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진연 같은 초호화판 잔치에 필요한 돈은 백성의 고혈을 빨거나, 각종 이권을 외국에 헐값 받고 팔거나, 외국 빚을 얻거나 미친 듯이 화폐를 발행하여 때웠다. 덕분에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대한제국은 고종의 방탕하고 방만한 나라 운영으로 1910년 나라가 망할 때 정부 1년 세입의 7배나 되는 4,559만 엔의 막대한 외채를 짊어졌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하지 않았어도 나라는 외국 빚으로 망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 고종과 그 일족을 위한 궁중 잔치, 임인진연(壬寅進宴)

1902년 12월 7일 덕수궁 관명전에서는 고종 즉위 40주년과 나이 60을 바라보는 망륙(望六)인 51세를 기념하기 위해  '임인진연(壬寅進宴)’이란 황실 잔치가 거창하게 열렸다. 진연이란 궁중에서 베푸는 잔치란 뜻이다. 1902년은 임인년이므로 이 행사에 ‘임인진연’이란 타이틀이 붙은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행사에는 진행요원만 333명이 참여한 것을 비롯하여 악공 113명, 무용수 277명이 동원되었다. 각종 악기 30종과 수백 곡의 궁중음악이 연주되고, 춤도 29가지나 공연되었다. 고종의 즉위 40년과, 51세 기념 생일을 기리기 위해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 사흘 밤낮에 걸쳐 범 국가적 차원의 대잔치가 떡벌어지게 치러진 것이다. 

이때의 행사를 눈앞에 보듯 전해주는 기록물이 4권 4책 분량의 ‘임인진연의궤(壬寅進宴儀軌)’라는 책자다. 진연의궤에는 궁중 잔치의 준비과정부터 행사 절차에 대한 해설, 공연 종목, 잔치에 사용된 그릇과 장식물, 복식과 무용 동작, 동원된 악기와 연주복, 심지어 상에 올라간 떡의 개수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임인진연은 남성 신하들과 함께 공식적인 행사를 올린 ‘외진연’과 황태자와 황태자비, 군부인, 좌·우명부, 종친·척신(남성 신하) 등이 함께한 ‘내진연’으로 나뉘어 열렸다. 진연의궤에 의하면 진연은 사흘 동안 중화전에서 열린 외진연을 시작으로 관명전에서 열린 내진연과 야진연, 익일회작과 익일야연으로 진행되었다.

#. 사흘 밤낮에 걸쳐 음주·가무 이어져

행사의 백미는 고종에게 축하 술잔을 올리는 예법인 ‘진작’이다. ‘배’(절한다), ‘흥’(머리를 든다), ‘평신’(일어선다) 등의 구호에 맞춰 황태자(순종)를 시작으로 황태자비, 영친왕, 종친·척신까지 일곱 차례 고종에게 술잔을 올렸다. 진작 순서에 따라 고종 황제의 무병장수와 나라의 태평성대를 위해 보허자, 낙양천, 수제천, 해령, 여민락, 수룡음, 세령산, 계면가락도드리 등 65곡의 궁중 음악이 연주되고 봉래의, 헌선도, 몽금척, 향령무 등 화려한 궁중 무용이 진행되었다.

수많은 초대인사와 대규모 출연진이 참여한 가운데 사흘 밤낮에 걸쳐 질펀한 음주·가무가 계속되다 보니, 이들을 먹이고 출연진 섭외와 진행을 위해 진연도감이 임명되었다. 이들을 삼시세끼 먹이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궁중 음식을 조리하는 소주방으로는 감당이 어렵게 되자 덕수궁 내에 숙설소라는 임시 주방이 차려졌다. 헌종 시절인 1848년에는 190칸 넓이의 숙설소가 세워졌다고 한다. 고종은 황제에 오른 데다가 축연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규모였으니 이보다 훨씬 넓은 숙설소가 마련되었을 것이다. 

숙설소에는 감관(監官)이 파견되어식 조리의 전 과정을 감시 감독했고, 음식 조리는 당대 최고수 요리사인 숙수(熟手)가 담당했다. 궁중에 전속된 요리사를 대령숙수라 하는데, 보통 40∼50명의 베테랑 숙수가 배치되었다. 조리된 음식은 푸른색 옷과 건을 착용한 군인들이 행사장까지 운반했다. 

#. '임인진연'이 자주 국가를 염원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궁중 잔치?

그로부터 120년 후인 2022년 12월, 국립국악원은 사흘 밤낮에 걸쳐 고종이 주관했던 임인진연을 100분짜리로 대폭 축소하여 무대에 올렸다. 당초 계획은 연초에 이 작품을 선보이려 했으나 코로나로 두 차례나 연기되었다가 12월에야 빛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행사를 설명하는 김영운 국립국악원장의 소개 멘트가 흥미롭다.

국립국악원이 120년 만에 재현하여 무대에 올린 고종 시대의 궁중 잔치인 '임인진연'.
국립국악원이 120년 만에 재현하여 무대에 올린 고종 시대의 궁중 잔치인 '임인진연'.

조선일보 보도(2013년 1월 3일, ‘조선 500년 마지막 궁중 잔치의 허망함’)에 의하면 김영훈 국립국악원장은 임인진연 공연에 대해 “자주 국가를 염원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궁중 잔치의 재현”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고 한다. 김 원장은 취재기자들과의 대화에서 “당시 우리나라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국력이 쇠잔해가던 무렵이었다. 고종은 임인진연을 통해 독립국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내고 독립국으로서 위상을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했다”면서 “당대 최고 예술가가 꾸몄던 궁중 예술을 국민 모두가 함께 보고 즐기는 무대 공연형 작품으로 재창조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 원장은 또 “120년 전 궁중 의례의 진면목, 당시 시대적 상황과 고종의 절절한 심정을 함께 느껴 보길 바란다”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연출을 맡은 박동우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의 설명은 더더욱 흥미롭다. 박 교수는 “1902년은 을사늑약 3년 전 시점이었다. 당시 고종은 해외 열강 11개국 사절을 초청해 즉위 40주년 칭경예식을 갖고 대한제국의 힘과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콜레라가 창궐해 국제행사는 취소하고 국내 행사인 임인진연만 진행했다”라고 설명했다.

뭐라고? 고종이 임인진연을 통해 독립국이 되려는 열망을 드러내고 독립국가의 위상을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했다고? 대한제국의 힘과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이 무슨 해괴한 망언이란 말인가.

#. 고종의 궁중 잔치에 1년 치 국가 예산의 9%를 퍼부어

이런 미화찬양 일변도의 설명과는 달리 당시 궁중 연회의 절차와 의식을 기록한 진연의궤를 소장한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에 발견된다.

“1902년 두 차례 치른 잔치에서 대한제국 1년 예산의 9%에 해당하는 비용이 쓰였다. 성대한 기념 잔치로 인한 업무 공백과 막대한 비용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됐고, 이후 근대화를 위한 개혁도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국운은 기울어 갔다.”

고종이 1년 치 국가 예산의 9%를 쏟아부어 거창한 잔치를 흥청망청 즐긴 1902년은 제1차 영일 동맹이 체결된 해다. 이 무렵 대한제국은 황실의 밑도 끝도 없는 낭비로 인해 재정이 파탄 났다. 덕분에 관리와 군인, 경찰을 비롯하여 외국에서 초빙해 온 고문관들의 월급조차 지급할 수 없는 형편에 처했다. 국가 운영은 이 나라, 저 나라에 각종 이권을 저당잡히고 몇 푼씩 고금리 차관을 들여다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다. 바로 이 해에 황제 고종은 자신의 왕위 등극 40주년을 기념하고, 자신이 51세가 된 것을 자축하기 위해 참으로 무지막지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 제2수도 건설, 석조전 신축, 고물 석탄운반선을 군함으로 속아 구입

나라가 망해갈 무렵 고종이 저지른 일 중 대표적인 몇 가지만 소개한다.

첫째, 평양에 서경(西京)이란 이름의 제2수도 건설에 돌입한다. 이유는 러시아와 일본이 1896년에 이어 1900년에 북위 39도선을 경계로 대한제국을 분할하여 나눠 가지려는 시도를 한 탓이다. 고종은 한반도가 분할될 경우 러시아에 의지하여 북부지방에서라도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서경 건설에 나선 것이다(이윤상, 「대한제국기 국가와 국왕의 위상 제고사업」, 『진단학보』 95(2003), 90쪽).

고종이 서경 건설을 위해 짓기 시작한 궁궐(풍경궁)의 정문인 황건문. 서경은 일본과 러시아가 대한제국을 39도선을 기점으로 분할하려 하자 러시아에 의지해 북쪽지역에서라도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고종이 서경 건설을 위해 짓기 시작한 궁궐(풍경궁)의 정문인 황건문. 서경은 일본과 러시아가 대한제국을 39도선을 기점으로 분할하려 하자 러시아에 의지해 북쪽지역에서라도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둘째, 즉위 40주년 기념행사 때 각국 특별사절단을 초청하여 화려한 행사를 열기 위해 1900년부터 무지막지한 예산을 쏟아부어 경운궁(덕수궁) 내에 서양식 석조전을 짓기 시작했다. 대한제국 재정 고문을 맡았던 영국인 총 세무사 브라운이 주도했고, 설계는 영국인 하딩이 담당했다. 원래는 경희궁에 지을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경운궁에 터를 잡은 이유는 바로 옆에 영국공사관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습관성 외국공사관 도피 증세가 있던 고종은 여차하면 영국공사관으로 피신하기 위해 경운궁과 영국공사관 사이에 생양문(生陽門)을 설치했다. 돈이 없어 계속 늦어진 공사는 착수한 지 10년 만인 1909년 완공되었으나, 다음 해에 대한제국이 멸망했다.

셋째, ‘어극 40년 칭경(稱慶)예식’으로 명명된 즉위 40주년 경축 행사를 국제 행사로 거창하게 치르기 위해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했다. 일정은 1902년 10월이었으나, 하필 이 무렵 콜레라가 창궐하여 1903년  4월 30일로 행사가 연기되었다. 이왕 일정이 연기되었으니 행사는 더욱 성대한 규모로 확대되어 903년 초부터 모든 행사가 다시 준비되기 시작했다.

1903년 초, 지방군 1,500명을 서울로 불러올려 의장대로 훈련하고, 각 지역 광대들을 서울로 집결시켜 각종 재주를 맹렬하게 연습 시켰다. 고종은 왕궁에서 칭경예식 행사장까지 이동하기 위해 미국에서 최고급 자동차를 수입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탁지부 대신은 알렌 주한 미국공사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알렌은 미국의 자동차 딜러에게 부탁하여 포드의 2인승 오픈카 승용차 ‘모델 A’ 한 대를 인천으로 보냈다. 국내에는 승용차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비싼 인건비 들여 일본인 기사를 고용하여 운전을 맡겼다. 이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고종은 외국 귀빈을 실어나르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VIP용 인력거 100대를 수입했다.

고종이 칭경 40주년 예식 때 행사장까지 타고 가기 위해 수입한 미국산 자동차.
고종이 칭경 40주년 예식 때 행사장까지 타고 가기 위해 수입한 미국산 자동차.

1902년 대한제국의 연간 국가 예산이 759만 원이었는데, 성대한 황제 즉위 40주년 준비에 거금 100만 원이 눈 녹듯 사라졌다. 축하행사 준비를 위해 1년 치 예산의 13%가 투입된 것이다. 정리를 하면 칭경예식에 연간 국가 예산의 13%, 그 해 연말의 임인진연 행사에 9%, 합계  22%가 고종의 즉위 40년 기념과 51세 기념 행사에 투입된 것이다. 1903년 1월 서울 주재 외국공사관 모임은 “대한제국의 재정 형편으로 볼 때 칭경식은 무모한 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박종인의 땅의 역사, ‘러·일이 대포를 꺼낼 때 고종은 파티를 벌였다’, 「조선일보」, 2019년 11월 5일).

넷째, 일본으로부터 대한제국 연간 예산의 10.2%인 55만 엔을 들여 일본 미쓰이물산으로부터 고물 중고 석탄 운반선을 순양함이랍시고 구입했다. 이것이 치욕스러운 군함 양무호다. 양무호는 명칭이 군함이었으나 워낙 낡고 속력이 느려 훈련함으로도 사용이 곤란한 폐물이었다. 도입하고 보니 운영비만 엄청나게 잡아먹는 고철 덩어리인 데다가, 원료인 석탄 구입 자금조차 없어 항구에 세워놓아야 했다.

문제의 군함 양무호가 대한제국의 바다를 지키기 위한 목적에서 도입한 것이라면 그나마 이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대한제국에는 해군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해군이 없는 데 군함부터 도입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렇다면 엄청난 비용을 들여 이 배를 구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종이 자신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칭경예식 때 외국 귀빈을 위한 예포 발사용으로 도입한 양무호. 중고 석탄운반선에 소구경 함포를 몇 문 얹은 것을 순양함으로 속아 도입했다.
고종이 자신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칭경예식 때 외국 귀빈을 위한 예포 발사용으로 도입한 양무호. 중고 석탄운반선에 소구경 함포를 몇 문 얹은 것을 순양함으로 속아 도입했다.

1903년 1월 25일 군부대신 신기선과 미쓰이물산을 대리한 하기와라 모리이치(荻原守一) 주한 일본 임시대리공사가 맺은 계약의 부속 명세서에서 그 비밀의 단서가 발견된다. 이 명세서에는 “무기(軍器)는 적당히 완비할 것, 식당에는 미려(美麗)한 서양 요리 기구 30인분, 사령관 이하 함장 사관 25인 침구는 화려한 서양 물품으로 완비할 것, 각 구경 대포 실탄 외에 예포(禮砲) 연습용 공탄(공포탄)과 소총 탄환도 적당히 준비할 것. 접객실을 특설하여 대한국 황실 경절 때 봉축에 사용”이란 내용이 명기되어 있었다.

당시 주한 미국공사 알렌은 “이 배의 용도는 어극 40년 칭경예식을 위해 발주한 것”이라고 폭로했다. 즉, 즉위 40주년 기념식 때 외국 귀빈을 맞기 위한 의전용 예포 발사 목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 외국 빚내서 벌인 망국 잔치를 재현해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한 차례 연기 끝에 1903년 4월 30일 속행하기로 야심차게 준비했던 칭경예식은 황태자 이은이 천연두에 걸리는 바람에 또 다시 9월 26일로 연기되었다. 하지만 9월 무렵 또 다시 콜레라가 창궐하여 무기 연기. 황제 고종은 그토록 학수고대했던 칭경예식이 무산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앞에서 소개한 ‘임인진연’이란 궁중 잔치를 떡 벌어지게 열어버린 것이다. 다음 해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고종의 숙원이었던 즉위 40년 칭경예식은 끝내 열리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이러한 행사와 잔치에 필요한 돈은 백성의 고혈을 빨거나, 각종 이권을 헐값에 외국에 팔아먹거나, 외국 빚을 내거나 미친 듯이 화폐를 발행하여 때웠다. 덕분에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백성들의 삶은 더더욱 고단해졌다. 대한제국은 고종의 방탕하고 방만한 나라 운영으로 1910년 나라가 망할 때 정부 1년 세입의 7배나 되는 4,559만 엔의 막대한 외채를 짊어졌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하지 않았어도 나라는 외국 빚으로 망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국립국악원의 '임인진연' 재현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
국립국악원의 '임인진연' 재현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즉위 40주년 칭경예식을 비롯하여 국립국악원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는 임인진연 궁중 잔치는 물론이요, 제2의 수도인 서경 건설, 석조전 건설 등은 모두 외국 빚잔치로 치른 것이다. 1910년 한일병합 덕분에 고종이 내지른 대한제국의 막대한 대외채무는 전액 조선총독부가 떠안았다.

이런 일을 저지른 인물이 벌인 궁중 잔치가 “독립국의 위상을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한 것”(김영운)이고, “대한제국의 힘과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박동우)라니…. 이런 발언이 정말 제정신을 가지고 하는 것인지, 참으로 가슴이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김영운 국립국악원장과 박동우 교수는 임인진연을 무대에 올리기 앞서 기초적인 근대사 공부부터 먼저 하시길 간절히 부탁드린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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