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부터 '황인희 칼럼'이 '황인희의 역사 산책'으로 바뀝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해와 그 의의, 최근 상황과의 관계 등을 고찰해 오늘날 우리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기 위함입니다.

이에 그 달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다룬 글이 매주 1회 기고될 예정입니다.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구독 바랍니다.

 

황인희 작가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전쟁이지만 우리 역사상 무척 중요한 사건이다. 우선 전쟁이 우리 영토에서 시작되었고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두 나라의 일전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도 일본에도 한반도를 양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부동항(不凍港)이 절실히 필요했던 러시아는 유럽 쪽으로 진출하려고 몇 차례 시도했지만 영국이나 프랑스 등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었다. 그런 러시아가 보기에 한반도는 부동항이 줄지어 있는 훌륭한 장소였다. 게다가 러시아 황제는 전쟁을 일으켜 국내 불만 세력의 관심을 나라 밖으로 돌려보려고 했다. 한편 좁은 섬나라에서 벗어나 대륙으로 진출하려던 일본에도 한반도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요충지였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은 인천 앞바다에 있던 러시아 군함 두 척을 격침시켰다. 선전포고도 없이 일본의 기습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의 뤼순과 랴오둥 반도 등 대륙의 전투에서 일본이 승기를 잡는 듯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두 나라 모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기간도, 비용도 예상했던 것보다 두 배 이상 소모한 일본은 군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보급로가 드러난 것도 커다란 약점이 되었다. 러시아 역시 더 이상 전쟁을 치를 형편이 아니었다. 전쟁 중이던 1905년 1월 러시아혁명의 시작이 된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두 나라가 치른 마지막 전투는 1905년 5월에 치러진 대마도 해전이었다. 

 육지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고 싶었던 러시아는 영토의 서쪽 끝에서 위용을 떨치던 발트함대를 불러왔다. 발트해에서 아시아로 오는 지름길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지나는 것이다. 그런데 수에즈 운하에 권리를 가지고 있던 영국이 발트함대의 운하 통과를 막았다. 어쩔 수 없이 아프리카 남쪽 끝 희망봉을 돌아야 했던 발트함대는 발트해를 떠난 지 9개월만에야 일본 근처에 이를 수 있었다. 그동안 함대의 군인들이 지칠 대로 지쳐버린 것은 물론이다. 

 러시아 함대는 대마도와 일본 사이에 있는 대마해협으로 곧장 들어갔다. 러시아 함대는, 그때 우리나라 진해만에 있던 일본의 주력 함대가 자신들에 대항하려면 대마도 끝을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4년 전, 일본은 대마도의 허리를 자르는 만제키세토[万関瀬戸] 운하를 파두었기에 러시아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함대를 막아설 수 있었다. 24시간 동안 계속된 해전에서 일본은 이미 기진맥진해 있던 발트함대를 크게 물리쳤다. 

러일전쟁의 승패를 결정 지은 전투의 현장, 만제키세토 운하. [사진=윤상구]

 대마도 전투를 마지막으로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의 뒷정리를 위해 열린 포츠머스 강화 회의 결과 러시아는 일본에 사할린 남부를 내줘야 했고 한반도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결국 한반도에는 일본 한 나라만이 그 힘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러일전쟁은 대한제국이 무너지고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럼 당시 두 이웃 나라의 표적이 되었던 대한제국은 이 사태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전운이 짙어지고 있던 1903년 11월 23일 대한제국은 “장차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할 때 우리나라는 관계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다”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중립을 외칠 특권은 강한 힘을 가진 나라에만 주어지는 것이다. 

 대한제국은 전쟁이 끝나기 1년 전인 1904년 5월, “일본이 러시아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한 것이 오직 대한국의 독립을 유지하여 동양 전체의 평화를 확고히 하는 데 있다는 것을 헤아려 이미 의정서를 체결하고 협력함으로써 일본이 교전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편리하게 한다. 또 러시아 주재 공사관을 철회하여 대한국과 러시아 간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 앞으로 대한국의 방향을 명백하게 하고 러시아가 조약 등의 조건을 핑계로 침략적 행위를 다시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문서로 만들었다”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 칙선서(칙명으로 만든 문서)를 반포하였다. 고종은 그때 이미 한반도의 안위를 일본에 맡긴 것이다. 그 ‘문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이전에 한국과 러시아 두 나라 사이에 체결된 조약과 협정은 일체 폐기하고 전혀 시행하지 말 것이다.
1. … 두만강, 압록강, 울릉도의 산림 채벌 및 식수(植樹) 특허권은 본래 한 개인에게 허락한 것인데, 실상은 러시아 정부가 자체로 경영할 뿐 아니라 당해 특별히 정한 규정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침략 점거 행위를 하였으니, 당해 규정을 폐지하고 전연 시행하지 말 것이다. - <고종실록> 1904년 5월 18일

고종이 1년여 동안 숨어 있던 옛 러시아 공사관. [사진=윤상구]

 러일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감옥 안에서 전해 들은 청년 이승만은 그것이 한반도를 놓고 벌어지는 마지막 패권 다툼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그는 영한사전 만들던 것은 멈추고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힌 글을 일필휘지로 써냈다. 훗날 미국에서 처음 발간된 <독립 정신>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는 “스스로 나라를 지키려면 우선 국민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부자 나라가 되어야 한다. 또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을 바탕으로 강력한 국방력을 갖춰야 한다. 이것이 부국강병이다”라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젊은이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 상황을 타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이디어를 짜내고 국민에게 알리려고 죽을 힘을 다한 것이다. 그런데 황제인 고종은 그때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했을까? 어떤 상황인지 알고는 있었을까?

 러일전쟁은 남들이 치렀지만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은 처절한 ‘우리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생각하면 고종과 대한제국 위정자들의 무능과 무지, 게으름과 이기심이 함께 묶여 뇌리를 스친다. 그들은 나라나 국민의 안위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자신들의 편안한 삶과 권력 유지만을 중시했다. 그런데 그들의 그런 태도가 망국과 식민지 시대를 겪고도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새삼 안타까움이 몰려든다.

황인희 작가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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