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2월 초 사우디아라비아 방문에서 ‘위안화 원유 결제를 추진하겠다’고 밝혀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미국 달러 패권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페트로 달러’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면서 ‘페트로 위안’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2월 초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 '위안화 원유 결제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2월 초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 '위안화 원유 결제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하지만 중국·아랍정상회의가 끝난 이후 발표된 공동성명에는 ‘위안화 원유 결제’에 관한 내용이 단 한줄도 없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국제무대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시 주석이 오랜만에 등장한 국제무대에서 세계 여론의 주목을 끌어보려다 망신만 톡톡히 당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시진핑의 ‘페트로 위안’ 구상은 애당초 단기간에 실현될 문제가 아니라이번에 궤도 위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는 분석이다.

공들이는 시진핑 주석, 사우디와 38조원 규모 투자협정 체결

이번 사우디 방문에 시 주석은 상당히 공을 들였다. 미국과 사우디 간의 관계가 순탄치 않은 틈을 타서 중동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사우디와 약 38조원에 이르는 투자협정을 맺었다.

시 주석은 지난 8일(현지시간) 정상회담을 갖고 ‘포괄적 전력 동반자 협정’에 서명하며 두 나라 관계를 강화하기로 하고, 그린 수소·태양광·건설·정보통신·클라우드·의료·교통·건설 등 분야 34개 협정을 체결했다.

특히 시 주석은 전통적 우방인 이란과의 관계도 희생했다. 공동성명에서 이란 핵개발 반대를 구체적으로 명시했고, 이란·아랍에미리트 간 3개의 섬을 둘러싼 영토 분쟁의 평화적 해결도 강조했다. 대신 중국과 걸프협력회의(GCC) 국가 간에 평화적 핵 이용 기술 포럼을 설립하고 핵안보 시범센터를 공동으로 건설해서 사우디를 비롯한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쿠웨이트 등 GCC 국가들의 평화적 핵 이용과 핵기술 분야 인재 양성을 돕겠다고 한 것이다.

시진핑 주석은 사우디와 38조원 규모의 투자협정을 체결했다. [사진=MBN 캡처]
시진핑 주석은 사우디와 38조원 규모의 투자협정을 체결했다. [사진=MBN 캡처]

모두 이란이 민감하게 여기는 내용들로, 화가 난 이란은 주이란 중국대사를 초치해 항의를 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중국이 위안화 원유 결제에 집착하는 이유는 ‘페트로 위안’이 국제 결제통화로서 위안화가 한 단계 발돋움할 수 있는 발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지만, 위안화의 국제결제 통화비중은 2.37%에 불과해 세계 5위권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연초 엔화를 제치고 4위로 올라섰다가 다시 5위로 떨어졌다.

안보상 미국 의존도 큰 사우디, ‘페트로 위안’ 제안 일단 거절

시 주석의 사우디 방문을 두고 전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며, ‘페트로 위안’이 성사되는지의 여부에 관심을 기울였다. 시 주석에 대한 사우디 정부의 극진한 환대는 지난 7월 초 바이든 미국 대통령 방문 당시의 싸늘한 분위기와 대조를 이룬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게다가 빈 살만 왕세자는 시 주석과 만난 자리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강조해, 사우디가 미국과 거리를 두고 중국에 접근하려고 함에 따라 미국의 중동정책에도 상당한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의 제안을 거절했다. 빈 살만 왕세자가 실권을 장악한 이후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가 이전 같지는 않지만, 중동의 지정학적 상황을 감안하면 사우디가 미국에 등을 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이슬람 수니파 리더인 사우디는 이란을 주축으로 한 시아파 국가들과 군사적 대립을 하는 상황에서, 미군과 미국산 무기에 안보를 크게 의지하고 있다. 사우디가 수입하는 무기의 60%는 미국산이며, 중국산 비율은 1%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심기를 건드릴 경우 사우디는 심각한 ‘안보 공백’ 사태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VVIP 원유 고객인 중국, 사우디와 미국의 불화 파고들며 ‘페트로 달러 체제’ 균열 노려

하지만 중국은 사우디가 판매하는 원유의 4분의 1을 사들이는 ‘VVIP’ 고객인 동시에 사우디가 사활을 거는 핵 보유까지 도와줄 수 있다는 입장이어서, 사우디를 중심으로 GCC 국가들이 시 주석의 제안을 계속 모른 척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시 주석의 이번 제안은 거절됐지만, 이번 방문을 통해 사우디와 중동 국가들을 압박하며 향후 국제 원유 거래에서 위안화 결제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한층 높였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특히 사우디 지배층 사이에서는 2010년대 이후 미국의 셰일 유전 개발로 중동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줄어들자 미국이 사우디의 안보 문제를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여기에 바이든 정부가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의 배후로 빈 살만 왕세자를 지목하자, 오랜 우방(友邦)이던 미국·사우디 관계가 껄끄러워졌다. 따라서 사우디 입장에서는 중국과 한층 깊은 파트너십을 맺을 수 있는 상황이다.

이 틈을 파고든 중국은 미국에서 들여오기 어려운 군사용 무인기(드론)나 탄도미사일을 공급해주고, 핵 기술까지 전수해주겠다며 사우디에 바짝 다가섰다. 사우디가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며 중국의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이다. 미 외교안보 매체 포린폴리시(FP)는 시 주석의 사우디 방문에 대해 “수십년 간 지속된 미국과 사우디 간 ‘일부일처 시대’의 종식이 가까워졌음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지난 9일 미 월스트리트저널(WSJ)도 “2016년부터 위안화로 원유를 거래하는 방안을 추진해온 중국이 결실을 눈 앞에 뒀다”며 “페트로 달러 체제가 중대한 기로에 놓였다”고 평가했다. 당장 ‘페트로 위안’이 성사될 것 같은 분위기였던 셈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페트로 위안'을 통해 '페트로 달러' 체제 균열을 노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페트로 위안'을 통해 '페트로 달러' 체제 균열을 노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사우디의 경제·안보 상황과 중국의 행보로 볼 때, 견고한 페트로 달러 체제는 머지않아 균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중동 지역 및 사우디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페트로 달러 폐기는 궁극적으로 불가피하고, 시점의 문제가 남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 ‘페트로 달러 체제’ 위협하는 국가에겐 철퇴 가해

하지만 페트로 달러가 미국의 패권 유지에 핵심 역할을 하기 때문에, 미국은 페트로 달러 체제를 위협하려는 국가에 매번 철퇴를 가했다. 미국이 2000년대 들어 이란·이라크·리비아 등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강력한 제재 조치를 취하거나 군사 행동을 벌인 데에는 테러 지원 의심, 핵 보유 시도와 같은 표면적 이유 외에, 해당 국가들이 원유의 달러화 결제를 깨려고 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2000년 유로화로 석유 결제를 시도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리비아의 카다피는 몇 년 뒤 미국에 의해 각각 대량살상무기(WMD) 제조자와 반(反)민주주의 세력으로 지목돼 처단됐다. 2008년 달러 결제를 배제하고 유로화와 엔화로 결제했던 이란과 2009년 탈달러를 시도했던 베네수엘라는 미국의 무차별 경제 제재를 받았다. 이런 점을 모를 리 없는 빈 살만 왕세자 입장에서 ‘페트로 위안화’는 쉽지 않은 선택인 셈이다. 따라서 시 주석에 대한 극진한 환대가 ‘미국으로부터 더 좋은 조건의 협상을 받아내기 위한 지렛대’가 아니었느냐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시진핑 주석에 대한 사우디의 극진한 환대는 대미 메시지의 일종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시진핑 주석에 대한 사우디의 극진한 환대는 강력한 대미 메시지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중국, 달러 패권 흔들려고 다각적 시도

하지만 달러 패권을 흔들려는 중국의 시도는 사우디에서 그치지 않는다. 중국은 막강한 구매력을 앞세워 중동의 다른 국가나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과도 원유나 광산물을 위안화로 거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최근에는 러시아와 손잡고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 국가들의 통화금융 시스템 통합에도 나서고 있다.

지난 6월 열린 브릭스 정상회의에서도 브릭스 회원국 중앙은행과 상업은행들이 ‘위안화 국제결제망(CIPS)’에 참여하는 방안이 검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원자재 거래의 90% 이상이 달러로 결제되는 상황에서 자원 부국인 브릭스가 별도의 통화금융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면, 달러 패권에 적잖은 타격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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