는 망자의 묘비명에 명나라 신종 황제의 연호 '숭정'을 새겨 넣었다.
1930년대 우가키 총독 시절에도 조선의 뼈대 있는 유림 집안에서는 망자의 묘비명에 명나라 신종 황제의 연호 '숭정'을 새겨 넣었다. 조선인들의 질기고 질긴 중화사상을 묘비명으로 표출한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이 땅이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은 지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고, 만주사변이 일어나 드넓은 만주 땅을 일본이 차지하여 만주국을 수립한 시기였다. 명나라는 1644년에 망했으니 300여 년 전에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3세기가 지난 현세에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는 조선인들이 중국 명나라 황제를 흠모하기 위해 묘비명에 서기나 단기가 아닌, 명나라 황제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니.... 고래 심줄보다 더 질긴 조선인들의 중화사상, 그에 대비되는 뜨거운 배일사상을 몸소 체험한 우가키 총독은 이날 무슨 생각을 했을까?

#.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지 않고 계속 고종이 통치했다면?

역사를 공부하면서 "그 때 이런 일이 그렇게 되지 않고 이러저러하게 됐다면..." 하는 가정(假定)이란 부질없는 짓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취미생활 차원에서 대체 역사 탐구는 일말의 재미가 있다고 본다. 대한제국 지도자 고종을 끔찍하게 싫어했고, 그의 통치를 저주했던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1920년 10월 29일)에서 대한제국이 1910년 일본에 병합당하지 않고 고종이 계속 통치했다면 조선이 어떻게 됐을까를 상상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1) 아마도 궁궐과 조정에는 이용익, 이지용, 민영철 같은 야비하고, 잔인하고, 가증스런 악당들이 들끓었을 것이다. (2) 온 나라에 도적과 노상강도가 출몰해 인명과 재산이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3) 도지사, 군수, 군인, 경찰의 수탈과 만행이 도적과 노상강도들의 수탈과 만행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4) 미국인, 일본인, 프랑스인, 러시아인 등 외국인 투기꾼들이 광산, 산림, 어장 등 온갖 종류의 천연자원 양도라는 미명하에 강탈했을 것이다. 황제와 그의 비열한 충신들에게 가장 많은 뇌물을 바치는 패거리들이 관세, 세입 등 값나가는 것들을 모두 독차지했을 것이다. (중략) 고종 황제가 지난 14년 동안 전제적인 권력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더라면, 조선은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됐을까?”(윤치호 지음·김상태 편역, 앞의 책, 213~214쪽)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 식민지가 되지 않고 고종이 계속 통치했다면 이 나라 백성들의 삶이 일제 통치보다 더 나아졌을까?를 묻는 윤치호의 절규가 뇌세포를 통타한다. 이 나라 국뽕 학자들이여. 우리의 망국사를 황제 고종과 그를 떠받들던 고관대작의 관점이 아니라 윤치호처럼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한 백성들의 삶의 관점에서 봐줄 수는 없겠니?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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