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칼럼] 거짓말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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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05.23 10:52:28
  • 최종수정 2018.05.24 10:54
  • 댓글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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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만연하는 사회에서 학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영훈 객원 칼럼니스트

내가 봉직한 대학의 교훈은 “진리는 나의 빛”인데 라틴어로 쓰여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성경 말씀도 있다. 공자는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셨다. 40년 전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면서 나는 이런 경구(警句)를 신봉하는 편이었다. 진리와 허위가 대결하면 결국 진리가 승리할 것이다. 그런 믿음에서 정직하려 했고, 옳다고 믿는 것을 주장했고, 틀린 학설을 비판함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도 그렇게 믿는가라고 누가 물으면 자신이 없다. 많은 일을 겪는 과정에서 나는 한국인에겐 거짓말이 숨결로 베어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거짓말이 문화로서 만연한다면, 거짓말이 다수 인간의 생존전략으로 용인된다면, 그런 사회에서 진리는 결코 허위를 이길 수 없다. 그런 사회에서 인문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학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성립할진대 얕은 수준의 기능적이거나 응용적 수준에 그칠 터이다. 

2016년에 발표된 이우연 박사의 논문 「전시기(1937-1945) 일본으로 노무동원된 조선인 탄·광부의 임금과 민족 간 격차」(『경제사학』61호)는 일본으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가 노예로 혹사되었다는 통념에 대한 일대 도전이었다. 임금은 정상으로 지급되었으며, 일본인과의 격차는 숙련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에 불과했으며, 숙련이 향상됨에 따라 격차는 해소되는 추세였다는 것이 논문의 주요 요지이다. 조선인 노동자는 임금의 상당 부분을 저축하거나 본가로 송금했으며 나머지를 용돈으로 사용하였다. 탄광에서의 노동은 위험했지만, 조선인에게만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재해 발생율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간의 차이는 없었다. 재해가 발생하면 피해자나 그의 유족은 회사의 규정에 따라 소정의 보상을 받았다. 

논문이 발표되자 일본의 언론이 반응하였다. 몇몇 중앙지가 크게 보도하였다. 대학과 민간 단체가 이 박사를 초청하여 세미나를 두어 차례 하였다. 어느 연구소는 이 박사의 논문을 번역하여 학술지에 실었다. 정부 기관도 관심을 표명하였다. 일본에 유리한 주장이어서만은 아니다. 일면 그렇기도 했겠지만, 실증적으로 그렇게 진지한 연구성과는 일본에서도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입장의 차이를 떠나 새로운 연구성과에 관심을 표명하는 것은 역사의 실태에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선진사회라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대조적으로 한국에서는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한두 인터넷 매체를 제외하곤 어느 언론도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어느 대학이나 연구단체도 이 박사를 초청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두고 2003∼2010년 정부는 강제동원 진상 규명과 피해보상 작업을 벌였다. 정부는 일단 이 박사의 이야기를 경청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 문제와 관련된 모든 사람과 단체와 기관은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도 떠들어서 좋을 것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사이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강제동원 노동자의 동상을 세우는 캠페인이 벌어졌고, 몇 군데에 이미 세웠다. 이 박사는 약 200명의 지지지를 모아 동상 건립 반대운동은 벌였다. 얼마 전 이 단체와 민주노총 간에 공개토론을 갖자는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취소되었다. 상이한 입장의 두 단체가 공개토론으로 승부를 겨루고 언론과 국민이 공정한 심판관으로 역할을 하는 정신문화는 아직 한국사회와 거리가 멀다.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의 탄광이나 공장에서 노예로 혹사되었다는 한국인의 통념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피면 정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 전쟁 말기에 공장이 파괴되거나 종전 후 급거 귀국하는 혼란 통에 몇 개월의 임금을 정산받지 못하고 귀국한 사람들이 많았다. 저축, 보험, 연금을 찾지 못하고 돌아온 사람도 많았다. 1946년 일본정부는 장차 제기될 청구에 대비하여 관련 회사와 단체에 미불 임금과 예금을 금융기관에 공탁하도록 지시했는데, 대략 2,000만 달러에 달하였다. 이 같은 민간이 보유한 확정적 채권(債權)은 정부 간의 외교적 교섭의 대상이라고 할 수 없다. 국교 수립 이전이라도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와 교섭하여 민간이 보유한 일본 회사나 정부에 대한 채권을 회수하여 돌려줌이 마땅하였다. 

정부는 그런 일을 하지는 않고 약 100배 부풀린 30억 달러의 식민지 지배에 따른 배상을 일본정부에 요구하였다. 당연하게도 교섭은 10년 이상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채권자들의 불만은 커질 대로 커졌다. 그런 가운데 재일 친북 단체인 조총련(朝總聯) 학자들에 의해 전시기에 조선인이 노예로 연행되고 혹사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국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드디어 1963년 국교 수립에 임하여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에 3억 달러를 지급한다는 합의가 도출되었다. 청구권 금액이 얼마인지 따지지 않고 일본정부가 경제협력자금을 포함하여 3억 달러를 일괄 지급하고 이로써 청구권 문제를 영구히 소멸시킨다는 조건이었다. 

이후 한국정부는 그 3억 달러를 ‘청구권 및 경제협력 자금’이라고 하지 않고 ‘청구권자금’으로 공식 호칭하였다. 국민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정부가 그 돈으로 민간 보유의 채권에 대해 보상을 하는 것은 1975년의 일인데, 역시 총 2,000만 달러에 달하였다. 3억 달러를 받고 그 15분의 1만 지급했으니 채권자나 유족의 불만이 컸다. 그 사이 채권 당사자가 죽거나 증서를 분실한 경우가 많았다. 유족들은 일제의 노예로 혹사당했다는 아버지의 유산으로서 상당 금액의 채권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후 노무현 정부가 다시 보상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선 언급을 생략한다. 결론을 말하면 역사의 실태에 객관적으로 접근한다는 자세는 민간의 요구나 정부의 정책과 거리가 멀었다. 그에 관한 학술 연구가 전무한 실정에서 보상 작업이 정치적으로 행해졌다. 노무현 정부는 일차 보상을 행한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는 자세에서 근 4,000억 원에 달하는 세금을 무작위로 투하하였다. 6만 3,000여 명의 민간에게 사망과 상이(傷痍)의 등급에 따라 2,000만 원에서부터 상당한 액수를 지급했는데, 하등의 피해를 입지 않고 정상 귀환한 사람까지도 그 대상으로 하였다. 그래서 탄광에서 사망한 광부 유족의 경우, 사망 당시 일본회사로부터 소정의 보상을 받고, 1975년 한국정부로부터 30만 원의 보상을 받고, 2003년 다시 한국정부로부터 2,000만 원을 보상받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실제 그런 사례가 없지 않다고 한다. 몇몇 유족은 두 차례에 걸친 정부의 보상에도 불구하고 일본회사에 대한 청구권은 자연법적 권리로 존속한다는 소송을 제기하여 대법원에서 승소까지 하였으니, 사태는 아직 진행형이다.

저간의 실태가 이러하니 이우연 박사의 논문에 대해 민간이나 정부가 침묵으로 대응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 박사에 따르면 당초 형성된 민간의 채권은 일반적으로 수개월의 미불 임금이었다. 그것이 정부의 선도 하에 민간뿐 아니라 일국의 도덕적 양심을 상징하는 대법원까지 가세하는 거짓말의 대행진을 연출하였다. 정확하게는 좀 더 따져야겠지만 위증, 무고, 사기 범죄가 일본보다 무려 300배나 많다는 일각의 주장은 진실에 가까울 터이다. 거짓말을 추상(秋霜)으로 다스리는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이 실종한 지도 오래다. 

모두 금전을 추구하는 거짓말 문화의 덕분이다. 그 역사적 배경은 길고도 깊다. 김대업이란 희대의 거짓말쟁이가 대통령선거의 판세를 바꾼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래 광우병, 세월호, 최순실 사태로 이어진 거짓말의 국민적 파동이 급기야는 일국의 대통령을 구속시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거짓말 행진의 종착지는 어디쯤일까.

이영훈 객원 칼럼니스트(전 서울대교수/이승만학당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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