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석우 객원 칼럼니스트

한국 사회가 발전한 것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빠르게 여성의 지위도 상승하였다.

되돌아보면 5백 년 조선시대는 주자학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남성 사대부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열악했다. 남존여비(男尊女卑)와 남녀7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 상징적 키워드였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흔적은 아직 남아 있다.

한국의 근대화 이전 농촌 인구는 7할 전후였다. 변변한 산업이 없으니 농업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가 없는 청년 실업자(失業者)들이 고향 농촌에 내려가서 지냈다. 고등 룸 펜이라 불렀다. 꿈도 없이 빈둥거리는 군상이었다.

1960년대 많은 가정은 7-8명의 자녀를 두었다. 농촌에서 딸들은 제대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서울의 친척 집에 사정해서 심부름이나 시키라고 올려보냈다. 소위 식모(食母)였다. 당시 서울에는 식모 없는 집이 없을 정도였다.

1970년 마산수출자유지역이 시작하였다. 일본기업들이 싼 인건비를 보고 진출하였다. 여공들을 모집하자 식모 살던 어린 여성들이 몰려갔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농촌 인구가 이동하는 물결에 따라 서울의 가정부 일 대신에 공장으로 옮겨갔다. 또박또박 받는 월급을 고향으로 보내면 남자 형제들의 학비로 쓰였다. 이렇게 여성 취업이 변화해나갔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정치 민주화가 벌어졌다. 그 와중에 여성들의 자의식도 깨어났다. 대표적인 사건이 1986년 부천 경찰서 권인숙 성고문 사건이었다. 이전에는 집안 망신이라 하여 쉬쉬하면서 피해 여성 혼자서 고통을 짊어지다가 생을 마감했었다. 권인숙은 다음 여성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사실을 폭로했다. 유교 전통이 남았던 한국 사회에서 독립 주체로서의 여성의 인권 의식이 일어난 것이다. 그 후 1991년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가 공개 증언의 테이프를 끊었다. 양국 간 정부 차원의 외교 현안으로 되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후 새로운 여성정책을 강조하였다. “스웨덴이나 핀란드 같은 선진국은 여성 취업률이 70퍼센트가 넘는다. 우리 사회가 선진국이 되려면 여성 취업률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여성들은 부정부패가 적어서 사회를 청렴하게 만드는데도 기여한다.” 그 당시 한국의 여성 취업률은 50퍼센트를 넘지 못했었다. 그것도 공장의 여공, 버스 차장이나 사무실 비서 등 하위직이 대부분이었고, 고위직은 희귀하였다.

김 대통령은 선거유세 당시 여성 장관을 2명 임명하겠다고 공약했으나, 최초 내각에서 3명을 임명하였다. 보사부 박양실, 여성부 권영자, 환경부 황산성이었다. 인사 검증을 너무 엄격하게 하여 박양실이 며칠 만에 낙마하자, 송정숙으로 교체하고 교육부 김숙희도 추가하였다. 인선이 매우 어려웠다. 경력 있는 여성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언론인이나 의사, 변호사, 교수와 같은 전문직 중에서 골라야 했다. 그런 분야에서도 여성은 희귀하였고 경력 쌓기가 매우 어려웠으므로 부처 수장으로서의 성공확률은 높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회적 파급효과는 대단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학 졸업한 여성이 취직하여도 대부분 사무실의 화분 같은 역할에 만족하였다. 직장의 주요 업무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여성 정책은 30대, 40대 경력 여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직장 여성이 결혼해도 경력을 단절하지 않는 전기가 되었다. 자신들도 경력관리를 계속하면 장, 차관을 비롯하여 각 분야에서 최고직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희망을 키운 것이다. 사회적 대변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병행하여 가족구조의 변화도 일어났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 산아제한(産兒制限)은 중요정책이었다. 먹는 입이 많으면 경제성장이 지체된다는 발상이었다. 1960년대에 ‘세 자녀 갖기’, 70년대에 ‘두 자녀 갖기’, 그리고 80년대에는 ‘한 자녀 갖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능했다는 한국의 엘리트 경제관료들도 통계상 2015년 전후에 인구 절벽을 맞게 된다는 걸 제대로 예측하기 어려웠다. 점차 한국의 가족 형태가 핵가족으로 변했다. 과거에는 사내 아들은 부엌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고, 딸들이 가사 도우미 역할을 전담하였다. 학업에서도 아들 중심이었으나, 핵가족이 되면서는 아들딸 차별이 없어졌다. 딸이라도 아들과 똑같이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키우게 되었다.

본래 한국 사회는 여성이 우성일 정도로 어머니의 힘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차별이 없는 분야, 대표적으로 스포츠와 같은 자유경쟁 분야에서는 한국의 여자 선수들이 남자들보다 앞서는 경우가 많았다. 국제 대회에서 여자농구, 배구, 탁구라든가, 빙상선수, 체조선수들이 그러하다. 박세리, 김연경, 김연아가 대표적이다.

사회적 차별로 주눅 들었던 여성들이 자유경쟁에서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여성 교육도 남성과 동등하게 발전하였다. 여성의 대학 진학률도 70퍼센트 이상으로 남성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높아졌다. 여성 교육의 발전은 국가발전에도 중요한 받침이 되었다.

최성락 SR경제연구소장은 중진국 함정 벗어나는 데는 고등교육이 중요하다고 분석하였다(2023. 1. 19 조선일보). 가난한 나라가 중진국으로 올라서는 데는 단순노동으로도 가능하나,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서는 데는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 창의적인 업무가 가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인적자원 층이 필수적이다. 1960년대 중진국이었던 100여 개 국가 중 2000년대까지 선진국이 된 경우는 13개국밖에 없다. 국민의 70퍼센트 이상이 고등학교 이상 교육을 받은 나라는 모두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섰다. 50퍼센트 이하인 나라 중에는 중진국 함정을 벗어난 국가가 없다. 1960년대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고 선진국가가 된 것은 경제학에서 볼 때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고등교육 받은 여성들 역할이 크다.

요즈음은 공정 경쟁하는 시험에서 여성들이 월등하게 앞서는 경우가 많아졌다. 대표적으로 외교관 시험의 경우 합격자의 2/3를 여성이 차지한다. 주요 언론의 경우 필기시험 합격자 중 9할 가까이가 여성이라고 한다. 구두시험에서 남녀 비율을 맞추는 게 어렵게 되었다. 과거에는 여성에게 가산점을 주어서 비율을 맞추던 분야에서 이제는 남성에게 가산점을 주어야 할 정도가 되었다. 여성들이 잠재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남성이 여성에게 경쟁에서 밀리기도 한다. 가뜩이나 어려운 취업전선에서 절망하기도 하여 심할 경우 여성혐오(女嫌) 현상으로 변질하기까지 한다. 그래서인지 지역갈등과 세대 갈등보다도 젠더 갈등이 더 심각해지는 것 같다.

이제 여성이 경력 단절 없이 계속 발전해나가는 추세가 되었지만, 아직도 문제가 남아 있다. 육아 부담이 가장 큰 문제다. 과거보다 많이 개선되었어도, 보육 시설이 불완전할 경우 여성은 직장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과거에는 친정어머니가 손주들을 돌보아주었으나, 이제는 무작정 손주 돌보기 봉사에 선을 그으려 한다. 그래서 선진국과 같이 완벽한 보육시스템이 필요하다.

그에 앞서 남성들의 의식 전환이 중요하다. 육아 부담을 공동으로 진다는 생각이다. 필자와 같은 구세대의 남존여비 사고는 완전히 지워버려야 한다.

남녀가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가지게 되면 그 자녀를 공동으로 키워낸다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녀 중심의 화목한 가정을 이루면 사회 전체의 안정감이 높아진다. 우리 사회의 온갖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고 화합을 촉진하는 자양분이 된다. 그 안에서 다시 여성의 자아실현도 만개하게 된다.

그래서 10대 경제 대국으로서 명실공히 글로벌 중추국가가 되는 것이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 축복으로 여겨지는 나라, 여성의 자아실현과 생명을 낳고 기르는 일이 함께 갈 수 있는 대한민국을 꿈꾼다면 너무 이상적일까.

김석우 객원칼럼니스트(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 전 통일원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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