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갈리스토 3세가 서거하고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 추기경이 후임교황(비오 2세)이 되었다. 새 교황은 귀족출신이긴 했지만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 돈이 없어 친구들의 책을 베껴가면서 공부했다. 당시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이 출세하는 두 가지 길이 있었는데 용병과 인문주의자가 되는 것이었다. 몸이 튼튼한 사람은 용병이 되었다. 용병대장이 되어 명성을 떨치면 밀라노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처럼 한 나라를 얻을 수 있었다. 한편 완력은 없지만 머리가 좋은 사람은 궁정이나 부자들의 후원을 받으며 문학과 각종 정책에 대한 자문 등으로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새 교황은 이러한 방법으로 입신출세한 사람이었다. 

  영혼을 팔고 방탕했던 젊은 시절 
  젊었을 때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 같다. 여기에 줄을 섰다가, 세가 불리해졌다 싶으면 곧 바로 다른 줄을 찾았다. 대립교황 펠릭스 5세의 비서를 하다가 비전이 없어 보이자 곧 프리드리히 3세에게 붙었다. 바젤공의회에서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을 열심히 공격하다가 상황이 역전되자 돌아서서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을 위해 일하기도 했다. 무슨 철학이나 정치적 신조는 보이지 않는다.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산 느낌이다. 돈도 빽도 없는 에네아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돌아온 탕자이기도 했다. 젊었을 때는 방탕한 생활을 했다. 사생아를 낳아서 아버지에게 양육을 부탁하기도 했고 결혼하려는 소녀에게 자유로운 연애를 권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윌듀런트 문명이야기 5-2>. 교황이 되어 고향인 시에나를 찾았을 때, 젊은 시절 자신과 바람피우던 유부녀가 방문해서 교황을 당황하게하기도 했다<시오노나나미, 신의대리인>. 그래도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도덕적인 인물로 변화해 갔고, 특히 사제가 된 이후로는 직분에 맞는 삶을 살았다. 정치적으로도 신성로마제국과 로마 사이에 평화적인 관계를 정착시키는데 기여했다. 
  교황 선거에서는 프랑스파와 이탈리아 파의 팽팽한 대립 속에서 스페인 출신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이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 추기경을 지지하자 그 균형이 무너졌다. 새 교황 비오 2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독일을 잘 다룬 성공적인 외교관이자, 학자로서의 명성 등이 교황선출에 많은 도움을 줬을 것이다.

  선거 공약: 대투르크 십자군 결성과 교회개혁
  그는 선거 공약으로 대 투르크 전쟁을 위한 십자군 결성과 교회개혁을 내세웠다<교황사전>. 당시 교회개혁의 요구는 독일지역에서 강했다. 왕권이 강한 프랑스, 영국에 비해 제후들로 분열된 독일은 로마 교황청에 세금을 많이 뜯기고 있다고 생각했고, 교회개혁을 주장하다 화형당한 얀 후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새 교황은 오랜 기간을 독일에서 살았고 독일 황제를 위해 봉사한 경력이 있어 알프스 너머의 분위기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교황에 즉위하면서 교회개혁을 실천해 갔다. 족벌정치를 배제해서 조카들이나 측근을 새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관례를 깼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를 도운 보르지아 추기경에게 중요 직위를 부여하고, 경쟁자였던 루앙추기경도 계속 등용함으로써 논공행상과 포용정책을 병행했다. 둘째 그는 청빈함을 실천했다. 교황청의 일상경비를 대폭 삭감했다. 바티칸에서 그의 살림비용은 최저로 기록되었다<윌듀런트, 문명이야기 5-2>. 사람들은 교황청을 로마수도원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에 다섯 시간이상 자지 않고 정무에 몰두했다. 민중들은 교황의 청빈함을 찬양했다. 그러나 이러한 청빈이 유럽 전체교회로 퍼져 나가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사냥개를 키우고 배우들과 식객들을 위해 많은 돈을 쓰면서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추기경들을 질타했지만 단순히 ‘아껴 쓰고 절제하자’ 는 구호만으로 개혁이 성공하기 힘들다. 개혁이 지속되려면 인센티브 등 제도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개혁위원회를 만들어 개혁안을 제안했으나 반대에 부딪혀 좌절했다. 교황은 로마에 개혁을 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문명이야기 5-2>. 한편 예술가와 학자 등 인문주의자들은 비오 교황이 자신들 중 몇 명을 고용하고 자주 만나주기는 했으나, 십자군 전쟁을 위해 후원금을 아끼는 교황에게 실망했다. 교회개혁은 처음에는 신선했지만 지속되지 못하고 서서히 사라졌다. 

  십자군 결성을 위한 만토바공의회와 군주들의 무관심
  대 투르크 십자군을 제창한 이유는 전임 갈리스토3세 교황이 십자군으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해야 교황권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대 투르크 십자군을 결성하기 위한 만토바 공의회를 소집하고 유럽의 통치자들에게 초청장을 보냈으나 군주들은 응하지 않았다. 교황자신이 예전에 헌신적으로 모셨던 프리드리히3세도 옛정을 잊었는지 오지 않았다. 십자군 제창이 구체적인 사건이 계기가 된 것이 아니라 교황의 개인적인 생각과 열정에서 시작된 것이라 군주들에게는 뜬금없는 일이었다. 오스만 투르크가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유럽을 위협했지만 직접 국경을 맞대지 않는 나라들에게는 강 건너 불이었다. 당시 신앙심이 약해진 유럽국가들은 투르크 보다 인접 국가들을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독일황제는 투르크와 싸우며 약해진 헝가리를 병합하려고 했고, 피렌체는 피사 공격을 방해한 베네치아를 증오하며 투르크를 암암리에 지원하고 있었다. 밀라노는 베네치아가 투르크와 싸우는 틈을 타서 제네바를 손에 넣으려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군주들의 입장에서 교황의 계획은 현실성 없는 이상에 불과했다.

  군주들의 무관심속에서 교황이 만토바 회의장에 도착한지 4달이 지나서야 겨우 첫 회의가 열릴 수 있었다. 그 후 토론으로 또 넉 달을 보냈다. 십자군 경비를 대기위해 모든 평신도들이 수입의 30분의1을, 유태인은 20분의1, 성직자는 10분의1을 내기로 했다.
  문제는 만토바 회의 후 교황은 교회개혁에 반대되는 결정을 했다. 만토바에서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의 반대로 애를 먹어서인지 족벌 인사를 단행했다. 12명의 새 추기경을 임명했는데, 그중에는 비오 2세의 19세 조카와 17세의 만토바 후작의 동생도 포함되어 있었고 12명중 9명이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로마에 대한 다른 국가들의 증오심이 되살아났고, 독일과 프랑스의 성직자들은 10분의 1세 납부를 미룰 뿐만 아니라, 각국의 군주들을 설득하라는 교황의 명령에도 침묵을 지켰다.  
  이러한 갑갑한 상황에서 교황은 술탄 메흐메트2세에게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편지를 썼다. 기독교 가정의 어린이를 뽑아서 이슬람으로 개종시켜 최고의 전사와 행정관을 키워내고 있던 그에게 이런 편지를 쓴 자체가 난센스다. 물론 메흐메트2세로부터 아무 답변이 없었다. 
 어쨌든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동안 투르크로부터 수입에 의존했던 옷감염색용 백반이 교황령에서 발견된 것이다. 십자군전쟁을 돕기 위한 신의 기적이라고 교황은 외쳤다.
  
  투르크의 적들과 서유럽 국가들의 상황
  베네치아는 교황의 의지가 확실한 것을 알고 전쟁을 준비했다. 알바니아에서는 스칸데르베그가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고,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는 점점 팽창하는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때문에 서방에 접근하고 있었다. 또한 아나톨리아 동부의 아크코윤루(백양왕조)는 투르크계 국가로 오스만 투르크의 라이벌이었고, 이 나라의 우준 하산 왕은 문무를 겸비한 명군으로 메흐메트2세의 최대적수였다<오가사와라, 오스만 제국>. 베네치아는 아크코윤루에 공수동맹을 제안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한 연합전선을 구축하려 했다<시오노 나나미, 신의 대리인>. 유럽이 단결만 했다면 한번 해볼 만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신앙심이 시들어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던 서유럽 국가들은 십자군을 위해 돈과 목숨을 걸지 않으려 했다. 프랑스의 루이11세는 처음에는 교황에 호의적이었으나 나폴리를 장악하려는 프랑스 앙주가문을 도와주지 않자 돌아섰다. 보헤미아는 왕의 후원 하에 얀 후스가 시작한 반란을 계속하고 있었고, 독일의 성직자들은 십자군 십일조를 거부하고 교회개혁을 위한 공의회 소집을 요구했다. 이탈리아 군주들은 십자군 전쟁으로 베네치아가 다시 강성해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비오 2세의 출신지인 시에나조차 교황의 세금징수 명령을 모른 체하고 있었다. 그래도 교황은 십자군을 재촉하기 위해 직접 군대가 집결하는 안코나를 방문하였으나, 군대는 모이지 않았다. 교황은 안코나에서 분노 속에서 죽었고, 그 직후 베네치아 함대가 도착했으나 십자군은 곧 해체되었다. 훗날 알렉산드르 6세 교황은 젊은 시절을 회고하며 비오 2세를 “교황의 사명감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외곬로 생각했으며, 십자군 원정을 제창해서 실패하자 분노와 절망으로 미친 사람처럼 되어 죽었다<시오노 나나미, 신의대리인>.”고 했다.

  십자군 전쟁으로 교회개혁을 덮으려한 교황
  비오 2세는 투르크의 현실적인 위협과 교회개혁의 요구를 십자군전쟁으로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십자군 전쟁으로 교회개혁 이슈를 덮으려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십자군 전쟁에서 성공한다면 교황의 인기가 올라가서 교회개혁요구가 당분간 잠잠해 질 수 있다. 그러나 십자군 결성이 실패하거나,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대단히 치명적이 될 수 있다. 또한 전쟁을 통해서 교회개혁을 덮으려는 의도만큼 기독교 교리와 모순되는 것은 없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교회개혁과 십자군은 다른 문제다. 십자군 제창은 유럽 군주들이 투르크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서로 협력하려는 조짐이 보일 때까지 기다리거나 협력하도록 조정하는 일부터 해야 했다. 그리고 교회개혁을 차근차근 추진해나가는 것이 정도였다. 문제는 가장 어려운 개혁이 기득권 버리기이고, 교회는 가난해지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가진 권력을 내려놓지 못했다. 스스로 하지 못하면 외부의 힘이 강제적으로 하도록 만든다. 그 파도가 서서히 밀려오고 있었지만 당시 교황청 사람들은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독단적인 결정의 위험성
  비오2세 교황은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교황이었다. 젊은 날의 과오를 감추려하지 않고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다만 한 때 그렇게 성공적이었던 외교관이 십자군과 같은 엉뚱한 판단을 내렸을까하는 안타까움이 생긴다. 그리고 십자군이 아니라 교회개혁을 위해 목숨을 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정책 방향 수립과정에서 한 두 사람의 독단적인 결정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독단적인 부동산 정책 등으로 정권을 내놓은 전임 문재인 정권을 보더라도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부족하다.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완전해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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