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갈수록 거지 근성이 기승을 부린다는 것이다. 공짜를, 무한정의 호의를 권리로 여기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늘어나고 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남의 탓을 하고 그걸 빌미로 뭔가 뜯어낼 궁리만 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그게 정당하고 잘 하는 일이라고 부추기는 사람에게 쉽게 넘어가는 것도 하멜이 지적한 ‘조선인’의 특징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무엇이 옳은지 다 알 수 있는데 그것을 안 한다. 안 하려 한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네덜란드 상인 하멜 일행이 조선에 표류해온 것은 1653년 조선 효종 때였다. 그들은 그해 7월 30일 타이완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났다. 닷새 동안 태풍과 싸우고 표류한 끝에 제주도에 닿은 것은 8월 16일. 하멜 일행이 제주목사 이원진에 의해 심문을 받은 것은 양력 8월 22일이었다. 효종실록 1653년 9월 26일에는 그 심문에 대한 장계가 실려 있다. 
 “배 한 척이 섬 남쪽 해안에 좌초했습니다. 대정 현감 권극중과 판관 노정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살펴보라고 했는데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배가 바다에서 뒤집혀 있고 생존자는 38명인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 왜말을 아는 자를 시켜 ‘너희는 서양의 길리시단(크리스찬)인가?’라고 묻자 모두가 ‘야야!’하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나라를 가리켜 묻자 ‘고려’라고 했고, 이 섬을 가리키며 물으니 ‘오질도’라 했습니다. 중국을 가리켜 물으면 ‘타밍[大明]’ 또는 ‘타팡[大邦]’이라 말하고 서북쪽을 가리켜 물으니 ‘타르타르[韃靼]’라고 말했습니다. 동쪽을 가리켜 물으니 ‘야판[日本]’ 혹은 ‘낭가삭기[郞可朔其, 나가사키]’라고 대답했습니다. 가고 싶은 곳을 묻자 ‘낭가삭기’라고 했습니다.”  

 하멜이 탔던 네덜란드 상선 스페르베르호에는 64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28명이 죽고 36명만이 살아남았다. 스페르베르호의 실종 후 일 년이 지난 1654년 10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발표하고 배와 선적 화물을 결손 처리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3년 후 실종되었던 선원 중 일부가 일본에 다시 나타났다. 조선에 억류되어 있다가 탈출한 하멜 일행이었다. 그동안 36명 중 살아남은 자는 16명뿐이었다. 하멜 일행은 조선 탈출 후 1년이 지난 1667년 10월 23일에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조선에 억류된 기간에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하멜은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것이 그 유명한 <하멜표류기>이다. 
 <하멜표류기>는 ‘표류기’와 ‘조선왕국기’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조선왕국기’로, 17세기 조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관찰한 기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국기’에는 조선의 지리, 어업, 기후와 농업, 군주, 군대, 정부, 세금, 형벌, 종교, 가옥과 가구, 여행과 접대, 교육, 혼인, 장례, 교역, 주변 세계, 농업과 광산, 도량형, 동물과 새, 언어와 문자, 산수와 부기, 국왕의 행차, 타르타르(청나라) 사신의 행차 등 간단하지만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중 내가 특별히 관심을 두는 것은 ‘민족성’ 부분이다.  
 “코레시안(조선인)은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들은 되지 못합니다. 남을 속여넘기면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잘한 일로 생각합니다. …… 한편 그들은 착하고 남의 말을 곧이듣기 잘합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들에게 우리 말을 믿게 할 수 있었습니다. …… 그들은 여자같이 나약한 백성입니다. …… 화란인 얀 얀스 벨테브레(박연)는 타르타르인이 얼음을 건너와 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 적과 싸워 죽은 것보다 산으로 도망해서 목매달아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고 들려주었습니다. 그들은 자살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어쩔 수 없어 그랬다는 식으로 그런 (비겁한) 병사들을 오히려 동정해 줍니다. …… 그들은 피를 싫어합니다. 누군가가 전투에서 쓰러지면 곧 달아나고 맙니다. 그들은 병에 대해 커다란 혐오감을 갖고 있고, 특히 전염병에 대해 그렇습니다. 전염병이 걸린 경우 그들은 곧 환자를 집에서 운반해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이나 고을 밖으로 실어 내며 …… 지나가는 사람은 환자 쪽을 향해 땅에 침을 뱉고 지나갑니다. 도와줄 친구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그대로 죽고 맙니다. ……” 

 이 글을 그대로 믿는다면 17세기의 조선인은,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아주 강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은 되지 못한다, 남을 속여넘기고 아주 잘한 일로 생각한다, 여자같이 나약하다, 적과 싸우는 것보다 차라리 산으로 도망해서 목매달아 죽는다, 자살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피를 싫어해 누군가가 전투에서 쓰러지면 곧 달아난다, 전염병 환자 쪽을 향해 땅에 침을 뱉고 지나간다는 등 비루하고 나약하고 부도덕하기 짝이 없다. 물론 착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그 말은 “남의 말을 곧이듣기 잘 한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하멜의 기록에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짧은 기간 여행자로 주마간산식으로 조선을 본 것이 아니라 13년 동안 조선인과 어울려 살면서 관찰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다른 항목의 내용도 거의 있는 그대로인 것을 보면 이 민족성 부분도 본 대로 느낀 대로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하멜이 조선인의 민족성을 일부러 나쁘게 기록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당시 조선인의 인간성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보내진 하멜 일행은 중책을 맡을 수도 있었다. 조정에서는 앞서 흘러든 네덜란드 사람 박연(벨테브레)과 같이 이들이 조선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길 바랐다. 그런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청나라 사신 행렬에 난입하여 조선 조정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 일이 발생했다. 이후 그들은 전라도로 유배되어 7년 동안 지냈다. 
 그 7년 동안 전라병사가 다섯 차례나 바뀌었다. 하멜 일행에게 호의적이어서 보름 정도의 장거리 여행을 허용한 병사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라병사는 그들에게 중노동을 시켰고 의복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한때 그들은 구걸하여 연명해야 할 정도에 이르렀다. 약자에 대한 배려는 없고 오히려 괴롭히는 관리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인다.  
 “여수에 내려온 이후 어떤 수령은 할 일도 없는데 우리를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마당에 세워 놓았다. 또 어떤 수령은 자기가 쏜 화살을 하루 종일 줍게 했다. 우리가 항의하자 그는 더 힘든 일을 시키겠다고 협박했다. 말 그대로 고역이었다. 결국 그 고생을 참지 못하고 동료 부르트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모험으로 끝날지언정 우리의 운명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하멜 일행 중 여덟 명이 목숨을 걸고 작은 배에 의지하여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우리의 민족성이 하멜의 기록처럼 정말 그렇게 비루하고 허접했을까? 우리 민족의 DNA에는 정말 나약함과 비겁함이 새겨져 있는 걸까? 
 단재 신채호는 1925년 동아일보에 게재한 ‘조선 역사상 일천 년래 제일 대 사건’이라는 글에서 신라 화랑도를 거쳐 고려 때까지 면면히 이어지던 우리 민족의 진취적인 기상이 서경 천도 운동에 실패하면서 소멸되었다고 썼다. 이 진취적 기상은 낭가 사상(郎家思想)이다. 묘청이 일으킨 서경 천도 운동의 이면에는 낭·불·유(郎佛儒) 3가의 쟁투가 감추어져 있었는데 그 결과 낭·불 양가는 패퇴하고, 유가가 집권하여 이런 결과를 빚었다는 것이다. 그는 서경 천도 운동이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다툼이었다고도 주장하였다. 그래서 서경 천도 운동 실패 후 낭가의 독립 사상이 설 자리를 잃고 사대주의가 판을 치게 되었으니, 이 사건을 ‘조선 역사상 일천 년래 제일 대 사건’이라 할 만하다는 것이었다. 
 
 한때 우리의 민족 정기를 살리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시도된 적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민족 정신 살리기 노력은 국민교육헌장과 새마을 교육으로 드러났다. 국민교육헌장의 내용은 민족 주체성에 기초한 국민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 안에 자주 독립, 창조와 개척, 협동 정신, 애국애족, 통일 등 우리 교육의 핵심 요소들이 강조되고 있다. 국민교육헌장 안에서는 조상의 훌륭한 전통과 유산의 계승 발전과 성실, 공익, 질서 등 물질적 발전과 정신적 가치관 사이에서의 조화로운 융합, 권리와 의무, 참여와 봉사 등 국가 의식과 사회 의식의 함양, 조국 통일의 실현과 민주주의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또 근면, 자조, 협동을 강조한 새마을 교육은 국가 발전에 공헌하는 실천적 인간을 육성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이 군사 문화의 잔재,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로 몰려 다 사라지고 그 이후 우리 곁에서는 민족 정기를, 진취적 기상을, 국혼을 논하는 사람을 보기 힘들어졌다. 그래서일까? 요즘 우리 사회에는 <하멜표류기> 시대의 조선인들이 넘쳐나는 것 같다. 품위나 자존심을 찾아볼 수 없고 책임감도 구 시대의 유물이 된 듯하다. 회사에서는 젊은 직원들의 ‘3요’에 골치를 썩는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업무 지시를 하면 “제가요? 이걸요? 왜요?”라고 묻는다는 거다. 그 일이 왜 재수없게 자신에게 떨어졌는지 의아해하는 사람이 일을 제대로 할 리 없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갈수록 거지 근성이 기승을 부린다는 것이다. 공짜를, 무한정의 호의를 권리로 여기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늘어나고 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남의 탓을 하고 그걸 빌미로 뭔가 뜯어낼 궁리만 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그게 정당하고 잘 하는 일이라고 부추기는 사람에게 쉽게 넘어가는 것도 하멜이 지적한 ‘조선인’의 특징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무엇이 옳은지 다 알 수 있는데, 알면서도 그것을 안 한다. 안 하려 한다.  

 하루 이틀에 국민성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방치는 나라를 망치는 적극적인 행동과 다름없다. 정신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하는 걸까? 그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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